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 화요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때는 약하고 또 두려워하고 또한 몹시 떨었다

  

인지(人知)와 신지(神知)

 

고린도 전서21-16

 

1)형제여 나는 전에 너희에게 간 때에도 말과 지혜의 뛰어난 것으로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지 않았다.

2) 그것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너희 중에 있을 때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기 때문이다.

3)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때는 약하고 또 두려워하고 또한 몹시 떨었다.

4) 내가 말한바 또 내가 전한 바를 사람의 지혜의 훌륭한 말을 쓰지 않고 다만 영(성령)과 능력(권능)의 증거를 썼다.

5) 그것은 너희의 신앙으로 하여금 사람의 지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 것이 되게 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6) 하지만 우리가 온전(성숙)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지혜를 말한다. 이것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다. 또 없어질 이 세상의 관원의 지혜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숨은 하나님의 비밀의 지혜이다. 7) 이는 세상의 창시 전부터 하나님께서 미리 우리로 하여금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해 정하신 것이다. 8) 이 세상의 관원(통치자)으로서 이것을 아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만약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9)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 위해 예비하신 것은 눈으로 아직 보지 못하고 귀로 아직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이 아직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있는 대로이다.

10) 하지만 하나님은 그 영(성령)으로서 이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영은 만사를 아시고 또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아시는 것이다.

11) 대저 사람일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이것을 알랴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 외에 있는 자 없다.

12) 우리가 받은 것은 이 세상의 영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영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바의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13) 또 우리가 이것을 말하는데 사람의 지혜의 가르치는 바의 말을 쓰지 않고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바의 말씀을 쓰는 것이다. 즉 영의 말로서 영의 일에 대하는 것이다.

14) 생래대로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신령한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그들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15) 그것은 영의 일은 영에 의해 분별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에 속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러나 자신은 사람에게 판단되는 일 없다.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주를 가르치는 자 있으랴.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복음은 사실이다. 미문이 아니다. 철학이 아니다.

이것은 즉 단순한 말로서만 전해야 할 것, 이에 문식을 가하여 복음은 복음이 되지 못하게 된다.

 

복음 그것이 미문이다. 철리이다. 금은 도금 할 것이 아니다.

복음은 이것을 싸는데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서 할 것 아니다(1).

 

복음의 정요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이다.

성서의 윤리 사상이 아니다. 그 교회조직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낳으신 독자를 주시는 데까지 세상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에게 십자가의 치욕을 받게 하시어 죄에 빠진 인류위해 구원의 도를 여신 것, 이는 복음의 진수이다.

 

십자가를 떠나서 그리스도교 없다.

 

가령 산상의 수훈은 제거된대도, 가령 사도 야고보의 격언은 소멸되는 일 있대도, 만약 예수와 그의 십자가의 역사적 사실이 있고 보면 그리스도교는 엄연하여 영구히 존속되고 사람은 그 구원을 구하기 위해 예수께로 올 것이다.

 

십자가상의 속죄 없는 그리스도교는 희망 없는 생명 없는 그리스도교이다.

옳다. 그러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아닌 것이다(2).

 

그는 나무 위에 달려 우리의 죄를 친히 자기 몸에 지시었다(베드로전서 2:24).

 

이는 흔히(세상에서) 말하는 이른 바 윤리적 그리스도교는 아니다.

그 중에 미신 같은 것이 있다고 하는 자도 있으리라. 하지만 실제적으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은 이 사실이다.

 

너희는(만민 모두)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이사야서 45:22)

 

그 과학적 설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해도, 우리들은 다만 십자가의 예수를 앙망함으로서 우리의 죄는 없어지고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거룩한 자로 됨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여 세상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코로 숨 쉬는 동안은 절규하려는 기쁜 소식이다(2).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때는 약하고 또 두려워하고, 또한 몹시 떨었다고 한다.

 

그는 성실 외곬의 유대인 많은 문학을 한 것 아니고 미술에 어둡고 정치에 어둡고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 전할 진리를 갖지 못한 채, 홀로 표연히 문화의 중심인 고린도에 이르렀다.

