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31일 금요일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의 부활론

 

고린도전서 15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사람이 죽는다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기 14:14한글 개역)

 

이는 천고에 걸쳐서 풀지 못한 인생의 의문이다.

 

하지만 우주의 합리적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는 또한 사후의 생명도 믿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모든 고귀한 생애를 보내는 자는 스스로 이 생명을 실험하는 것이다. 또 세상에 그러한 생애로서 사후의 생명의 증명을 제공한 사람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이상의 의문에 대하여,

옳다. 사람이 죽는다면 또 살 것이다. 라는 것은 고래 인류 다수의 신앙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살 것인가?

이에 대한 보통의 해답은 이른바 소위 영혼의 불멸이다.

(), 영혼이 육체 가운데 있음은 마치 새가 조롱 속에 있음 같고, 귀인이 뇌옥 속에 있음 같다.

 

이것을 벗어나 비로소 자유의 천지에 소요할 수가 있다고.

그리고 이렇게 영혼의 불멸인 까닭은 그 성질이 가장 단순한데 있다.

모든 단순한 것은 괴멸되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말해지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종종 그리스도교의 강단에서도 또한 이것을 듣는 것이다.

하지만 먼저 명백히 해야 할 것은 이른 바 영혼 불멸론이 결코 성서의 가르치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는 사후의 생명 여하의 물음에 대답하는데 결코 영혼의 불멸로서 하지 않는다.

 

소위 영혼 불멸은 그리스 철학에서 나온 사상이다. 그 연원은 주로 플라톤(7191)이 엮은 소크라테스(170)의 말에 있다. 그리고 중고시대에 그리스도교 신학이 플라톤 철학과 서로 포옹하기에 이르러 이 교사상은 차츰 그리스도 교회에 수입된 것이다.

 

재차 묻는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랴?

 

성서는 명백하게 대답하여 말한다. 옳다. 육체의 부활에 의해 살 것이다. 라고.

 

그리스도교의 사후 생명은 영혼의 불멸이 아니다. 육체의 부활이다. 영혼은 물론 불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부활은 영혼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르신다. 그리스도 죽어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

 

만약 영혼이라면 어찌하여 장사된다 고 할 필요 있으랴?

또 어찌 사흘을 기다려 다시 살아나심의 필요 있으랴?

 

그 의미하는 바 육체의 부활에 있음은 문자의 해석상에서 이미 명백하다.

가령 이것을 믿기는 어렵다 해도 성서가 육체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사실은 이것을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육체의 부활을 해득하기 위해서는 성서 심리학을 알 필요가 있다.

 

성서는 사람을 어떠한 것으로서 보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신자에게 편지를 써 보내어 그들이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모든 점에 있어서 흠이 없기를 기도하여 말했다.

 

원하옵기는 평안의 하나님, 너희의 전령, 전생, 전신을 지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때에 흠 잡히게 되지 않기를(데살로니가전서5:23)이라고.

 

개정역에는 너희의 영과 마음과 몸을 완전히 지켜. 이다.

 

영과 마음과 몸이다. 사람의 생명은 이 3분성으로 이룩되었다고 한다.

 

즉 영적 생명이 있다. 심적 생명이 있다. 또 체적 또는 육체적 생명이 있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영적 생명이다.

사상, 감정 또는 수리의 관념 등은 심적 생명이다.

음식 수면 또는 한서, 동양의 감각 등은 체적생명이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이 삼정족 위에 서는 것이다.

그 하나 없으면 생명은 망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영, 마음 또 몸이다. 삼자 결합하여 여기에 원만한 생명이 있다.

 

그런데 죄의 결과, 죽음은 와서 사람의 체적 생명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완전한 구원은 반드시 몸에까지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영과 마음과 몸과 삼자 모두 구원되어 비로소 인류의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것 같이 몸은 망하고 영만 불멸한대도 그것으로서 완전하기에는 족하지 못하다.

 

그리스도 다시 와서 체적 생명을 부활케 하시고 영원한 영과 마음에 합쳐서 불후의 몸을 부여하심으로서 비로소 사후의 생명은 완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근대인은 이것을 듣고 미신이라고 하리라.

