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연구
1.바울의 신앙
고린도전서 연구의 발단(發端)
고린도전서 1장 1-3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개정개역)
바울의 신앙은 나(우리들)의 신앙이다. 나는 여기서 바울의 신앙을 설명(하기로) 한다.
고린도 전서 1장 1절에서 3절까지에, 뜻밖에도 바울의 신앙이 나타나 있다.
1절 : 하나님의 성지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아 사도로 된 바울 및 형제 소스데네(일본역)
바울은 사도였다. 그러나 스스로 자진하여 사도로 된 것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택하고, 스스로 애써, 이 성직에 임한 것 아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아 사도로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부르심이야 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성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어찌하여 크리스천이 되고 사도로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다만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지(聖志)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했음을 알았다.
사도 됨은 은혜의 극이다. 사람의 희구도 노력도, 그것으로서 이 은혜를 그 몸(인신)에 청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 내가 지금 이렇게 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미암는다 라고 그는 말했다.
측량할 길 없는 그의 성지에서 나온 귀하신 성소에 의해서만, 사람은 크리스천으로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정이라고 하고, 성소(聖召)라 하는 것, 낡은 신학설같이 들리지만도, 그러나 이것 또한 바울의 신앙이었음은, 그의 이 말에 의해서도 분명하다.
그는 벽두 제1로 이 말을 발하여, 그가 실험(체험)한 신앙적 대 사실을 개진했던 것이다.
형제 소스데네 - * 참조 (사도행전 18장 17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 글(편지)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보낸다(일본역)
하나님의 교회 - 하나님의 에클레시아(11권31역주참조), 에클레시아는 단지 회합이다.
또는 회중이다. 사회라고 하는 것 같은, 또한 촌회라고 하는 것 등, 모두 이것을 에클레시아라 칭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본래 교회로 역해야 할 말은 아니다. 단지회라고 역함이 당연하다.
하나님의 회이다.
정치를 논하고 사업을 영위하기 위한 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 구하고, 그를 섬기며, 그의 성업을 하기 위한 회이다.
사람의 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회이다. 그의 성의를 수행하고자 하는 자의 회합이다.
거룩한 사회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부분이다.
지금의 이른바 교회는 아니다. 단지 종교적 회합은 아니다. 사랑의 법칙을 실행하여, 지성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려 하여 이룩된 신자의 사회이다.
2절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
고린도는 당시의 왕성한 상업지였다. 상해라든가 요꼬하마 등지 같은 화물집산의 땅(고장)이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물질적이었다. 그 이상(理想)은 낮았다. 그 도덕은 문란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속담에 방일로 흐르는 것을 일컬어 [고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복음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학문의 땅인 아텐스(아테네)에서 한 사람의 신자를 얻지 못한 바울은, 상업지인 고린도에 있어서, 많은 유력한 형제를 얻은 것이다.
소스데네 같은 이, 그 한 사람이다. 기타, 그리스보 같은 이, 유스도 같은 이, 스데바노 같은 이, 가이오 같은 이, 시의 재무관 에라스도 같은 이, 모두가 소위 상류사회의 사람들이, 여기서 바울을 환영하고, 그의 복음을 믿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안다, 학문의 땅이, 좋은 전도지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에 반하여, 상업지가, 복음 파종의 전포로서 훨씬 유망하다는 것을.
구도자로서 가장 희망이 적은 것은 학생이다. 그들은 얼마 되지 않은 자기의 지식에 의뢰하여, 전신을 산 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치려 하지 않는다.
구도자로서 상인은 훨씬 학자 이상이다. 복음은 실물을 취급하는 상인에게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운 바 있다.
복음은 커다란 사실이다. 그러므로 먼저 첫째로 실험해야 할 것이고, 그런 다음에 학구 해야 할 것이다.
아덴(아테네)이 바울을 배척하고 고린도가 그를 받은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 - 속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회,
하나님은 지자를 부끄럽게 하시렴에서, 세상의 어리석은 자를 택하셨다고 있다.
