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성 경: [고후 12:1-10]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 바울은 이미 앞에서 자랑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으며 어리석기까지 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16-18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18)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그러나 바울은 불가피하게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거짓 사도들에 의해서 오도(誤導)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일깨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주의 환상과 계시 - 여기서 ‘환상’은 바울이 일찍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을 아그립바 왕 앞에서 간증할 때 사용되었던 말이기도 하다.
(행 26: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이 말은 초자연적이며 기적적으로 어떤 실체를 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처럼 보는 것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인지 아니면 무의식의 상태에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이것을 잠을 자는 상태라기보다는 깨어있는 상태라고 말한다(Farrar).
'계시'는 '베일을 벗기다'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로, 환상이 직접적으로 보여진 현상이라면, '계시'는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감지(感知)하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환상은 대부분 계시이지만 모든 계시가 환상인 것은 아니다(Harris, Tasker).
바울이 이 시점에서 갑자기 자신이 체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바울이 지금 '자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바울의 자랑은 적대자들의 자랑에 대한 대응책으로서의 자랑이다.
적대자들은 자기들이 참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랑했고,
(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자칭 권위있는 추천서를 내밀면서 자기들의 자격을 자랑했다.
(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그리고 그들은 신비적인 경험을 자랑했을 것이다(Barrett).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의 적대자들이 신비적인 경험에 대해 자랑한다면 바울 자신도 그런 것에 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는 의미로 신비적인 경험에 대해 진술하게 되었다.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한 사람을 아노니 - 바울은 오래전에 경험한 신비 체험을 말하는 방식이 있어, 자기 자신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라는 간접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나'라는 말 대신 '그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랍비적 표현법의 영향이었거나, 또는 바울의 그 경험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십 사년 전 - 바울은 매우 오래 전의 경험을 되살리면서 특히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함으로써 증언의 신빙성(信憑性)을 강화시키고 있다.
행 22:17에서 엄급된 바 대로 성전에서 본 환상을 가리킨다고 추정한다(Hughes).
(행 22: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 세째 하늘 - 본문은 공간적인 개념으로 보지 말고 바울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래서 언어로는 정확히 묘사할 수 없는 곳,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에 가서 말할 수 없는 체험을 환상 중에 했다는 것으로 이해함이 무난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째 하늘'의 개념은 엡 4:10의 '모든 하늘 위에'란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
(엡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혹자는 이것과 관련하여 본문의 표현이, 신자들이 마지막 날에 들어갈 하늘, 혹은 천국의 선취(先取)를 의미한다고 본다(Barrett).
▶ 이끌려 간 자라 - '이끌려'는 자의나 자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붙잡힌 바 되었음을 뜻한다. 즉 성령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본 구절은 그 환상의 경험이 인간의 오성(悟性)과 관념의 범주로는 포착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아시느니라'는 진술에서 바울은 계시나 환상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임을 암시적으로 가르친다. 따라서 만약 적대자들이 그들의 환상 경험을 자랑하되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고후 12: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환상과 계시는 경험하는 자가 자의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요 주체적으로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것을 수동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일상사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초월하는 경험이다. 그래서 그것을 인간적인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낙원으로 -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낙원'이라는 말은 '세째 하늘'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고 이 표현이 유대인들의 '세째 하늘' 개념과 동일하지는 않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객관화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낙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παράδεισος 파라데이스'는 페르시아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동산'을 뜻했는데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를 차용했다(Bruce).
구약성경에서 '낙원'은 아담과 하와가 거주했던 에덴동산.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사 51:8 그들은 옷 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 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겔 28: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31:8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우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아무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한 곳.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또는 세상에서 신앙으로 이기는 자가 얻을 영생의 장소로 묘사되어 있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따라서 '낙원'은 유대 랍비들의 견해와는 달리 구원받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는 너무도 신비로운 것이어서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들은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신적(神的) 비밀이기 때문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구약에서 보여지는 봉인(封印)된 계시에 관한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 8: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단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고후 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의 당사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은폐(隱蔽)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2절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으나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혹자는 여기서 묵시 문학자로서의 바울과 인간 사도로서의 바울을 구별하여 생각하기도 한다(Lietzmann).
