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8일 수요일

사람의 자녀는 그 짧은 생애 어간에 무엇을 하면 좋을 것인가?

  

전도자의 발견

 

전도서 111~8

 

전도자는

 

'사람의 자녀는 그 짧은 생애 어간에 무엇을 하면 좋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마련하고,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해답을 시도했다.

 

지식을 시도했다. 일락을 시도했다. 사관을 시도했다. 축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무엇을 시도했어도 만족한 해결에 달하지 못했다.

 

'모든 것은 헛되어 바람을 잡는 일이라'는 것은, 그가 매사에 발한 탄성이었다.

 

인생만사 모두가 불명이다. 사람과 짐승과 아무 다른 데는 없다.

지우, 운명을 한 가지로 한다.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도, 드리지 않는 자에게도,

그 임하는 바는 하나라고 했다.

 

이에 있어서인가,

그는 생명을 염오했다. 태어난 보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에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다. 그는 선조의 종교의 유전적 감화를 받아,

육욕주의 또는 염세주의로 마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디엔가 도피처(피할 길)를 발견치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지상선의 탐구는 무익하지 않았다.

 

인생의 지상선은 지혜가 아니라, 쾌락이 아니라, 공적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는데(시여하는데) 있다고 그는 깨달았다.

 

네 빵(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고, 그는 최후에 외쳤다.

 

세상에 무익한 일 중에, 빵을 물 위에 던지는 일 같은 것은 없다.

물은 곧 빵에 스며들어, 적시어진 빵 덩어리는 곧 물속에 잠기는 것이다.

빵을 사람에게 주는 것은 좋다. 이것을 개에게 던지어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을 물 위에 던져버리는데 이르러서는 무용의 정상이다.

 

그런데 전도자는 이 무익한 일을 하라고 사람에게 고하고, 자신에게 타일렀던 것이다.

 

네 빵을 물 위에 던지라. 무효로 알면서 사랑을 행하라.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그 결과를 바라지 말라.

물건을 주고서(시여하고서) 감사조차 바라지 말라.

다만 사랑하라. 다만 시여하라. 다만 선하라. 이는 인생의 지상선이다.

최대 행복은 이에 있다고 전도자는 말했던 것이다.

 

네 빵(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네가 다시 이를 얻으리라(11:1).

 

아낌없이 주라. 보답을 안중에 두는 일 없이, 선을 행하라.

여러 해를 지난 후에, 혹은 이 세상을 끝마친 후에,

네가 혹은 다시 이것을 입수할 수 있으리라.

바라지 않았는데, 그 결과를 볼 수 있으리라.

 

빵은 모두 물 위에 젖는 바 되고, 감사로써 받아들여지며,

혹은 30, 혹은 60, 혹은 백배 되기에 이르리라고.

 

'이것을 일곱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또는 여덟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11:2).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네 은혜에 참여케 하라.

네 사랑을 베푸는데 있어서 사람을 가리지 말라.

네게 오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네 은애의 수령자 되게 하라.

 

사랑을 나누는데, 상하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귀천, 빈부, 지우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무릇 네 손이 할 수 있는 것은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9:10 일역)

 

할 수 있는 한의 선을,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하도록 하라.

 

선을 행하는데 또 때를 가리지 말라.

때를 가림으로써 선을 행함의 기회를 잃으리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치 않고,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않는다'(11:4).

 

맑아도 선을 행하라. 비가 온대도 선을 행하라.

부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네 선행에 변화 있어서는 안 된다.

선을 행하는데 나쁜 때란 없다.

모든 때와 모든 기회는 선을 행하는데 알맞다.

 

순경에 있어서는 물론 선을 행할 것이다.

역경에 처한 대도 또한 이것을 게을리하지 말라.

가는 곳마다 선행의 향기를 발하도록 하라.

세상은 변화하지만, 세상에 대한 네 선의에 변화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라. 저녁에 네 손을 늦추지 말라'(11:6).

 

아침에 파종하라. 낮에 파종하라. 밤에 파종하라.

