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4일 금요일

신앙은 박해에 이기는 것일까?

  

신앙은 박해에 이기는 것일까?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져졌으나,

불타지(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니엘 자신은,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조금의 해도 받지 않았다.

 

신앙은 박해에 이기는 것일까.

이는 실로 비상한 힘이 아닌가?

 

다니엘이 받은 박해는,

한마디로 진지한 크리스천이 종종 받는(당하는) 박해의 모식(example)이다.

 

악사(惡事)를 안 한다.

하지만 증오된다.

아무 허물(잘못 a fault)도 없다.

하지만 미움 받는다.

 

세상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제거하려한다.

왠지 모르게 싫어하는바 되는 것이다.

장해(ovstacle)인 것이다.

 

실로 매서운 눈초리(우노메 다까노메)로 그 흠점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 책잡을 불의도 과실도 없다.

거기서, 하는 수 없이 억지(무리무체) 구실(口實)을 가져다 댄다.

특히 기도 같은 것이 가장 많이 이 구실감으로 되는 것이다.

 

다리오스(다레이오스)도 또한 무리한 금령을 냈다.

다니엘은 이것을 알고 있다.

 

이에 거역하면,

체포되어 사자굴에 던져지는 것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주위에는 많은 무서운 눈이 노리고 있음도 알고 있다.

 

그는 이때 어떻게 했던가?

 

어떤 사람은 말하리라.

당초에 기도는 마음의 일이지, 형식은 아니다.

구태여 그런 경우, 무리하게 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심중에서 은밀히 기도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사회와 일치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유지하는 법(비결)으로서,

가장 온건한,

현명한 태도라고.

 

이 논자로 말하게 한다면 다니엘은 어리석은 자였다.

 

그러나 보라.

 

신변에 다가오는 박해에는 아랑곳없이,

고요히 저물어가는 저녁 창가에 무릎 꿇고서,

홀로 기도에 잠겨있는 사람의 모습을,

누가 이에 대하여 숭고한 느낌을 일으키지 않을 자 있으랴!

 

지금,

그의 마음에는 금령도 없다.

사자굴도 없다.

자기도 없다.

 

멀리 가물거리는 예루살렘 쪽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누를 길 없이 가슴에 용솟음쳐,

무릎은 절로 굽혀지고,

머리(고개)는 절로 숙여지는 것이다.

 

아아 귀하도다.

신앙의 어리석음,

 

그가 목전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거동은,

의지(pride)가 아니다.

물론 기공(mystery)도 아니다.

다만 그 고귀한 신앙의 어리석음에 의한 것이다.

사자굴에 있어서의 다니엘은,

풀무불 가운데 있어서의 사드락 등과 마찬가지의 교훈을 준다.

 

이는 필결 다니엘서가 주는 가장 힘 있는 교훈인 것으로서,

고래(古來)로 신앙상의 용사로서,

이 기사에 격려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오인은 일층 세심한 주의로써 이것을 배웠으면 한다.

 

 

첫째로 생각해야할 것은,

그들이 대 시련에 임한 때의 태도이다.

 

그들이라고 하여,

목전의 재액에 전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신앙이 아무리 강하대도,

그 신체가 돌이 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희랍) 신화에 있는 아히루스(아킬레우스)처럼,

그 몸에는 화살도 박하지 못한다는 보증을 받고 있는 것 아니다.

 

하지만 침착(태연)하여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어찌해서였을까?

 

불타지 않는다든가,

이빨에 물리지 않는다든가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 아니다.

불탄대도,

물린대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만 말로 하는 때면, 약간 궤변같이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실험상(체험상)의 기초하여 있다는 사실인 것으로서,

많은 크리스천의 용기는 항상 이에 기초하여 있는 것이다.

 

박해는 큰 파도처럼 우리 앞에 몰려온다.

그 위세는 우리로 하여금 위축케 한다.

그러나 오인은 오인의 신앙에 있어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다.

 

파도에 휩쓸려 버릴지도 모른다.

혹은 파도가 물러갈지도 모른다.

이때 겁낼 것이 없이 나아가라.

파도는 반드시 물러갈 것이라는 확신이 주어지는 자는 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쳐도,

구해도,

하나님은 이 확신을 주시지 않은 일이 있다.

 

하지만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 그 파도를 물리치실지, 아니 하실 지는,

우리의 단행 후가 아니면 모르는 것이다.

 

언제나 일의 결과에 대하여 보증을 구하여 마지않는 것은,

약자의 소리인 것으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확신의 결행력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사드락은 말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새우신 금 신상에게도 절도 아니 할 줄을 아니옵소서'(3:18참조)라고.

 

실로 느부갓네살이 감탄하여 말한대로,

 

'그들은, 자기의 신외에는 어떤 신도 섬기지 않고,

왕의 명도 아랑곳없이 자기의 몸도 버렸다'(3:28 일역) 고 했던 것이다.

 

이 단행의 용기가 있으므로서, 불도 피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면 그 용기로서 단행한 결과는 어떠했던가?

 

3장에 말하고 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어,

자기를 의뢰하는 종들을 구원하셨도다'(3:28 한글개역 및 일역 참조).

 

6장에는 이르기를,

 

'나의 하나님이 그 사자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는 나를 해치지 못했도다'(6:22 한글개역 및 일역 참조).

 

오인은 앞에서,

재액도 또한 단행의 용기 앞에서는 피한다고 했다.

하지만 물론 이것은 당연히 그런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는 오로지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의뢰함이로라'로써,

 

오인은 이에 이르러 하나님을 찬송하는 길 외에,

설명도 까닭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해를 받지 않을 뿐이다.

곤액불행 중에서, 다만 혼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때,

예측도 못한, 4자의 모습,

하나님의 아들같이 능력 있는 자가,

오인의 곁에 함께 있어 주시는 것이다.

 

자신은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찬성하여 주는 자가 없다.

 

아아,

나 홀로 이 비경을 견디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가고 생각하는 때,

실로 심중에 적막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오인을 격려하는 것 치고,

하나님은 우리의 간난 중에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서 주신다는

신념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있으랴!

 

 

셋째로 배우는 것은,

그러한 용기 있는 단행의 효과 영향이다.

 

먼저 그 본인이 받는 효과는 말할 것도 없다.

일의 대소를 물을 것 없이,

자신이 이 승리의 실험(체험)을 가지지 못하는 자는,

아직 참으로 능력 있는 신앙의 자각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서,

이 실험(체험)위에 입각하는 확신만이,

비로소 부동불후의 생명력으로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주위의 사람에게 주는 영향은 또한 위대한 것이다.

 

이는 실로 실행으로써 하는 전도인 것으로,

이만큼 사람을 감동케 하는 것은 없다.

 

보라, 저 대단한 느부갓네살도 깊이 감탄하여,

마음에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았던가.

 

전에는, 기도를 금한 다리오스도,

스스로 영을 발하여,

다니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명하지 않았던가!

 

산 참된 능력은, 능력() 그것만으로 만 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인은 이 능력()을 생애에 배움과 함께,

오인도 또한 어떻게 하여 이 능력() 있는 믿음을

얻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가르쳐 말씀하셨다.

 

이런 유는, 기도가 아니면 되는 일 없다’(마태복음 17:21 일역).

 

 

*내촌감삼의 (19061성서지연구’)에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