 

그도 역시 감정의 사람이매 혼자 그러한 사회에 들어가 고독 적막감에 잡혀 약해지고 또 두려워하며 또 심히 떨었으리라.

 

그는 물론 문학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그는 또 미술에 현혹되어서가 아니다. 그는 전혀 무학의 사람이 아니다. 아라타스의 시를 인증하여 아덴사람에게 말한 그는 또한 잘 미술 문학의 취미를 알았다.

 

(사도행전 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그런데 그는 지금 문학의 생각을 방기하고 세상의 철학을 분토에 비하며 다만 십자가의 복음으로 그의 몸을 무장하여 가지고 당신 문화의 성경에 들어간 것이며, 그에게도 역시 학자에게 있기 쉬운 공포심 생겨 때로는 두려워하고 떨었으리라.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그가 일층 세상의 지식과 교양에 의뢰치 않고서, (성령)과 능력의 증거만을 쓴 것은 오인 자신의 실험(경험)에 비추어 상상하기 어렵지가 않다.

 

그리스도 문학 등에는 조금의 취미도 갖지 않은 베드로, 요한 등은 바울의 이 공포를 듣고서 비겁한 행위로 여겼으리라. 하지만 무학의 사람은 학자의 약점과 유혹을 알지 못한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로마인에게 써 보낸 바울은, 고도의 교양을 받은 그리스도인 중에서 학자에게 있기 쉬운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3).

 

 

사람의 지혜의 훌륭한 말이란, 그리스인(헬라 사람)이 세계에 향하여 자랑하고 철리를 꾸미는데 수사의 술()로서 한 것이다.

 

그 이(이치) 현모하고 그 말이 미묘하다.

 

그들은 훌륭한 사상을 나타내 보이는데 훌륭한 말로서 하여 세상의 상찬을 얻으려 했다. 철인 아나크사고라스의 철리에 정치가 펠리클레스의 변을 가한 것 이것으로서 할 때, 그 누구인들 설복 할 수 없으랴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묘리를 깊이 했다. 그들은 글을 닦았다. 그러나 그들은 종내 세상을 도화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은 철학과 미문을 쓰지 않았다.

그는 단순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또는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그는 고철의 말을 인용치 않았다. 그는 완곡한 말을 고르지 않았다.

그의 문법에는 오류 많았으리라 그의 인증은 양성했으리라

하지만 그의 무골한 말에 영과 능의 증명있었다.

 

그의 언어에 의해 영혼은 구원되고 행위는 근본적으로 고쳐져, 눈으로 아직 보지 못하고 귀로 아직 듣지 못한 대변동은 그의 복음을 믿은 자 위에 나타났다.

 

영의 증명이란, 하나님의 영이 곧 사람의 영에 나타나 보여주신 바의 증명이다.

 

능의 증명이란 영의 활동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행동의 증명이다.

 

너희는 와서 보라(요한복음1:46)와서 논보다 증거를 보라. 구원된 영혼을 보라.

 

고쳐진 행동을 보라. 잠시 그 철리에 대하여 묻는 것을 그치라.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하여 행했는 가고 오늘 질문 받는다면, 십자가에 달리신바 하나님께 다시 살리신 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것을 행했다고 대답할 뿐(사도행전 4:9-10).

나는(바울) 복음을 전하는데 완곡한 말과 현묘의 철학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내 복음은 하나님의 진리로서 이것을 너희에게 추천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지혜와 기술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만약 나의 능변에 추복하여 내 복음을 믿을 것이면 너희의 신앙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믿을 만한 것 못된다.

 

너희가 만약 또 나의 해박한 학문을 존신하는 나머지 내 복음을 믿을 것이면 너희의 신앙은 사유감정의 신앙으로서 의지의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 역시 믿을만 하지 못하다.

 

나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믿게 하려 했다.

