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4일 토요일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성만찬에 대한 교훈

 

성 경: [고전 11:23-34]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고전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 본절의 선언을 통해서 바울은 두 가지 말하고 있다.

 

(1) 성만찬에 대해서 이미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는 고린도 교인들이 성만찬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그런 죄를 범하였다고 변명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2) 바울이 성만찬 규례를 그리스도께 받았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성만찬의 규례가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에서 바울이 성만찬 규례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인가에 대해선 반대 의견이 있어 왔다.

 

반대의 이유는 본절의 '주께'(아포 투 퀴리우)에서 직접적인 전달을 의미하는 전치사 '파라'를 사용하지 않고 간접적인 전달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바울이 사도 전통(傳統)이나 사도들에게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Beza, Hofmann).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아포'가 단순히 간접적인 전달의 경우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사도 요한은 '저에게서 듣고'(앞 아우투)라는 말을 할 때 '아포'를 사용하였다.

 

(요일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또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아포칼립세오) 것이라고 말할 때 '아포'를 사용하였다.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로 보아 성만찬의 규례는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으로서(Bengel, Calvin, Meyer, Olshausen), 바울이 전한 성만찬 규례의 권위의 확고성(確固性)을 내포한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 '잡히시던'은 예수께서 유다에 의해 배반당한 것을 의미한다.

 

그 배반이 갑작스런 충동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의도된 계획의 성취임을 시사한다. 예수는 배반 당하시던 그날 밤에 유다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성만찬 규례를 제정하셨다.

 

떡을 가지사 - ''은 성만찬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 아니라, 유월절 식사 과정에서 성만찬을 제정하였기 때문에

 

(26:17-19 무교절의 첫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가라사대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19)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아마도 무교병이었을 것이다(Godet, W.H.Mare).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성만찬의 의미는 ''이나 '포도주'가 어떤 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고전 11: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성만찬 규례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본서에 나타난다.(23-25;26:26-29;14:22-25;22:17-20)

 

본서에 나타난 성만찬 규례는 세 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과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예를 들면, '기념하라'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새언약' 등이 그것이다.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런 사실은 아마도 누가가 바울의 추종자였으며,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하였던 때문일 것이다. (Edwards).

 

축사하시고(유카리스 테사스) - 본절에서는 누가복음의 경우와 같이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사례하다'(to give thanks)의 뜻을 가진 '유카리스테오'가 사용되었으나,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사용된 것은 '축복하다' 혹은 '찬양하다'의 뜻을 가진 '율로게오'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양자가 구분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축복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은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 관습의 일부인 봉헌(奉獻) 의식을 반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의식을 통해서 일반적인 떡을 성만찬의 떡으로 바꾸셨다.

 

떼어 - 이는 '떡을 쪼갠다'의 의미로 공동 식사의 한 모습이다.

 

떡을 떼는 행위는 유월절 식사의 경우 애굽에서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만찬의 규례에서는 고난을 당해서 찢길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상징한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 개역성경에는 '찢긴'(클로메논)이 생략되어 있다.

문맥상 그것은 '떼어'와 연관되는데 이유는 그리스도의 '찢긴 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찢긴'을 삽입하는 것이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너희를 위하는'은 성만찬의 목적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직접 행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이것을 행하여'는 성만찬이 영구한 제도로서 사도들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까지도 영원히 행하여야 할 규례임을 시사한다.

 

'나를 기념하라'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으며 누가복음에만 나타나고 있다.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기념하라'는 이런 그리스도의 명령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규례를 계속 지켜왔던 것처럼 성만찬 규례를 기억하고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신 명령은 새로운 성만찬 규례를 의미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아마도 "너희가 성만찬을 기념할 때, 어린양의 피로 조상을 구원한 것을 기억하지 말고 너희를 구원할 나와 내 희생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식후에 - 본절은 만찬이 다 끝난 후가 아니라 떡을 다 먹은 후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잔을 가지사 사례 하시고'로 성만찬의 두번째 의식을 언급한다.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14: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그러나 누가복음과 본서에서는 '이와 같이'라는 어구로 그와 같은 축사의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잔은 - 본문에서의 ''은 잔에 담겨진 '포도주'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진술함으로 포도주 마시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 본절은 누가복음의 기록과 동일하다.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단지 누가복음에는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가 부가되어 있다.

 

반면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14:24)고 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표현은 유대계 기독교회에서 사용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Godet).

 

한편 본절의 '새 언약''모세의 언약'(24:8)과 대조된다.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모세의 언약에서는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이 다섯 단계이다.

 

(24:3-11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1) 언약 체결을 위한 준비 작업.

(2) 여호와의 언약서 낭독.

(3) 백성들의 준행 서원.

(4) 언약의 피를 뿌림.

(5) 70인 장로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서 체결 완료를 의미하는 공동 식사를 나눔.

 

이런 과정을 거친 옛 언약은 희생의 피를 필요로 하며 피를 뿌림으로 언약 당사자들 간의 책임을 인식하게 하였고 이런 언약 의식은 매년 유월절 만찬 때 상기(想起)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세의 옛 언약은 예레미야에 의하여 선포된 새 언약으로 대치되었다.

