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4일 목요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 제11-3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렌게쯔 스님의 명가에 있다.

 

주옥 같은 말을 줍고자 하여 달 밝은 가을 밤에 아까시의 해변을 따라 가서라고.

 

그리하여 가인은 말을 주우려 하고, 크리스천은 진리를 주우려 한다.

나는 매일 진리의 보고인 성서를 찾아(뒤적이며), 진리의 진주를 줍는 일은 누차이다.

자금 이것을 주워 모아 이것을 독자에게 나누어 드리려 한다.

어쩌면 나 날의 생애의 영적 반면으로 보아 좋으리라.

 

고린도전서 제11절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아 사도로 된 바울 부르심을 받아 성도로 된 자에게 글(편지)을 보낸다고 있다.

 

바울이 사도로 된 것도 부르심을 받아서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선한 성지에서 나온 것이다.

신자로 된 것도 전도사로 된 것도, 스스로 택하고, 스스로 연구하여, 사색의 결과로서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에게 어쩔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자랑할 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참된 신자, 참된 전도사는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명확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실험하지 못하는 자는 신자의 생애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같은 절에 이르기를 형제 소스데네라고,

소스데네의 일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817절을 볼 것이다.

 

(사도행전 1817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그가 신앙 때문에 유대인에게 매 맞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된 후는 바울의 형제로 된 것이다.

하지만 사해 모두 형제라고 하는 것 같은 막연한 의미에 있어서의 형제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 죽음의 모양 따라 그의 고난에 동참하여, 골육도 보통이 아닌 깊은 영의 형제로 된 것이다.

 

만약 교회가 교회라면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가정이다.

그리고 신자는 같은 주()에 의해 생겨난 형제자매이다.

 

소스데네는 바울의 동지도 아니었다. 또 단지 교우도 아니었다. 형제였다.

 

아아, 아름다웠던 초대의 교회여,

그때 교회는 가정이었고, 신자는 실로 형제자매 였던 것이다.

또 말한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어찌하여 특히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가? 세상의 회합에서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께 속한자이다.

세상의 이른바 단체는 아니다. 또 사교적 클럽 또한 아니다.

하나님께 거룩히 되어져 성도로서 조직된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러므로 매우 귀한 것이다.

 

그러한 교회에 대하여 바울은 말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심을 알지 못하는가. 만약 누구든지(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3:16-17)라고.

 

교회를 이 의미로 해석할 때 무교회 신자가 있을 리는 없다.

무교회주의는, 로마 천주교회, 영국 국교회, 누구나가 보아도 부패 타락한 미국 오늘의 제교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말한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바울 재세(在世) 당시에 있어서는 고린도 시는 부패 타락의 중심이었다.

마치 오늘의 빠리, 런던, 뉴욕, 도쿄 같은 것으로서 그 안에서 정의 청결이 행해지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 곳이었다.

당시 사람이 음락에 빠지는 것을 고린도한다 Korinthiazesthai’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린도에도 성도가 생겨나 하나님의 교회가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는 고린도에서 먼저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가지셨다. 그러매 실망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런던에 있다. 뉴욕에 있다. 도쿄에 있다. 하나님은 노방의 돌도 아브라함의 자녀로 할 수가 있다.

 

고린도 있어서 마저 하나님의 교회가 생겼다.

우리들은 도쿄, 요꼬하마, 나고야, 오사까, 고베 등 기타 부패의 소굴에 대하여 실망 할 것은 아니다.

 

또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져라고.

 

그리스도 신자를 일컬어 거룩해진 자라고 한다.

 

(사도행전 2032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행전 26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세상에서 성별되었다는 뜻이다. 그 죄에서 거룩해져 하나님의 소유로 된 자의 뜻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히 된 자를 가족으로서 가진 가정이다.

거룩해졌다고 한다. 문법상의 완료동사이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해진 자라는 뜻이다.

지금 거룩해 지고 있는 것 아니다. 또 뒤에 거룩해 지려는 것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해진 것이다.

 

신자의 성결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료 된 것이다.

그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이다.

 

내가 그들(제자들)을 위하여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요한복음17:19).

 

신자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거룩해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를 거룩히 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는 것이 아니다.

신앙으로서 구주의 성결을 자기 성결로 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께 세워져 우리들의 성결로 되신 분이시다.

 

(고린도전서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우리의 의와 성은 자기에게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에 있어서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결을 완료한 자 그것이 그리스도의 신자이다.

 

복음이 전하는 바는 도덕이 주창하는 바와 전혀 다르다.

도덕은 사람에게 완전한 실현을 요구하는데 대하여, 복음은 곧 완전을 제공해 준다.

 

이르기를,

 

다만 믿으라. 믿어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을 네 것으로 하라. 그가 이미 너 위해 자기를 거룩하게 하셨으매 너는 그를 우러러 보는 그 찰나, 그의 거룩하심 같이 자기를 거룩히 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윤리철학에서 보아 황당무계이다.

하지만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사실중의 최대사실이다.

또 말한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자로서 또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한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숭배한다는 뜻이다.

 

창세기 426, 요엘서 232절 등을 참조할 것이다.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요엘서 2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즉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서 숭배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 숭배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쓰이는 자이다. 그리스도 신성론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예수는 단지 나사렛 사람 예수는 아니다. 만물이 그에 의해 창조되고 그에 의해 유지된다고 하는 하나님이시다.(골로새서 1).

 

공맹 석기라고 칭하여 그리스도를 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꼽는 것은 아직 바울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이다.

 

우리들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되어 초대의 신자와 신앙을 함께 할 수가 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는 때 그(스데반)가 기도하여 말하기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사도행전 7:59)라고.

 

그리하여 스데반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음에 임했던 것이다.

3절에 이르기를 은총과 평강이라고.

 

행위에 과분한 보상, 이것을 은총이라고 한다.

내가 받기에 어울리지 않는(과분한)것을 받는다. 그것이 은총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은총을 인류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가 신앙에 의해 이 은총을 입을 수가 있다.

 

죄의 사유이다. 영생의 은사이다. 몸의 부활이다. 이것(입는 것) 모두 지대한 은총이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은총이 임하여 사람에게 평강이 있는 것이다. 평강은 은총의 결과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와 사람의 생각하는 바에 지나는 평안(평강), 너희 마음과 뜻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킬 것이다(빌립보서4:7)라는 대로이다.

 

참된 평안은 그리스도로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음으로서만 온다.

대저 이 은총이야말로 의에 기초한 은총이기 때문이다.

의의 요구가 완전하게 충족되지 않고서 참된 평안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 위한 제물로 삼으시고,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또한 스스로 의가 되신 것이다.

 

(로마서 3: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은총과 평강 신자의 안심입명은 선행이라든가 수양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 위해 자기 외아들을 버리시고, 사람은 신앙으로서 하나님의 이 절대의 은사를 받아, 여기서 완전한 마음의 평강이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절에 이르기를,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및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혜와 평강을 받으라.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사람이 줄 수 없는 은혜와 평강 이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 및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성부와 성자 한가지로 은총과 평강의 원천이시다. 이자가 어떻게 하여 한 분일 수 있는가.

그 오의는 해득할 수 없다 해도 동일한 은혜와 평강이 이자에게서 한분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또 그리스도 신성론의 측면관이 있다.

신자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하고(2),

또 은총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옴과 같이 주 예수에게서 온다고 한다.

 

이 예수는 사람이 아니시다. 하나님이시다. 경배해야 할 기도해야 할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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