 

하지만 생각해 보라. 미래의 날에 있어서 우리가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 또는 모든 귀한 사람들과 영 또는 마음에 있어서 서로 접촉하는 것은 물론이라 해도 그것 만으로서는 과연 족할 것이랴?

 

누가 자식을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렴에서 당신의 아들의 영혼은 망하지 않았오. 하는 말로서 그 눈물을 모두 씻게 할 수 있으랴?

 

하지만 그는 다시 죽지 않을 몸으로서 당신의 면전에 설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재회의 날이 있다. 고 할 때, 비로소 그녀의 마음에 깊은 위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육체의 부활 없이 사랑의 요구는 종내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성서는 답하여 말한다.

옳다. 육체의 부활에 의해 살 것이다. 라고.

 

그리고 성서는 이것을 증명하는데 이론으로서 하지 않는다.

사후 생명 문제에 대한 성서의 해결은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기 한 가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을 제공하여 영원한 생명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죽음을 멸하시고, 복음으로서,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밝히하셨다(디모데후서1:10)고 있는 대로,

 

눈으로서 보고, 손으로서 만질 수 있는 사실로서 이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교의(敎義) 있어서의 내세 문제는 내세관이 아니라 사실이다. 역사이다.

사후의 생명을 증명할 만한 사실은 무엇인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죽어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그리고 모두 그를 믿는 자는 그분같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그의 부활이 신자의 부활의 증거이다. 그의 영광의 몸이 신자에게 주어질 불후의 몸의 모형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사후 생명의 존재는 이 한 가지 사실 위에서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허위일 것인가?

그리스도교는 그 근저에서 전복되지 않을 수 없다.

 

성서에 실려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열두 가지 경우가 있다.

그 중, 혹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것 혹은 믿기에 어려운 것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것을 종합하여 볼 때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 없었다는 것은 무계의 말이다.

냉정한 학자는 역사적 고증의 입장에서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영국의 학자 스위트 같은 분은 그 저서 <수난 후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현현> 중에서 말하기를, 일은 지금부터 1900년 전에 속하는 까닭에 일견 모순에 유사하는 듯해도 대체에 있어서 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할 수 없다. , 성서는 이 역사적 사실로서 사후의 생명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부활론도 또한 그리스도 부활의 사실로서 그 근거로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이것을 일독하여 그 중에 난해의 절이 적지 않다.

필경 바울의 사상이 너무나 풍부하여 이것을 토로하는데 있어서 그는 종종 언어의 부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 가장 좋은 실례는 에베소 제1장이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기 시작하자 은혜에서 은혜에로 나아가 정지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하나의 동사 없이 전문을 끝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도 또한 다소의 언어의 부족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스스로 이것을 보충하여 읽지 않으면 안 된다.

 

형제여 전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이제 다시 너희에게 고한다.(1)

 

바울이 그 말을 새로이 고쳐 형제여 하고 부를 때는 언제나 그가 특별히 진지한 태도를 취하는 때이다. 중요한 문제에 들어가렴에 있어서 특히 주의를 환기하는 말이다.

 

고한다는 말은, [알려 알게 한다] 또는 [생각나게 한다] 또는 [다시 설명할 것이다]등의 뜻을 가진다.

 

그 어느 것인지를 정할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한 가지는 명백하다.

즉 바울은 여기서 중대 문제로서 전에 전한 복음을 되풀이 하고자 하는 것이다.

알 것이다. 부활은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근본 문제였음을

 

이것은 너희가 받은 바 이에 의해 선 바이다.(1)

정확히는 이에 의해 서서 오늘에 이른 바이다. 라고 읽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육체의 부활을 믿고 이에 의해 지금 크리스천으로서 선 것이라는 뜻이다.

 

너희가 만약 내가 전한 말씀을 굳게 지키고 아무렇게나 믿는 일 없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2)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또는 구원되고 있는 바의 것이다. 라고 읽어야 할 것이다.

 

구원은 단지 과거의 것이 아니다. 또 단지 미래의 것이 아니다.

날마다 신자의 마음 가운데 행해지고 있음을 보인다.

 

지금 바울에게 다소의 우려가 있었다.

그것은 고린도 신자 중 육체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했다.

 

너희가 만약 내가 전한 말을 의미 그대로 믿으면 구원될 것이다. 라고.