 

(31:3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는 모세의 언약을 이스라엘이 파괴하였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관계를 맺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 죄를 기억지 않게 하겠다는 내용임을 소개한다.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예수의 '새 언약'에 대한 예표로서, 더 이상 동물의 희생의 피로 맺는 언약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영원히, 단번에 이룬 새 언약임을 암시한다.

 

본절의 '새 언약'은 바로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새 언약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서 성만찬을 통해 이를 기념한다.

 

 

[고전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 하면')가 생략되어 있으나 헬라어 사본에는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가르'를 보존하고 있다.

 

이는 앞절의 '나를 기념하라'와 연관성을 갖는다(Godet, Hodge).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오실 때까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념하라'와 연관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기념하는 행위'는 주가 재림할 때까지 지속된다.

 

이처럼 본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지칭하는 것이나, 그것은 단순히 기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에 대한 확신이다.(Edwards, Godet).

 

한편 '전하는 것이니라'(카탕겔레테)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는 방법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행위'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한다(Edwards). ''로 알리는 것보다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바울이 역설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2) '카탕겔레테''알리다' 혹은 '선포 하다'라는 뜻으로, ''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Meyer).

 

두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로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인 죽음과 부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고백과 대중적인 선포는 물론 성만찬 의식을 통해서 증거하고 대대로 전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고전 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바울의 관심은 성만찬의 규례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그는 성만찬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23-25)과 자신의 견해(26)를 밝히고, 이런 규례를 고린도 교인이 처했던 상황에 적용시켜 고린도 교인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 이것은 이제까지 말한 성만찬의 규례를 적용시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를 나타낸다.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 당시의 성만찬은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식사 동안에 떡을 먹고 그 후에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에, 떡을 합당하게 먹는다 할지라도 잔을 합당치 않게 마실 경우도 있다.

 

'합당치 않게'(아낙시오스)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기념하지도 않고, 그를 경외하지도 않으며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이다(Flatt).

또한 죄인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기억함과 감사함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Godet).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도들 간의 교제로 생각지 않고 단지 헬라인의 관습처럼 즐거운 연회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여했을 때 범죄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다.

 

 

[고전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개역성경에는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는 앞절보다 진보된 내용을 다루려고 하는 것을 암시한다. 즉 성만찬을 합당하게 참여하기 원한다면 해야 할일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 '살피고'는 예수의 인격에 관한 자신의 마음가짐을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Godet).

그래서 본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감사함으로 기념하며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지에 대해서 스스로 살펴야 함을 의미한다.

 

 

[고전 11: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은 앞절에서 밝힌 내용, 즉 자기 자신을 살피고 먹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 '분변치'는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타내는 성별된 떡과 포도주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며, 성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감사하며 동참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성만찬의 가치와 의미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 11: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 본절은 성만찬에 합당치 못하게 참여함이 영적 병약함과 죽음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연약함과 죽음까지도 초래하게 됨을 시사한다.

 

 

[고전 11: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 개역성경에는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는 논쟁에 귀한 논리적인 진보롤 나타내는 것으로, 성만찬과 하나님의 징계 문제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살폈으면'(디에크리노멘)29절과 상관성을 갖는데, 그것은 주의 몸과 피의 가치를 분명히 이해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가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Godet).

 

'판단을 받지'(에크리노메다)29절의 '죄를 먹고 부시느니라'와 연관된다.

 

29절에서 ''가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본절에서도 '판단'은 하나님의 징계를 의미한다.

 

(29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전 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 본문에서도 '판단을 받는 것''징계를 받는 것'은 동일시 된다.

본절의 '하나님의 징계'는 잘못한 자식을 회개케 하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의 수단이다.

 

(딤전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본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징계하시는 목적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그 징계는 영원한 심판을 막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심판의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Edwards).

 

한편 바울은 앞절과 본절에서 세 가지 용어를 통해 세단계의 '판단'에 대해 논증한다(Godet).

 

첫 단계는, '디에크리노멘'으로서(31)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둘째 단계는, '크리노메노이'('판단을 받는 것')로서,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하여금 회개케 하고 세상과 함께 정죄(情罪)받지 않게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셋째 단계는, '카타크리도멘'('죄 정함을 받은')으로서,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 심판 때에 영원한 심판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 11: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그런즉 - 이것은 이제까지 성만찬에 대해 논증한 것에 대한 결론임을 시사한다.

 

형제들아 -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권속(眷屬)들을 향해 자주 사용하는 애정어린 표현이다.

 

바울은 본장 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책망과 유사한 강력한 권면을 하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권면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애정어린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Godet).

 

 

[고전 11: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 본절은 22절과 연관성을 지닌다. 그것은 어떠한 형편의 사람이든지 간에 먹고 마시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갖고 성만찬에 참여하려면 집에 가서 먹으라는 의미이다.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허기를 메우려고 성만찬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 이유는 잘못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29-32) 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만찬의 목적을 분명히 이해하고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 '그 남은 것'은 성만찬 외에 다른 문제들에 대한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만찬에 대해서 지금 말하지 못한 세부적인 사항을 의미한다.

 

본절은 성만찬의 규례에 대한 설명을 맺으며 바울이 부언하는 내용이다.

 

'귀정하리라''정돈하다'라는 의미이며(Edwards,Hodge)

 

바울은 사도로서 모든 규례를 제정하고 정비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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