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0일 금요일

오늘부터는 여호수아서 공부를 시작합니다.

  

여호수아서 대의(大意)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침입기이다.

혹은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의 전기이다.

 

매우 용감스런 글이다.

일본인의 군기를 읽는 것 같이 느껴지는 곳도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군인으로서 본, 그 행동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로서,

군사에 종사하는 자는, 즐겨 이 글을 읽는다.

 

이것은 크롬웰(18, 121p 266p 참조)의 특애의 글()이었다.

그는 스스로 영국에 파견된 여호수아로 생각하고,

그 적을 소멸하는 데 있어서,

여호수아가 취한 길을 취했다.

 

전쟁을 악사(惡事)로 보면, 이 글()에 아무런 가치도 없으나,

전쟁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면, 이글은 모범적 서적이다.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그리스도 신자도 또한 이 글을 읽고,

배우는 바 다대(多大)한 것이다.

 

신앙은 전쟁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에베소서 6:12)’고 있음과 같다.

 

우리 적을 악의 영인 사탄으로 볼 때,

우리도 또한 예수(여호수아라는 말과 같다)에게 인솔되어,

그 소멸에 종사하는 자이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나의 도우심이라는 뜻이다.

 

* 참조 :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여호수아서는 24장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삼부로 나눈다.

 

1부는 가나안 침입기이다. - 1장에서 5장에 이른다.

2부는 가나안 정복기이다. - 6장에서 12장에 이른다.

3부는 가나안 분할기이다. - 13장에서 22장에 이른다.

 

이상의 부록으로서,

여호수아의 결별사(訣別辭)가 있다.

 

우리들에게 흥미 많은 것은, 1부와 부록이다.

 

3부는 팔레스틴 지리에 정세한데 미치고 있어, 이해하는 일은 매우 곤란하다.

그렇지만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귀중한 문서이리라.

 

또 고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여호수아서의 가치는 큰 것이다.

그중에 여호수아의 성질이 잘 나타나 있다.

 

모세는 정치가이며, 법률가임에 대하여,

여호수아는 단순한 군인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행적도, 말도 모두 군인적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1:19)’.

 

군인의 직분은 명령에 복종하는 데 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우로도 좌로도 치우치지 말라)’.

 

다만 복종하라.

그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시인 테니슨(1106p 참조)이 유명한 경기대의 돌진에 있어서 노래한 대로이다.

 

우리들은 왜라고 물을 바 아니다.

우리들은 다만 복종, 죽어야 할 것이다라고.

 

그리고 여호수아서를 통행 일관해 있는 정신은 이 정신이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서약한 말은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1:18-)’.

 

가나안 정복은, 요단강 도섭(徒涉)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때, 홍해 횡단에 있어서와 같은 기적이 행해졌다.

 

다음으로 여리고의 함락이 있었다.

이것도 역시 이적에 의해 행해졌다.

 

그 다음이 아이의 공략이었다.

여기서, 패배의 원인은 죄에 있다는 것이,

잊어서 안 될 실험으로서 교시되었다(7, 특히 그 19절 이하를 보라).

 

(7:19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

 

이스라엘인은 서로 향해 나아갔다.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10:1)이하,

아모리인의 왕들 5인이 연합하여 방전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인솔하는, 침입군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도망쳐 벧호론(10:11-)비탈로 내려갈 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의 우박을 내리게 하시어,

그들을 치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 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10:11-)’.

 

그리고 여기서 여호수아가 백성들 앞(이스라엘 목전)에서 말한 것이 유명한 것이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10:12-13)’.

 

기자는 이에 주()하여 말했다.

 

(이는)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13-14)’.

 

이후 몇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 여호수아군의 대승리로 돌아갔다.

 

근세사에 있어서

여호수아 전사에 필적할 만한 것은 크롬웰(18, 121, 266p 참조)전사이다.

연전 연대 승()이었다.

모두 이적적 대승리였다.

 

사람의 역사()는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이시다.

싸움은 여호와의 것이었다.

그 정의를 행하고,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에서였다.

 

만약 살벌에 의미가 있다고 하면,

이것 이외에 없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타락이 극에 달한 가나안인(1299p, 2103p 참조)을 벌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에 맞추어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의 오늘날,

여호수아가 취한 수단 방법을 취할 필요는 전연 없다.

 

여호수아서는 오늘은 영전(迎戰)기로써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읽을 때,

이글()의 가치는 절대한 것이다.

 

*내촌감삼의 (19271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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