 

전에 그는 고린도 신자에게 부활의 일을 전함에 있어서 그는 그 말에 애매함이 없도록 명백하게 이것을 육체의 부활로서 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가 전한 말 그대로의 의미에 있어서 믿지 않고서 영적 부활 등의 뜻으로 해석하는 자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에 이르러 바울은 또 하나의 의문을 가지고서 말한 것이다.

 

너희는 아무렇게나 믿은 것 아닌가? .

 

아무렇게나 [깊이 알아보는 일 없이]의 뜻이다.

 

육체의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근본 문제임을 깊이 알아보지 않고서 그리스도교를 믿었기 때문에 너희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로 오늘의 크리스천의 다수도 또한 깊이 알아보지 않고서 믿은 자이다.

그들은 천박한 이유에 의해 쉽게 침례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부활이 구원의 근본 문제라는 것 등은 조금도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도 또한 아무렇게나 믿는 일이 없으면 이에 의해 구원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내가 받은 바의 것으로서 그 제일은 곧 성서에 따라 그리스도 우리의 죄 위해 죽으시고 또 성서에 따라 묻히시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시었다.(3-4).

 

그 모두에 [실로](참으로)를 넣어 읽을 것이다.

내가 받은 바의 것 즉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 그리스도 및 그 직제자들에게서 받은 바의 것이라고 한다.

 

이같이 바울이 그리스도교의 근본사상으로서 제출한 것은 이 두 가지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 즉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부활하셨다는 것.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다. 이것 없이 그리스도교는 없는 것이다.

도덕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육체의 부활,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근저이다. 크리스천이란 즉 이것을 믿는 자이다.

 

그리고 바울 기타 초대의 신자들은 이것을 믿고 이에 의해 구원되었던 것이다.

이에 의해 그들은 그 마음에 깊은 평안을 얻은 것이다.

 

모르지만 제군이 믿는 그리스도교는 과연 이 같은 것인가?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모두 성서에 맞는 바라고 한다. 즉 구약 성서에 명시하는 바라고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진리의 표준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는 도리에 따라 라고 하지 않고 다만 성서에 따라(성서의 기록에 맞는 바)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에 의해 전하신 성서의 말씀을 가지고서 그는 자기의 신앙의 기초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구약 성서중 이것에 관한 중요한 예언은 이사야서 53, 시편 제16, 요나서, 호세아서 6장 제 2절 등이다.

 

게바에 나타나 보이시고 후에 십이 제자에게 나타나 보이셨다. 이렇게 나타나 보이신 후 오백의 형제가 함께 있을 때 또 이에 나타나 보이셨다. 그 형제 중 거의는 지금도 세상에 있다. 그러나 이미 잠든 자도 있다.(5-6).

 

이하 그는 그리스도 부활의 실증을 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그 셋을 세어 말했다.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실험이다. 이는 십이제자의 실험이다. 삼은 오백인 이상의 제자의 실험이다.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바울이 이 글을 쓴 것은 기원 후 53년 내지 56년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로부터 23년 내지 26년의 뒤였다고 한다.

 

만약 내가 여기서 20여년 전의 경험을 말하여 그것이 특히 중대한 것이므로

이것의 증인으로서 나의 친구, 12인을 들어 말하고 다시 500인 이상의 사람 동시에 이것을 실험했다고 하고,

또 그 다수는 지금도 생존하는 까닭에 가서 그들에게 들어보고 확인하라고 하면 역사적 사실의 증명으로서는 아주 강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야고보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또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최후에 달이 차지 못해 난 자 같은 내게도 나타내 보이셨다. (7-8)

 

2회의 실증으로서 바울은 또 세 가지 경우를 들어 말했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는 실로 그 자신의 실험이다.

 

당시 고린도에 있어서의 신자로서 바울은 육체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까닭에 그를 사도로 부를 수 없다고 하는 자 있음에 대하여 그는 자신이 부활의 그리스도를 본 사실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다메섹에 이르는 도중(道中)에 있어서의 그의 실험이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본 실험에 대하여 항상 제출되는 비평은 소위 환영설(幻影設)이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까닭에 그들은 그 환영을 보았으리라는 것이다.

 

마치 천주교에 있어서의 성녀 마리아 테레지아(7212역주).

