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금요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우리의 만사(萬事)이신 그리스도

[신앙의 단순]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 세워져 너희의 지혜 또는 의 또는 성 또는 속량이 되셨다(일본어역)(1:30).

 

*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한글개정개역)

 

신앙은 단순한(복잡하지 않음)을 필요로 한다. 단순하지 않으면 명료하지가 않다.

또 단순하지 않으면 열심이 될 수가 없다.

 

허다한 문제로 사유를 빼앗기고 허다한 교의로 주의가 나뉘어질 때, 신앙은 열심 되려 해도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완성하는데 있어서 본대도 또 타인을 구원하는 점에서 생각한대도 신앙의 단순은 먼저 구해야 할 일이다.

 

호넹에 의해 불교가 나무아미타불의 여섯 자로 간약된 때에, 일본에 있어서의 불교의 보편적 감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니찌렝도 또한 이것을 잘 알아 그의 신앙은 나무묘법연화경의 7자로 간추려 도화의 대공을 올렸던 것이다.

 

세상에 장황한 신앙같이 무능한 것은 없다.

한마디로서 내 신앙을 다 말할 수 있기에 이르기 까지는, 나는 내 심령()에 있어서 평안할 수가 없다. 또 밖으로 향하여 명료하게 내 신앙을 말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교의 신앙도 역시 이것을 단순하게 나타내 말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는 구령의 대세력이 될 수가 없다.

 

왈 그리스도교 철학, 왈 그리스도교 인생관, 왈 그리스도교 윤리, 왈 그리스도교 사회관이라고,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교는 마침내 언어로 되어 증발돼 버리고, 아무 남는 것도 갖지 못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오늘 무엇이 그리스도교인가 물을 때 간단하고 명료한 답을 얻는데 고심하는 것이다. 오늘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상거는 아주 먼 교리가 한가지로 그리스도교의 이름 아래 말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리스도교가 오늘같이 막연할 따름이라면, 그것은 마침내 적멸의 비운에 조우하기에 이름은 결코 먼 미래의 일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바짝 조릴 수는 없을까?

그리스도교는 호넹의 염불같이 이것을 근소한 문자로 단축할 수는 없을까?

다기다면이 언제까지나 그리스도교의 특성일 것일까?

 

우리들은 그렇게 믿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교에 그 정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교는 아주 단순한 종교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을 호넹의 불교같이 짧게, 옳다. 이것보다도 더 짧게 간추릴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초의 신자에게 신앙의 간단한 표명이 있었던 것이다.

 

요한 제1323절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 것 같은 것은 어쩌면 이같은 것이었다는 것이다.(웨스트 코드씨 주해서 120페이지 참조).

 

(요한 1323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들은 그리스어의 (물고기라는 뜻)로서 이 신앙을 나타내 말했다는 것이다.

 

후세에 이르러, 물고기가 교회의 표호가 되어 그 문현으로서 사용되기에 이른 것은 여기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즉 이오타는 예수의 첫 글자, 크이는 그리스도의 첫 자, 데타, 세타는 하나님의 읍실론과 식마는 아들의 약자이다.

 

그들은 그들 중에서 서로의 신앙을 표백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이크두스(익수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크두스,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초대의 신앙은 남김없이 이 간단한 한마디 가운데 단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20세기의 오늘이라 해도 그리스도 신자의 신앙은 초대의 그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연구의 방변은 증가되고 그 영분은 확장되었대도 신앙의 순정은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것이다.

 

오늘이라 해도 그리스도교는 무엇인가고 물을 것인가?

 

신자는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라고 대답하는 외에 간단하고 명료한 말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요득(了得)은 그리스도의 획득에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전하신 교훈은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다.

 

불교는 석가를 떠나서 있을 수 있으리라 유교는 공자를 떠나서도 세력 있는 그르침이리라

하지만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리스도교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존재를 부인하고 옳다.

그의 영구적 실재를 부정하고서 그리스도교는 없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철학이라고 하고, 그리스도교적 윤리라고 하고, 그리스도교적 수양이라고 하고,

그리스도교적 구원이라고 한다.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하면 이는 타교의 철학 또는 윤리 또는 수양에 대하여 비교적으로 말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그것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에 귀착하는 것이다.