그러므로 나는 특히 애써 학문과 능변으로서 너희를 설복하려 하지 않았다.

 

내게 열심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하지만 내게 기술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있는 대로를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만약 나로 말미암아 믿을 수 있었다면 이는 나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이다. 하나님은 곧 너희의 영혼을 구원하셨다(5).

 

 

우리들, 그리스도를 믿는 자 중에 우리가 일컬어 지혜라고 할 것 없는 것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불신자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 아이(3:1)에게 향하여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온전한 자(성숙인)가운데서 말한다. 즉 십자가의 오의를 회득한자(온전한 자의 뜻) 가운데서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도 이것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다. 철학자의 철리가 아니다.

[없어지려는 이 세상의 관원](권자)이 보고서 지혜로 하는 것 아니다.

 

그리스인(헬라사람)은 우리에게 지혜 없다 해도 우리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지혜가 있다. 우리를 교묘한 기담을 믿는 자로 여기지 말라

우리가 세상의 학자의 지식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를 무식한 자로 업신여기지 말라고.

 

그리스 철학을 방기하고 복음의 사자로 된 바울은 그의 신철학에 대하여 일언의 변소 없을 수 없다(6).

 

 

우리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피타고라스의 우주관이 아니다. 플라톤(플라톤7191역주)의 인생관이 아니다.

 

하나님의 독자 그 자신이다. 하나님은 그로써 만물을 창조하시었다(에베소서 3:9).

 

만물은 그에게서 나와 그에 의존하고 그에게 돌아가는도다(로마서 11:36).

 

그에 의해 만물은 창조되었다. 그는 만물이 있기 전에 계셨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것이다(골로새서 1:16-17).

 

그는(하나님의 어린양은) 이르시기를

 

나는 알파이다. 오메가이다. 처음이다. 나중이다. 시작이다. 끝이다(묵시록 22:13).

 

너희는 믿지 않으리라. 하지만 나는 우주와 인생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설명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의 철학은 그리스도 중심설이다. 이 지혜란 철리란, 진리란, 이는

 

숨은 하나님의 비밀의 지혜이다. 그리고 이는 세상의 창시 전부터 하나님께서 미리 우리로 하여금 영광을 얻게 하시려고 정하신 바의 것이다.

 

이는 오늘까지 사람의 눈에 숨겨져 있었던 것 그리고 세상의 창시부터 하나님의 정하신 것으로서 지금 나사렛의 예수에 의해 인류에게 보인 것이다.

 

세상이 이것을 몰랐던 것은 하나님이 이때까지 이것을 보여주시지 않았음에 있다.

 

그리고 이는 사람의 지혜로서 알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철학이상 과학이상의 진리이다(7).

 

 

이 세상의 관원으로서 이것을 아는 자 한 사람도 없다.

 

카이제르도 빌라도도 헤롯도 또는 모두 정략과 권모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려하는 자 중에 예수를 만전의 지혜로서 깨달을 자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은 예수를 이용하는 일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위선적 숭배를 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도 그를 아는 일은 그들의 지모로서 한대도 침략으로서 한대도 결코 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릎 꿇고서 그를 경배하고 스스로 관을 벗고 왕의 보좌를 그에게 바치고 왕의 왕, 인류의 머리로서 그에게 쓰이리라.

 

하지만 가련한 맹목의 그들 관원은 권(권세)을 탐하는 나머지 만물의 주권을 장악하신 그를 알지 못한다. 도리어 그를 비천이 여기고 미복을 입고 문수를 입고 으쓱대는 사람을 섬기며 가시관을 쓰신 인류의 왕을 주로 경외치 않는 것이다.

 

언제나 가증스럽고 천시해야 할 가련히 여길 자는 그들 정치가이다(8).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 위해 예비하신 것은 눈으로 아직 보지 못하고 귀로 아직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이 아직 생각하지 못한 것 이사야 644절에서의 의역적 인증인 듯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의 사상 이외에 있다.

철학 아무리 심원하대도 하나님의 진리에 달할 수가 없다.

