2024년 11월 12일 화요일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속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진다

  

신자의 생장

 

 

베드로후서 318

 

근간, 한 친구에게 말한 것

 

너희는, 더욱 더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더욱 더 그 은혜를 알기를 힘쓰라’(베드로후서 3:18일역)

 

너희는 은혜 안에서 생장하라. 그리고 또 우리의 주로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에 있어서 생장하라’(직역)

 

신앙은 생명이다. 신자는 생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생장해야 할 것이다.

 

생장이 그치는 때에 생물은 죽는 것이다. 생장은 생명의 현저한 특징이다.

신자는 무궁한 생명을 받은 자로서 무궁하게 생장해야 할 자이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속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진다’(고린도후서 4:16일역)는 바울의 말은, 이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그러면 신자는 어떻게 생장해야 할 것인가?

그의 생장은 어떠한 반항을 취할 것인가?

 

이 일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것이 베드로후서의 일 일절이다.

 

일역의 더욱 더 알기를 힘쓸 것이다로는 의미가 아주 미약하다.

그보다, ‘생장하라로 직역할 것이다.

 

너희는 은혜 안에서 생장하라. 문자는 간단하나 의미는 심장하다.

 

은혜라는 말에 능동적(active)과 수동적(passive)인 것의 의미가 있다.

 

은혜가, 하나님께로 부터 나와 신자에게 임할 때 능동적이다.

그리고 이것에 움직여져 감화되어 신자의 품성으로서 나타나는 때 수동적이다.

 

은혜는 본래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능동적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서 신자에게 임하신다(능동적이다).

신자는 은혜가 맺는 신뢰 순종의 미덕으로서 이에 응답한다(수동적이다).

 

입은 은혜와 받는 은아, 은혜는 이것을 두 방면에서 볼 수가 있다.

 

너희는 은혜 안에서 생장하라고 한다.

 

신자의 입장에서 보고서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둘째의 의미에 있어서의 은혜이다.

영어의 grace이다. 독일어의 Anmuth이다. 일본어의 온아(溫雅), 양순, 정숙이다.

 

주로서 여성적 미덕이다. 즉 하나님께 대해서는 전연 수동(수신)의 태도이다.

자아를 죽이고 성령으로 충만 되고자 하는 마음씨이다. 일언으로서 이것을 말하면 신앙이다.

 

그는 반드시 흥()하고 나는 반드시 쇠한다’(3:30 일역참조)고 침례 요한이 말한 그 태도이다.

 

나는 없는 자로 되고, 그리스도가 내 속에 있어서 만사로 되시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신자의 생장은 그 일면에 있어서는 이 방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이 더욱 더 쇠해지는 일, 더욱 더 멸해지는 일, 그리고 마침내 무아의 상태로 달하는 일, 신자의 힘쓰는 바, 원하는 바는 이것이다. 그리고 그는 신앙적 생애를 계속하여 더욱 더 이 방향으로 항해 생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한 것은, 나 곧 내 육체에 있지 않음을 안다는 것은, 그가 자기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 지식에 있어서, 그는 자기를 버리고 자기에 죽어 타자(他者)안에서 살고자 하는 소원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의 생장은 그 자기 방향에 있어서는 생장이 아니라, 그 반대인 죽음이다.

 

나라는 것이 날마다 감퇴되는 일, 내 행위, 내 도덕, 내 노력이 날마다 감퇴하여

어떤 타자(他者)가 내 속에 있어서 증진하기를 그는 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은혜 안에서 생장하라, 일면에 있어서는 생장하지 말라, 그 반대로 사멸하라고 함이다.

 

그리고 신자는 이 방면에 있어서는 신앙이 진보되면 진보될수록 감퇴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허()로 되고 공()으로 되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그 행복 된 공허의 상태에 달하는 것이다.

 

그는 마침내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그 노력까지를 방기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자기에 대하여 전연 무지(無知) 무능(無能)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그의 실망이 그 극에 달하여, 이에 그에게 있어서 참된 겸손, 신뢰, 신종, 즉 신앙적 생애의 온아, 즉 은혜의 수동적 방면의 모든 미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自己)에 죽으라.

자기방면에 있어서 감퇴하라.

온유 신뢰의 성에 생장하라.

 

그리하면 안에서 살 수 있다.

영적 방면에 있어서 증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능동적 은혜의 은사를 입어 강건 활동의 성에 생장할 것이라고.

이것이 신앙적 생애의 비결이다. 커다란 역설이다.

 

죽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것이다. 쇠하라, 그리하면 흉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겸허의 용적을 넓게 하여, 다량으로 은혜의 주입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에 있어서 생장하라는 것이다.

노력에 있어서 생장하라. 재능에 있어서 생장하라,

 

지식에 있어서 생장하라는 것은 아니다.

 

신자는 먼저 제1로 은혜의 구역에 있어서 생장하라는 것이다.

먼저 자기를 하나님께 대하여 의로운 관계에 두고, 모든 선한 것을 자기에 구하지 않고서 그에게 앙청하며, 그리고 더욱 더 그 안에서 살면서 생장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의 생애는 은혜의 생애이다.

자기에 있어서 은혜를 받고자 하는 태도의 수양이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한 없이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성의의 표현이다.

 

은혜(grace)에 대한 온아(grace), 신앙적 생애는 이것으로 그쳐있는 것이다.

 

너희는, 은혜 안에서(있어서) 생장하라. 더욱 더 겸비하여, 더욱 더 높이 되어라. 더욱더 죽어, 더욱 더 살라,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로 되어 만물을 가진 자로 되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는 여러 가지 다양하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는 지식이다. 모든 지식이 하나님의 은사이다.

 

과학적 지식이라 해도 학자가 혼자 스스로 얻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주로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 즉 그에게서 나온 그에 관한 지식,

이것은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이다.

 

하나님께 명시되는 일없이 그리스도를 알 수는 없다.

그래서 그를 아는 것은 영생(한없는 생명-요한복음 17:3)이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에 관계된 지식에 있어서 생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얻기에 가장 어려운 지식이다.

신학교에서 배우고 신학박사에게 사사했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지식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은혜로서 하나님께로 부터 곧 신자에게 임하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가장 귀한 지식이다. 상인이 그 소유를 다 팔아 사려고 하는 한 알의 좋은 진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이 귀한 것을 주신다.

 

그 사람이 무학인데도 불구하고, 몸이 비천한데도 불구하고, 다만 그가 믿는 까닭에 은혜에 대한 온아의 태도로 나가는 까닭에, 성부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이 낮고 비천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영아(嬰兒)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진리를 행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생장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이를 것이다.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내촌감삼의 (19173성서지연구에서)

 

이상으로 베드로 전후서 공부를 마칩니다.(에덴골)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