선의를 간직하고, 선한 일을 않아야 할 때란 촌시도 있어서는 안 된다.

 

네 언어로 하여금 사랑의 말이 되게 하라.

네 안광으로 하여금 사랑의 빛이 되게 하라.

오직 다만 선을 행하고자 하고,

모든 때와 기회는 네 소용되게 하여 그르치지 않게끔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만이 비로소 참된 행복은 있으리라.

 

'그럴 때 빛은 네게 즐거우리라. 네 눈은 해를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할지로다'(11:7).

 

지식도 쾌락도 부귀도 성공도 할 수 없는 것을

사랑은 너로 하게 할 수 있으리라.

사랑은 너로 하여금 일광을 즐길 수 있는 것이 되게 하리라.

 

날마다 너를 비추는 햇빛, 너는 오늘까지 이것을 즐길 수 없었다.

너는 행복을 사랑의 행위 이외에 있어서 구함으로써,

인생 최대의 행복인 일광을 즐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 즐거운 것치고서,

날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태양 광선보다 나은 것 있을손가!

 

그런데 사람은 그 화광 속에 살면서(쬐면서) 그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다.

선을 행하여 싫증이 나지 않음의 보수는 이에 있다.

일광을 즐길 수 있음에 있다.

 

그리고 너도 또한 날마다 선행의 빵을 이 세상의 물 위에 던지고,

세상은 네게 보답하지 않는대도,

햇빛을 즐길 수 있는 자로 되어 풍족하게 하나님께 보상받으리라.

 

실로 '사람이 만약 여러 해를 살 것이나, 그는 행복한 중에 모든 해를 보낼지로다'(11:8).

 

백년의 장수도 즐기지 못하면, 태어나지 않음만 못하다.

행복은 인생의 생명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세상의 소위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전도자는 지식을 더함으로써, 행복을 더하지 못하고, 그 반대로 근심을 더했다.

그도 많은 처첩을 즐겼으나, 부인이란 죽음보다도 쓴 것임을 알았다.

기타 모두가 그런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일만, 그에게 행복을 주었다. 즉 아낌없이 주는 일이었다.

결과를 바라는 일 없이 선을 행하는 일이었다.

망은(忘恩)적인 이 세상에 무익한 줄 알면서도 선행의 빵(식물)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이것만이 그에게 참된 행복을 주었다.

이것에 일신을 맡긴 후부터, 그는 햇빛을 즐길 수 있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이 백년의 장수도, 행복의 연속일 수 있다고 그는 깨달았다.

 

인생은 행복해야만 한다.

그런데 사랑의 생애만이, 행복의 생애라고 그는 해득했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 대발견이었다. 그는 여기서 인생의 지상선을 발견했다.

순애로써 세상에 대하고, 자기 것은 이에 아낌없이 주는 것

그것이 지상선 최대 행복이라고 그는 깨달았다.

실로 그의 탐구는 그 목적에 달한 것이다.

 

철학자 칸트(1724-1804 독일의 철학자)는 말했다.

전 우주를 통하여, 최선이라고 칭해야 할 것은, 선한 의지이라고.

선한 사상은 아니다. 선한 사업도 아니다. 선한 의지이라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써 최상의 기쁨으로 삼는 그 마음,

이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으로써, 이것 이상으로 선한 것은

우주 어디서도 구할 수는 없다.

 

그리고 '네 빵을 물 위에 던지라'고 하여 전도서의 저자는 이 지상선을 파악한 것이다.

 

이는, '선한 일을 하시면서 두루 다니셨다'(사도행전 10:38)고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마음이다.

 

전도자의 발견은 실로 큰 것이었다.

전도자는 다시 또 하나의 발견을 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알라, 그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너를 심판하심을. 그러므로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떠나게 하라. 네 몸에서 슬픔을 제거하라'(11:9-10).

 

이것을 간추려 말하면,

'하나님은 너를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기뻐하라'는 말이다.