심천 있는 것이 아니다. 광협 말할 것 못 된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안 자가 그리스도교를 안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그 사람이 대철학자이건, 대신학자이건, 그 사람은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너희의 지혜 또는 의 또는 성 또는 속(속량)이 되셨다, 말은 극히 간단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진의를 다 나타낸 말로서 이 보다도 명료하고 또 총괄적인 것은 없는 것이다.

 

칼빈(11302역주)이 일찍이 말한 일이 있다.

전성서를 통하여 고린도전서 제130절 같이 그리스도의 성업의 각 방면에 대하여 명료히 나타낸 말을 찾아내기 어렵다고, 실로 그대로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오늘 말하는 철학이다. 특히 인생철학 즉 인생관이다.

 

그리고 예수는 신자의 인생철학이라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달리 인생관 또는 인생철학은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이다.

 

예수 만약 인생을 설명치 않으신다면 인생을 설명하는 길 달리 없다고 신자는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 배우고 예수의 마음을 알고 신앙으로서 예수께 동화하여 우주와 인생을 그 중심에 있어서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신자의 철학이라고 하여 우리들은 수수께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신성의 충족은 모두 형체()을 이루어 그리스도에게 머물렀다(골로새서2:9)고 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그리고 또 그에게서 나온 우주와 인류에 대하여 알고자 할 때,

신성과 충족된 그리스도를 두고서는 달리 길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자의 철학이라고 하고 동시에 또 의라고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라고 함은 정의 또는 인도 또는 도덕이라고 함과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신자의 도덕이시라는 것이다.

일문하여 불가해의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사실은 말씀 그대로이다.

 

신자의 도덕은 그리스도를 두고서 달리 없는 것이다.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 일컬어질 것이다(예레미야23:6)라고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신자의 의라고 하시는 것이다.

신자의 의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개인적 관계에 있어서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훈계를 지킨다고 하여 단지 윤리학적으로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교훈을 실행하려 해도 사람은 이것을 실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요구하시는 심리의 정결은 노력 분투에 의해서는 도저히 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그리스도교적 윤리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의해서만

즉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의로서 받아서만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도는 공자를 떠나서 실행할 수가 있으리라.

하지만 그리스도의 도만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누구도 실행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 있어서는 실행이 먼저이고 신앙이 다음이다.

 

그렇지만 다만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실행이 뒤인 것이다.

이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거리껴(실족) 하는 주요한 이유이다.

하지만 사실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 자신 속에서 그의 의를 발견하고 이것을 획득하기에 이르기 까지는 신자는 신자로서의 의를 실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은 성성(聖性)이다. 거룩하게 되는 일이다. 거룩해짐을 입는 일이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히 하라(베드로전서1:15)고 있는 그 훈계를 몸에 실현하는 것이다.

 

신자의 품성의 완성이다. 하늘에 계시는 그의 아버지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해 지는 일이다.

이름에 있어서 뿐 아니라 또 실에 있어서도 성도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의 성성은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극기 분려에 의함이 아니라, 재계 목욕을 일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신자의 결재(마음과 몸을 깨끗하고 부정가까이 않음)이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참으로 그대로이다.

 

그리스도 신자에게 달리 청재의 예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는 또 수양이라고 하여 자신 수양위해 특별한 수단 방법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청재는 이미 행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시는 위광은 오른편에 앉으셨다(히브리서1:3)는 것이다.

 

내가 만약 사람에게 청정에 대한 것을 질문받을 것인가.

 

나는 내 결백으로서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내 하나님의 대전에 서서 내 완전이 요구되는 때, 나는 내 주께서 나를 대신하여 져주신 십자가를 가리키며 그의 거룩하신 요구에 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 의()이신 것같이 또 내 성()이신 것이다.

