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거
바울의 부활론(2)
고린도전서 15장 1-58절
성 경: [고전 15:6-11]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개역한글판)
이렇게 나타나 보이신 후 오백여 이상의 형제에게 동시에 나타나 보이셨다. 그 형제 중 거의는 지금도 세상에 있다. 그러나 이미 잠든 자도 있다.
7) 그 후 여고보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또 모든 제자에게 나타나 보이셨다.
8) 최후에 달이 차지 못해 난 자와 같은 내게도 나타나 보이셨다.
9) 나는 실로 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로서 사도라고 불리기에 족하지 못한 자이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이다.
10)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오늘 있을 수 있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모든 사도보다도 많이 수고했다. 하지만 이는 내가 아니다.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11) 이러므로 나나, 또 그들이 나 우리가 같이 전파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렇게 믿었다(6-11,일본어역).
부활은 철학적 제설이 아니다. 또 과학적 가설이 아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즉 정직한 사람이 눈으로서 보고, 손으로서 만진 것이다.
말이 있다.
즉 세상에 사실 만큼 완고한 것 없다고 학설은 없어지고 논리는 사라지는 일 있대도, 사실은 영구히 변하는 일 없다. 세상에 사실을 파괴하기에 족한 의론 없다.
부활이 사실일 것인가?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이 사실임을 안다) 지자(知者)의 박격(搏擊)도, 식자의 조소도, 그것으로서 이를 무너뜨리기는 족하지 못하다.
사도가 부활을 창도하는데 주저치 않음은 그들이 그것이 [교묘한 기담]이 아니라
그들이 듣고 눈으로 보고 정중히 보고 손으로 만진 것(요한 제1서1:1)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타나 보이신 후 오백여 이상의 형제에게 동시에 나타나 보이셨다. 그 형제 중 거의는 지금도 세상에 있다. 그러나 이미 잠든 자도 있다.
7) 그 후 여고보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또 모든 제자에게 나타나 보이셨다(6-7).
그리스도는 죽으신 후 게바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12사도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500이상의 제자들에게 동시에 나타나 보이셨다.
그 형제 야고보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또 달리 함께 있던 여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누가복음 24: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최후에 바울에게 나타나 보이셨다고 한다.
그렇듯 다른 때에 다른 사람에 의해 목격된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학리적 설명여하는 오인이 여기서 물으려하는 바가 아니다. 설명이 어렵다는 것은 그것으로서 사실의 진위를 정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우리는 먼저 사실을 믿으려 할뿐 그런 후에 설명을 시도할 뿐, 바울은 먼저 사실을 보여주고 그런 후에 설명에 미치었다. 이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연구의 정당한 순서라고 할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일컬어
달이 차지 못해서 난자 같은이라고 했다.
그는 정당한 순서를 거치지 않고서 그리스도에게 온 자,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불렀으리라.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또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선 사도바울(갈라디아서1:1)
교회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곧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그는 때로는 달이 차지 못해서 난 기형어처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는 겸손한 말이며 또 감사의 말이다.
혹은 말한다.
달이 차지 못한 아이란 당시외 교회 신자가 그를 조소하여 그에게 부여한 이름일 것이라고.
어쩌면 그러리라. 그리고 저 바울은 교회 신자의 악의에서 나온 그러나 의미 깊은 이 별명을 기꺼이 자기에게 받았으리라.
달차지 못한 자, 기형아, 문외한 . .
옳다. 대적의 말도 이것을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또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은 특히 이 별명을 택하여 그의 별명으로 했을 것이다.
최후에 달이 차지 못해 난 자와 같은 내게도 나타나 보이셨다.(8)
그리스도는 나(바울)에게도 나타나 보이셨다.
옳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죄인의 괴수인 내게도 나타나 보이셨다.
나는 이 특권에 참여한 이 비천한 나에 대하여 일언치 않을 수 없다.
나는 사도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있을 수 있는 자이다.
나는 많이 하나님 위해 수고했다 하지만 이는 내가 애쓴 것이 아니다.
나와 함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만든 바라고.
은혜와 특권은 사람을 오만으로 몰아넣기 쉽다.
바울은 언제나 그의 마음에 이 위험 있음을 느꼈다.
그러므로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특권을 말함에 있어서, 그는 여기서 그가 참으로 무엇인가에 대하여 일언치 않을 수 없었다.
이것 물론 본론의 주제인 부활 문제와 아무런 관계없다.
하지만 잘 논자의 이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고, 그의 변명으로 하여금 일층 근엄한 것 되게 했다.
나는 실로 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로서 사도라고 불리기에 족하지 못한 자이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이다.
10)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오늘 있을 수 있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모든 사도보다도 많이 수고했다. 하지만 이는 내가 아니다.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9-10).
부활은 바울의 독특한 교의가 아니다.
사도라 칭하는 사도는 모두 한가지로 이것을 전파했다.
나나 그들이나, 우리(모두) 이같이 전파했다고.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위해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제3일(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했다고.
옳다. 요한도 베드로도, 야고보도, 바나바도, 아볼로도, 실라도, 이것을 전파함에 있어서는 아무 다를 바 없었다.
요한은 사랑을 말하고 부활을 언급치 않았다고 하는 자는 요한을 모르는 자이다.
아볼로는 구원의 철리를 말하고 부활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는 아볼로를 모르는 자이다.
초대의 그리스도교에 부활을 그 근본적 교의로 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이것 역시 가릴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므로 나나, 또 그들이 나 우리가 같이 전파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렇게 믿었다(11)
너희는 그렇게 믿었다.
전도사는 그렇게 전했다. 신자도 그렇게 믿었다.
그 신앙 일어난 후에 사람은 비로소 그리스도 신자로서 인정되었다.
그때 아직 부활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 신자란 없었다.
그때 아직 윤리적 그리스도 신도라는 자는 없었다.
그때 사도는 주로서 그리스도 부활의 증명자였다.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그리고 신도란 이 증명의 긍낙(肯諾)자(者)였다.
오인(吾人) 오늘에 이르러 이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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