 

심판이라고 하면, 언제나 두려워해야 할 것으로서 알려지는데,

전도자는 여기서 심판을 기뻐해야 할 것으로서 전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이 참으로 기뻐해야 할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심판은 만사의 판명이다. 죄는 죄, 의는 의로써 판명되는 것이다.

'의인이, 악인의 받아야 할 보수를 받는 일 있다. 또 악인이 의인의 받아야 할

보수를 받는 일 있다'(8:14 일역)는 것은,

 

이 세상의 일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아직 행해지지 않을 때의 상태이다.

이 상태를 보고, 누구나 '이것도 헛되도다'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이 모순은 아주 제거되는 것이다.

내 죄도 나타나고 내 의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을 행함의 무익하지 않음이 명백하게 명시되는 것이다.

세상에 기뻐해야 할 일로서,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다.

공평무사하고, 사랑과 의에 기초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다.

모든 선한 것은 이 심판에서 오는 것이다.

 

명판관이 나와서 공의를 나라에 실시함에 이르러,

참된 복지(행복)는 국민에게 임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시기에 이를 때,

참된 행복은 만민에게 임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날마다의 기도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의 소망도 역시 이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오직 공포로만 보는 것은,

그 무엇인지를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판보다 나은 기쁨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뻐해야 할 일임은 성서 전체가 알려주는 바이다.

시편 제 96편에 이르기를

 

'하늘은 기뻐하라. 땅도 또한 기뻐하라. 바다와 그 가운데 충만한 것은 소리를 발하여 기뻐하라. 발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춤추며 기뻐하라. 숲의 모든 나무도 또한 여호와 앞에서 기뻐 노래하라. 여호와 임하시리로다, 땅을 심판하시려 임하시리로다. 진실로써 뭇 백성을 심판하시려고 임하시리로다'(11-13 일역).

 

또 같은 것이 동 제 98편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만민을 심판하심은,

임무 작약하여 맞이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마음에 깨닫고서, 전도자의 우려는 그친 것이다.

이것을 알고, 그는 인생을 즐길 수 있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이제 다시 예전의 청년시대로 되돌아가, 자기를 격려하면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년아. 네 젊은 때에 즐기라. 네 젊은 때에 네 마음을 기쁘게 하라'.

 

하나님께서, 만사를 보시고, 만사를 심판하심을 알 때,

불평은 그 근저에서 끊기고, 비애는 사라져 자취 없어지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의문은 모두 말끔히 되어졌던 것이다.

그는 이제는

 

'우매자가 높은 지위에 올려지고, 현자가 낮은데 앉음'을 본대도,

조금도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안으로써 시작된 그의 탐구는 평안으로써 끝마쳤던 것이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선민의 한 사람으로서, 염세적으로 인생을 해석해 버리지 않았다.

그는 선지자의 정신을 받아, 환희적으로, 인생을 보았다.

 

'그러므로 네 마음에서 근심을 버리라. 네 몸(일신)에서 슬픔을 제거하라'는 것은,

그의 최후의 말이었다.

 

인생의 지상선은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전도자는 긴 탐구의 결과로서 명확히 대답해 말했다.

 

(1) 사람의 생애에 있다.

(2) 환희의 생애에 있다고.

 

그리고 그는 다시 그 원천을 궁구하여 최후의 단안을 내려 말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명령)을 지키는데 있다'고 이것으로 만사는 끝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했다. '이는 인생의 전부이다'라고.

 

인생의 목적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생애의 의미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고'가 아니다.

경외하고, 애종하여, 마음으로부터 그 계명(명령)을 지키는 것은,

즉 하나님의 뜻(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하고, 심령이 성결해져,

밖으로 거룩하게 행하는 일, 그것이 사람의 전부이다.

 

이것 위한 인생이다.

이것 위한 지식이다.

이것 위한 쾌락이다.

이것 위한 사업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지키는 일',

실로 이것 이외에 인생이란 참된 인생은 없는 것이다.

 

전도자의 발견은 실로 대() 발견(發見)이었다.

근세철학의 시조인 철학자 칸트의 소위 사상계에 있어서의 혁명적 발견도,

이것 이상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내촌감삼의 전도서 해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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