과학 아무리 정학하대도 하나님의 진리를 다 알길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묵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가 직관적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명시되는 것이다.

깊이 철학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해도 무익하다.

만권의 신학서를 섭렵한대도 구원의 오의를 해득할 수 없다.

 

너는 이것을 해득하고자 하는가?

가서 네 마음을 낮게 하여 겸비하여 하나님의 시명을 기도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은혜로 인하여 네게 이것을 알게 하실지도 모른다(9).

 

십자가의 진리! 기이한 진리! 더구나 심원하고 아름다운 즐거운 진리!

 

우리의 이성을 만족케 하고 우리의 감정을 깨끗이 하며 우리의 전성을 조화케 하는 진리는 이 십자가의 진리이다.

 

이는 세상의 학식이 일찍이 상상치 못한 진리, 더구나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에게는 누구에나 알게 되는 진리이다.

 

단순하고도 심원수정 같은 산호의 물 같은 것, 투명해도 그 심도는 측량할 길 없어라. 우리들은 하나님께 의지하여 조금 그 무엇인지를 알았다 해도 이것을 적당히 나타낼 말을 갖지 못한다(9).

 

 

이 심원하기 그지없는 진리를

 

하나님은 그 성령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대저 성령은 만사를 알고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아시기 때문이다. 대저 사람의 일은 그 가운데 있는(사람의) 영 외에 누가 이것을 알랴. 그처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 외에 이것을 아는 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고자 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야함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단순한 원리를 알지 못하고서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탐구하려하는 자의 어리석음이여

 

고등비평이라고 하여 언어학적으로 성서와 자구를 해부하여 그 중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려 하는 일 같은 것,

성서는 사람에 의해 기록된 글인 까닭에 사람의 지식으로서 해득치 못할 이 없다고 믿어 별과 암석과 식물과 동물을 연구하는 태도로서 이 글을 연구하려는 자 같은 것은 아직 성서 연구의 필요한 원칙조차 모르는 자이다.

 

성서는 영의 글이다. 그리고 영의 서를 배우는데 있어서는 먼저 무엇보다도 앞서 영의 감화를 요하는 것이다.

 

가령 만방의 언어 있대도, 가령 고금의 철학 있대도, 하나님의 영 없이는 성서의 1장도 해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평이한 상식이다.

하지만 이 상식에 따르지 않는 자가 세상에 적지 않음을 어찌하라(10-11).

 

 

바울은 중복하여 말한다.

 

우리가 받은 것은 이 세상의 영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영이다라고.

 

성령을 단지 정신이라든가 활기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들은 감정의 격동에 접한 것 아니다. 우리들은 실로 하나님의 성령에 접했다고 바울의 시대에 있어서도 지금의 시대에 있어서와 같이 성령을 천연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자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중복의 말을 발하여 그러한 오해를 배제하려고 했다(12).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바의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우리에게 예수를 주셨대도 만약 그 성령을 주어 우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어찌 예수가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 즉 구주)이심을 알 수 있으랴.

하나님은 사물을 주심과 동시에 또 사물의 설명도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셨대도 성령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또 그로 말미암아 구원될 수 없다(12)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말로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즉 성령이 가르쳐주는 바의 말씀으로서 했다고 성령의 일은 성령의 말씀으로서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스피레이션에 의해 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그치지 않고 이것을 전하는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

 

진리는 복음의 진수이고 성서는 그 형체이다(13).

 

 

생명과 육체는 서로 떠날 수 없는 것이듯, 진리는 이것을 나타내서 하는 말을 떠나서 알 수 없다.

 

진리는 말씀이다. 말씀은 진리이다. 성서 만약 하나님의 진리라면 그 문자는 하나님의 문자이다.

 

성서의 언어적 신성설이라는 것은 심리학상의 이 단순한 원리에 기초하는 것이다(13).

 

영의 말씀으로서의 영의 일을 안다. 영의 일을 전하는데 영의 말로서 한다.