하나님은 속인의 집합지인 고린도에 그의 성회를 일으켜, 아덴(아테네)과 그 대표하는 이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17-18장 참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지고, 부르심을 받아 성도로 된 자 - 하나님의 회의 회원은 이것이다.
거룩해진 자,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자이다. 그저 거룩해진 것이 아니다.
다만 도덕을 듣고서 거룩해진 자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자이다.
세상의 이른바 선인 또는 의인은, 하나님의 회의 회원 될 자격을 가지지 못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자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 안에서 이다.
그리스도의 감화에 접해서가 아니다. 그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 안에 있어서, 즉 그와 나와 일체로 되어, 나는 하나님의 회의 일원으로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회는 단지 예수의 제자의 회합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서로 모여 이룩된 몸이다.
회(會)로서 생체이다. 교권과 규칙을 가지고서 만들어 낸 제도는 아니다.
신자 각자가 그리스도와 합하는 데서, 절로 이룩된 사회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자만이, 잘 하나님의 회의 회원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거룩해진 - 도덕적으로 거룩해졌다고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근본의 의미는 성별(聖別)이다. 거룩해짐을 입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물로서 이 세상에서 견별되는 일이다.
신자는 하나님은 소유물로서 이 세상에서 견별된 자이다.
그러한 자가 드디어 도덕적으로 거룩해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성별은 전(前)이고 성결은 후(後)이다.
먼저 거룩해지고, 그런 후에 하나님의 소속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소속으로서 선정되고, 그런 후에 서서히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해진 자란 완전하게 된 자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도덕적 완성을 기다리는 일 없이, 그를 하나님의 회의 회원으로서 선정(選定)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구원의 오의가 있다. 이해하기에 어려운 바가 있다.
하지만 신자의 실험으로서 가장 명백한 사실이다.
▶부르심을 받아 성도로 된 자 - 부르심을 받아 사도로 되고, 부르심을 받아 성도로 된다.
부르심을 받아서이다.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다.
혼연(婚宴)에 초청되어 객으로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스로 객 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마태복음 22장).
▶성도 - 세상의 소위 [성인]은 아니다. 성덕을 갖추고, 세상의 모범으로서 사람에게 앙모되는 자는 아니다.
거룩해진 자라는 말과 한가지로, 하나님께 성별된 자라는 뜻이다.
택함 받은 자라는 말과 한가지이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의미에 있어서 신자는 모두 다 성도이다. 성 바울, 성 요한, 성 베드로에 한하지 않는다.
모든 신자는 성도이다. 거룩한 자는 아니다. 거룩한 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택함 받은 족속, 왕인 제사장, 거룩한 백성, 하나님께 속한 자 (베드로전서2:9)이다.
그러므로 마침내는 거룩해져 성자로 될 자격이 주어진 자이다. 신자는 스스로 성도라 칭하여 자고(自高)하는 자는 아니다.
그는 스스로 거룩케 할 수 없어, 하나님께 자기를 거룩케 해 주심을 입는다고 칭하여, 그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성도라는 말은 고만한 말이 아니라 겸손한 말이다.
신자는 주저하는 일 없이(담대히), 자기를 부르는데 이 말로서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 - 신자는 또 이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히브리어 어법으로서, 숭배의 뜻이다. 주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뜻이다.
창세기 4장26절에 이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더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또 동13장 4절에 거기서 아브라함,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있음도 같은 의미이다.
단을 쌓고 제물을 갖추고 여호와를 섬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있음은, 그를 하나님으로서 높이는(공경하는)자라는 뜻임은 분명하다.
그리스도 숭배는 미신이라는 자가 있다면 그것뿐이다. 하지만,
초대의 신자가 예수를 하나님으로서 공경한 것은, 바울의 이 말에 의해서도 확실하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자, 부르심을 입어 성도로 된 자, 더 나아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 즉 그를 하나님으로서 공경하는 자이다.
