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8일 토요일

제5장은, 또한 여러 가지 설이 있는 곳이다(내촌감삼)

 다니엘서 5장 주석

 

 

5장은,

또한 여러 가지 설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재되어 있는 대체의 것에 대해서는 별로 어려운 것은 없다.

뿐만 아니라,

성서의 붓은 그 일장(a place)의 광경을 활화처럼

우리의 눈앞에 그러내 주어,

일종의 황막(desolateness), 근엄(solemnity)의 감정으로서 다가온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손이다.

그는 선왕의 여위(superflous dignity)에 의해 교사를 다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낭자(disorder)는 극에 달하여,

하나님의 그릇(성물)을 불결한 연석(宴席)에서 더럽히기에 이르렀다.

바벨론 왕국의 멸망은,

목첩(close at hand)에 다가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때의 건축의 양식(풍습)으로서,

벽에는 짐승이라든가 사람의 상(figure)을 새기고,

특히 왕실 등에 있어서는, 그 조선(祖先)의 위업의 자취를 조각했다.

 

즉 벨사살이 일천인의 대신을 불러 대주연을 편 대회관 벽에는,

느부갓네살의,

각지에서의 전승 광경이 자랑스럽게 새겨져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탁상의 옥산이 이미 무너져 술 내음새가 연기처럼 감돌고 있는 때,

사람의 손끝이 나타나,

이상한 문자를 쓴 것은,

즉 이 득의(triumph)의 벽면이었으리라.

 

무슨 변고이랴!

그처럼 교만한 벨사살도 곧 안색을 잃고,

다리 뼈마디는 풀려,

무릎을 가누지 못하고서 전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그 손은 무엇이었던가?

참으로 나타났던 것일까?

(the eye)의 이상이었을까?

 

이것은 오인이 여기서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 설명은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의 한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오인에게 있어서 가장 엄숙한 문제이다.

이는 환영(착각)이 아니라, 사실이다.

 

또 문자에 대한 해명도

꼭 다니엘이 말한 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히브리(435역주)의 문자는,

자음만을 늘어놓는 것으로서,

이 벽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되는 열두 문자도,

모음의 붙이기에 따라서 삼백정도의 읽는 법이 있다.

 

그러나 예언은 지혜가 아니라, 확신인 까닭에,

예언자는 문자, 그것을 읽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포만불경의 벨사살에게 내리실

당연한 성지를 말했음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

 

이렇게 해석할 때,

오인은 기사 그것의 괴기에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갈대아 왕통을 그 교만의 시초에 있어서 경계한 때,

그 통회, 겸비에 있어서 다시 이를 사하셨다.

 

그러나 대를 경과하기 불과 일대,

이미 이 대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오사(haughtiness and extravagance)를 극하기에 미쳐,

최후의 판정은 당장에 주어졌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셈되었도다 셈되었도다.

계랑되었도다, 계량되었도다, 나뉘었도다

 

두렵도다.

 

벨사살은

이 독죄(profanity)의 밤에 살해되고 말았다.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바벨론왕국의 멸망에는 여러 가지 원인도 있으리라.

 

그러나 말이 있다.

교만은 멸망에 앞선다고.

 

이 진리는 거부될 수 없는 것이다.

 

*내촌감삼(內村鑑三)의 글을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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