그리스도의 찔림 받은 심장을 보기까지는 죽지 않으련다고 맹세하고 재개 목욕을 계속하기 다년, 마침내 이것을 보고 경배했다는 유()라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실증으로서 성서에 열거된 것은? 1, 2의 경우만은 아니다.

 

당시 교회의 주석이었던 베드로, 또 냉정하면서 가장 상식에 부했던 실제가 야고보 등이 단독으로 이를 보았을 뿐 아니라. 때로는 12, 때로는 500인 이상의 사람이 동시에 이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해도 환영(幻影)으로서 설명해 버릴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성서 중 그리스도 현현의 경우는 12에 이르지만 바울은 그 중 6을 들어 말할 뿐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들은 그의 두뇌가 아주 심대한 것을 안다.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끌어 낸 인물 중에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보지 못한다.

그는 세계에 호소하여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가장 신뢰할 만한 경우만을 들어 말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리기에 족하지 못한 자로서 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같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이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다. 나는 모든 사도보다도 많이 수고했다. 이는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9-10).

 

바울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12사도와 함께 자신을 들어 말하는데 있어서 곧 하나의 문제에 봉착했다.

그는 스스로 사도라 불리기에 족하지 못한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것이다.

(달이 차지 못한 자 , 그 시대의 통용어로서 쓸모없는 자를 의미한 것이리라)

 

일은 부활 문제에 관계없는 것 같으면서 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이 그러한 경우에 자기의 특권을 자랑하려 하는데 반하여 저 바울은 몸소 낮추어 모두를 하나님의 은혜에 돌린 것이다.

 

이는 실로 그의 품성에 대한 이서가 아니랴!

그렇듯 겸손한 말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의 증명은 적어도 경청해야 할 것인가?

 

사람의 성실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그 겸손 같은 것은 없다.

바울은 물론 이것을 쓰고자 하여 쓴 것이 아니다. 절로 그의 입 밖에 나온 말이다.

 

부활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면서 이제 이 한 말을 부가하지 않고서는 그칠 수 없는 사람,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적 겸손을 그 마음 밑바닥부터 맛본 사람이다.

이 한 마디 있음으로서 바울의 증명을 강하게 하는 일 심대하다.

 

이러므로 나도 그들도 이렇게 전파하고 너희도 그렇게 믿었다.(11).

 

부활의 신앙에 관해서는 나와 다른 사도들과의 사이에 아무 차별 없고, 너희와의 사이에도 또한 아무 차별 없다고.

 

초대의 그리스도교회는 실로 그러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모두 부활을 말하고 고린도, 에베소, 안디옥 등의 신자 모두 이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신앙에 있어서 일치하는 까닭에 세계의 일찍이 보인 최강제국 로마에서도 잘 이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어떤가?

우리들은 과연 바울 같이 말할 수 있는가?

 

조합교회이건 감리교회이건 장로교회이건 그 교사들 모두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을 전파할 수 있는가? 또 미국이거나, 독일이거나, 일본이건 그 신자 모두 이 신앙에 있어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오늘 같은 제교회(제교파)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곧 일단으로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미약을 탄식하기를 그치라. 그리스도 우리들의 죄 위해 죽으시고 또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면 교회는 곧 활기 횡일하리라.

 

바울의 전도는 그 가장 긴 곳에 있어서 3, 짧게는 2주 또는 수일에 불과했는데도 이르는 곳마다 강고한 교회의 성립을 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단도직입 사실을 제창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목격한 그리스도 부활의 사실을 고창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하는데 너희 중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 없다고 하는 자 있음은 어찌함인가? (12)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진수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은 크리스천은 아니다. 그런데 너희 중, 어떤 자는 부활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

 

어떤 자 란 아마도 당시의 신학생, 또는 아덴대학 졸업생 같은 이들이리라.

그리스도교회 내에 그러한 말을 하는 자 있음을 듣고서 바울은 분개했던 것이다.

 

아아, 만약 바울 선생을 초청하여 오늘의 도쿄 제교회를 순시케 하셨다면 어떠했을까?

 

너희 중 어떤 자는 부활이 없다고 함은 어찌함인가? .

 

이 일갈에 해당되지 않는 자, 과연 몇 사람이랴.

 

*내촌감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