그리하여 바울 및 초대 신자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물론의 일이었다. 그들은 특별히 그리스도 신성론을 부르짖지 않았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그들은 하나님께 쓰이는 마음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쓰였던 것이다.
스데반은 죽음에 임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말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사도행전7:59)라고.
신약성서를 읽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서는, 우리들이 해득하기 어려운 것이 많이 있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 의미 깊은 칭호이다. 삼칭 서로 연결되어, 구주의 성격에 관한 신자의 신앙은 유루없이 그중에 표시되어 있다.
▶예수 - 역사적 인물이다. 요셉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태에서 나서, 본디오 빌라도의 때에,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이상의 사람, 유대인의 왕으로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이, 아브라함이 그날을 보기를 원한 것, 예언자가 대망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은 그의 제자가 부르짖은 바, 그리고 유대인이 오늘에 이르러도 거부해 마지않는 바이다.
예수는 예언자의 한 사람이라는것은, 유대인이라 해도 승락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는 것은, 그들이 열렬히 반대하는 바이다.
초대의 신자가 유대인의 극렬한 박해를 받은 까닭은 그들이 판연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창도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란, 신자가 유대인에 대하여 발한 신앙적 전쟁의 선고였다.
▶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칭호이다.
예수는 다윗의 후손인 요셉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그 구원자이신데 대하여,
주는 인류의 왕으로서 그 구주이시다.
예수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그리스도는 일국의 왕이시다. 주는 인류의 머리(으뜸)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러, 신자는 예수를 선민의 이상, 만민의 구주로서 아는 것이다.
역사적인 예수는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사람에게서 나서 사람같이 죽으셨다.
이상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이상으로서, 세계 만민의 빛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이신 주는 지금 계셔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세상의 빛이시다. 그러므로 말한다.
주는 영이시라(고린도후서3:17)고.
또 말한다.
이제는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후에도 계시는 전능하신 자(묵시록1:8)라고.
옛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있고, 영원 후까지 계시는 전능자이시다.
주는 부활하신 예수, 지금은 성부의 우편에 앉아. 세계 만민 위해 중보 하시며, 그들을 비추시고, 그들에게 참 생명을 주시며, 마침내 그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산 구주이시다.
바울은 그렇게 믿었다. 우리들 오늘의 신자도 그렇게 믿어야 할 것이다.
단지 역사적인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다. 또는 유대인의 이상을 우리들의 이상으로서 앙모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지금도 살아계셔서 사람 사이에 역사(일)하시는 영이신 그를 믿는 것이다.
▶살아계셔서 만민을 통치하시는 주 - 그는 이러하신 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빌립보서2:11)고 나타내 말하는 자이다.
우리들은, 불교도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르듯이(염불하듯), 무의미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 중에 있는 영원무량의 의의를 해득하여, 이것을 자기 신앙으로서 입으로 나타내 말해야 할 것이다.
신자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회의 회원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의 물음에 답하여, 사도 바울은 말한 것이다.
▶신자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자, 부르심을 받아 성도로 된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 즉 그(예수)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해 바치는 숭배를 바치는 자라고.
그러한 자가 모여 이룩된 것이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였다.
오늘의 그리스도 교회라는 것은 과연 그러한 것인가?
왈 도덕, 왈 자선, 왈 예수의 인격, 왈 인류의 진보라고.
오인은 깊이 성서를 연구하여,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회를, 오늘날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소위 그리스도 교회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는, 아무리해도 생각할 수가 없다.
2절 : 그들의 곳에서도 우리들의 곳에서도, 모든 곳에 있어서 -
▶모든 곳에 있어서란, 세계 만국, 복음이 전해진 모든 곳에 있어서라는 뜻이다.
바울 전도의 당시는, 신자라는 신자는, 세계 어느 곳에 있대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즉 예수를 살아계신 영이신 하나님이라 불러, 이를 공경했던 것이다.