 

나는 자기를 의롭게 할 수 없듯이 또 자기를 거룩하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으로서 그리스도의 성을 내 성으로 하고자 할 때, 나는 서서히 그가 거룩하심 같이 거룩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의롭다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은 내게 있다는 것은 공겸한 말 같이 들리나 실은 신자의 성성의 비결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는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입고 또 하나님께 거룩해짐을 입는 것이다.

 

하나님의 충족(충만)하신 덕은 형체를 이루어 그리스도 안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자는 그의 성덕을 자기에 구하지 않고 이것을 성덕의 저장소라고 할 그리스도에 있어서 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실로 신자의 성이시다.

 

()은 속량(구속)되는 일로서 죄에서 석방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완전한 구원이다. 그러므로 의와 성과의 종국이다.

 

영광을 받는 일(영화롭게 되는 일)이다(로마서8:30).

 

신자에게 관계된 하나님의 성업의 완결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룩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실로 예수는 너희(신자)의 속(속량)이 되셨다고 하여 그것이 보다 적절하게 명시된 것이다.

 

신자의 최후의 완성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자를 대신하여 죄를 멸하신 동시에 또 그에 대신하여 영광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자의 대신하는 분이시다.

신자는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의 덕의 반여를 입고, 또 그 영광의 항유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예수는 신자의 속량(구속)이시라고.

예수 있어 신자의 구원은 확증된 것이다.

 

신자는 이제 최후의 영광을 대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이미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가 그의 완성, 그의 영광, 그의 귀존 이시다.

그는 지금도 죄로 고생하지만 예수 안에서 이미 완전히 죄에서 속량된 자이다.

예수는 하나님께 세워져 너희의 지혜(철학) 또는 의, 또는 성, 또는 속(속량)으로 되셨다고 한다.

 

깊도다. 이 말씀이야 말로 신자의 실현과 특권을 나타낸 말로서 이에 지나는 심원한 것은 없다.

 

이 말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교를 아는 사람인 것이다.

지는 덕도 망도 모두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가지기에 이르러, 사람은 지상에 있어서의 행복의 정상에 달한 것이다.

 

일찌기 영국 성공회의 선교사 한 사람이 우리 한 사람에게 말한 일이 있다.

 

너희 일본인이 아무리 한대도 도저히 그리스도교를 해득할 수는 없다.

일본인은 그리스도교를 받은 지 이에 불과 50년을 지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영국인은 이것을 받은지 이미 천수백년, 따라서 그 연구도 절로 깊은 데가 있다. 너희 일본인은 아직 당분간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우리 영국인에게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인의 자존심을 나타낸 것으로 실로 적절한 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만약 학문의 일이고 제도의 일이고 연구의 일이라면 이 선교사의 말은 유순으로서 복응(服膺,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리스도교를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학구의 일은 아니라고 우리들은 굳게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신앙의 일이다.

옳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데 옥스포드 또는 케임브리지에 배움의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는 요크, 또는 켄터베리의 대승정에게서 이것을 물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께 세워져 너희의 지혜(신학) 또는 의, 또는 성(성결), 또는 속(속량)이 되셨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신자의 신학은 예수이다. 그의 윤리는 예수이다. 그의 청재는 예수이다. 그의 완성은 예수이다. 예수이다. 옳다. 예수이다.

 

교회는 아니다. 감독은 아니다. 장로는 아니다. 또 그들의 창도하는 신학 또는 교의는 아니다.

 

예수를 믿어 우리 일본인도 또 오늘 곧 그리스도교의 오의에 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50년으로 충분하다. 옳다. 일 년으로 충분하다. 옳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일순간으로 충분하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이사야45:22 한글역 참조)고 주는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구원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오의에 철저하기 위해서는 영국인에게 배울 필요는 더욱 없는 것이다.

 

우리는 외국 선교사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 곧 하나님께 이르고 그의 완전한 구원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가 아니고 신학이 아닌 것은 물론의 일, 윤리가 아니고 또 수양도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인 그 누구에 있어서가 아닌 것이다.

 

사람이 직접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 안에서 만사를 발견하기 까지는 그 사람은 이 가르침을 안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통하여 그 자신(예수)에게 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원만하게 이 가르침을 해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예수께로 가라. 예수께로 가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