 

즉 영의 일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 말하지 않고서 영으로 하여금 우리를 통하여 말하게 하는 것이다.

 

성공하는 전도사는 하나님의 화기로 되어야 한다.

바람이 소나무 가지 끝을 불어 송뢰의 악을 연주하듯, 영으로 하여금 임의로 내 전성을 불게 하여 내 몸에 천래의 미악을 연주케 할 것이다.

 

(요한복음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나는 배워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심 따라 그로 말씀하게 하신다(13).

 

생래의 사람은 영에 접해도 이것을 받지 않는다.

그는 다만 어리석다고 하여 이것을 배척할 뿐, 가령 또 이것을 받는 일 있대도 이것을 알지 못한다. 영의 일은 영에 의해서만 이것을 요득할 수 있다.

사람은 영에 의하지 않고서 예수를 주시라고 알아차릴 수 없다.

 

그가 예수로 말미암아(예수께 의지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역사()이다(14).

 

 

생래대로의 육의 사람은 영에 관한 것은 무엇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에 속한 자는 모든 것을 분별해 안다.

 

그는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오의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2, 자기에 대하여 분별해 아는 것이다.

3으로, 인생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4, 천연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영에 속한 자 만큼, 상식에 부한 자 없다. 그들은 많은 일에 관해서는 대철학자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학식은 사람을 미신에서 전혀 해탈케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신의 기반에서 전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함은 지혜의 시작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과학의 시작이다.

 

사람은 죄에서 구원되지 않고서는 천연에 이길 수가 없다.

천연에 이기지 못하면 이것을 고구하려는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신앙이 근세 과학의 시초라고 들을 때 많은 학자는 웃으리라.

 

하지만 구미 과학의 연원을 깊이 구명하는 자는 나의 이 말을 듣고서 이상히 여기지 않는 것이다(15).

 

 

영에 속한 자는 만사를 판별할 수 있대도 그 자신은 사람에게 판별되는 일 없다.

그는 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므로 한 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아니면 잘 그를 해득할 자 세상에 없다.

그의 마음속에 심원하고도 측량할 길 없는 것이 있다.

그는 철학자가 아니다. 하지만도 일종의 엄연한 철학을 가진다.

그는 도덕자가 아니다. 하지만 도덕 이상의 도덕을 가진다.

그를 불충의 신이라고 하여 욕하는 자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악인으로서 책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그의 형제는 그를 불효의 자식으로서 괴롭히는 일 있다.

하지만 그는 방탕아도 아니다. 또는 가명(家名)을 손상시키는 자도 아니다.

세인의 눈에는 아주 기이하게 보이나 그러나 의인과 선인과의 성을 갖춘 것은 그인 것이다.

 

세상이 아주 그를 싫어하는 것은 그를 해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유용한 사람으로서 세상은 그 없이 전진할 수 없다.

그를 사랑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버릴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가(요한복음8:53)는 유대인이 예수에게 물은 것인데

 

세인이 또 오늘 우리들 예수를 믿는 자에게 묻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된 자라고 대답해도 그들은 그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그때 우리들을 비하하여 말할 뿐 이 천하에 어리석은 사람아(15)라고.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주를 가르칠 자 있으랴고 옛 예언자는 말했다(이사야서40:13).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는 깊음이여 그 심판은 측량하기 어렵고 그 길은 알 길 없도다(로마서11:33).

 

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 측량할 길 없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다.

즉 전지에 가까운 지식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다.

 

즉 전지에 가까운 길이 보이나 지혜로운 자, 지식 없는 것 같이 보이면서 전지자의 마음을 가진 자이다.

 

인생의 우주의 비밀의 열쇠를 가진 자란 실로 그(신자)이다.

그는 종교가일 뿐 아니라 또 철학자이다. 시인이다.

 

그를 업신여기지 말라 그는 라이프니츠로 되어 나타났다. 칸트로 되어 세상에 나왔다.

 

우주를 마침내 완전하게 해석하는 자는 그가 아닐 수 없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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