오늘날 처럼 [예수숭배]를 조소하는 자 같은 것은 그 당시에 있어서는 신자로서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 - 우리들이란 말은 주께 관련된 말이지, 곳에 관련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개정영역성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역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각처(모든 곳)에서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까지 편지를 보낸다. 그는 그들의 주님으로서 또 우리들의 주님이시다라고.
즉 바울은 이 서간을 고린도의 신자에게만 보낸 것은 아니다. 동시에 또 만국의 신자에게 보낸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주라고 하여 예수를 독점하기를 두려워하여, 그는 그들의 주님으로서 또 우리들의 주. 라는 말을 더 써넣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는 만민의 구주시라는 신앙이 여기서 또 중복된 것이다.
부르는 자에게 까지라고 있음은, [부르는 자와 함께]로 역할 수가 있다.
그 경우에 있어서는, 바울은 세계 만국의 신자를 대표하여 이 서간을 고린도에 있는 신자에게 써 보낸 것이라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자 어떤 것으로 해석한대도, 전체의 의의에 있어서 틀리는 곳은 없다.
▶원하기는,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및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의 은혜와 평강, 너희에게 있기를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신자에게 과분한 은사이다.
평강은, 이 은사를 받는 결과로서 마음에 생기는 안심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에 대하여 신자의 마음에 평강생긴다.
사람의 모든 생각하는 바에 지나는 평강(빌4:7참조)이란 이 평강이다.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및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 은혜와 그 결과인 평강은, 아버지에게서 오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은혜의 원천으로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는 동체이시다.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것은 또 예수에게서 나온다고 한다. 동일한 은사를 급여하는 분으로서, 예수는 하나님의 지위에 서는 분이시다.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 하고, 또 주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은혜를 주신다고 한다. 그리하여 초대 신자의 예수 숭배는 의심할 바도 없다. 지금 사람이 그를 미신가라고 부르는 것은 임의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의 기록하는바 초대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예수 숭배위에 선 것임은, 공평한 연구자가 부정하려 해도 할 수 없는 바이다.
(예수 숭배) 바울의 그리스도교였다. 이것을 도외시하고, 그의 서간은 알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4회나, 세절 사이에 예수의 칭호가 형태를 바꾸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9절 끝까지에 9회, 거의 귀찮을 정도로까지 이 이름이 중복되어 있다.
특히 그 안에 5회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전칭호가 되풀이 되어 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다만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또 다시 그리스도 즉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이방인 및 세계 만민의 구주시라는 것은, 바울이 거듭하고, 거듭하고, 고조에 고조를 더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실로 바울의 신앙을 일언으로 축소시켜 말한다면 이 칭호로 귀결 되었던 것이다.
마치 호-넹의 신앙은 나미아부타불로서 다 되고, 니찌텡의 신앙은 나무묘호렝게꼬우에 귀결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예수의 신성을 주창하고, 동시에 또 그리스도의 인성을 주창한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은 이단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했다.
사람이,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
즉 하나님의 영은, 예수를 주, 즉 지금 살아계시는 편재의 주로서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신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 말과 상대하여, 사도 요한은 말했다.
▶ 무릇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되어 오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무릇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되어 오셨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즉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영이다라고.
즉 하나님의 영은, 예수가 주 곧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고 또 그는 사람이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동시에 또 예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함도 이교이다. 참된 신앙은, 예수는 하나님이시라 하고 또 사람이라고 한다. 예수는 신인(神人)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복음의 진수는 여기에 있다.
베드로가 예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16:16)고 한 때에, 복음의 기초는 놓여졌던 것이다.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는 이 신앙의 바위(반석)위에 세워졌던 것이다.
이것은, 알기에 어려운 오이이다. 하지만도 그리스도교는 드디어 이에 귀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 우리가 의거하여 구원받을 이름은, 천상천하 이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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