다른 학자는 교회의 유익을 도모한다는 바울의 기본적 관점에서 이해하기도 한다(Kasemann).
즉 바울은 '방언'이나,
(고전 14: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황홀경 체험'에 대해 말할 때,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교회의 유익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하나님과 바울 자신만의 일을 말하는 것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바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오해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 그런 자랑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얻으려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그가 취할 영광은 그 환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곧이어 언급한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 약한 것들 - 바울은 매우 현명하게 자신의 논리를 진전시켜 이제 정말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려는 것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신비 체험을 말하는 것은 다만 적대자들이 그들의 사도직의 증거로서 황홀경 체험을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사도직의 증거라면 바울 자신도 얼마든지 말할 것이 있다는 의미로 환상 체험을 진술했을 뿐이다.
바울이 결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도로서의 자랑이 오직 자신의 약함이 있다는 것을 적대자들이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周知) 시키는 것이다.
[고후 12: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 참말을 함이라 - 바울이 지금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것도, 또 하려고만 하면 앞으로 할 자랑도 모두 참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경험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데에는 그의 적대자들이 보지도 않은 환상에 대해 말했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 바울은 얼마든지 더 말할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자랑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곡해(曲解)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다.
또한 바울은 과거에 그가 미쳤다고 악평하는 소리를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5:13) 이번에도 그런 것을 염려했는지 모른다.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러나 본절은 자기가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소극적 의미에서 보다는 자기가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또는 다른 평범한 성도들에게 시험이 될 수도 있었음이 우려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도모한다는 바울의 원칙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높이 드러나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받고 자신은 오직 사도적 봉사를 통해서만 인정받기를 바랐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 자고(自高)하지 않게 - 바울은 일반인들과는 달리 엄청난 계시를 경험했다.
그에게만 주어진 이 특수한 은총이 그를 교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바울이 그런식으로 실족하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이것을 통해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 속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 육체에 가시 - 이것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바울이 이 가시를 육체에 지닌다고 할 때, 이것을 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적대자로 보거나 거듭나지 않은 영혼의 한 부분 때문에 생기는 육적인 유혹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Calvin).
그러나 이는 지속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간질, 두통, 그리고 안질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안질이나 간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안질일 가능성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강렬한 빛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
(갈 4:13-15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간질일 가능성은 바울 자신이 '가시'를 가리켜 사단의 사자로 재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마 17:14-18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행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갈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 사단의 사자 - 이렇게까지 표현한 데에는 바울이 그 '가시'로 인하여 당한 고통이 대단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가시가 그의 삶에 여러 모로 방해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는 사단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어서 성도의 보존을 위해 사용됨이 나타난다.
[고후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 '세 번'이라는 숫자는 일정하게 여러 번 반복하여 드리는 기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의 경우에서와 같이 문자적 의미의 세 번을 뜻할 수 있다.
(막 14:32-4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고통스러운 질고(疾苦)를 벗고 싶어서 매우 진지하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주께' 기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기도한 것은 질고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에게,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구체적으로 자신의 질병을 거론하여 기도했음을 암시한다.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 이르시기를 - 이는 'ἔρω 에레오'는 최종 판결문에 쓰이는 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 상당히 선언적이고 종결적인 표현법이다.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주님의 응답은 바울이 원했던 것과는 상반된 것으로 나타난다.
혹자는 이것을 가리켜 '매우 친절한 거절'이라고 해석한다(Bengel).
아무튼 바울은 뼈아픈 '가시'를 그대로 지닌 체 만족해야 했다.
한편 바울은 이 서신에서 '은혜'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본 구절에서의 '은혜'는 그가 사도가 되고 또 사도로서의 활동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래 '은혜'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매개(媒介)로 하여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반드시 인간의 고난이 제거되는 것만이 은혜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아픔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늘 주님을 의지하고 또 주님께서 은혜로 그가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 주님께서 바울의 간구를 거절하신 이유는 당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역설적이다.
즉 바울이 인간적인 약점이 없다면 그의 사역이 그 자신의 능력으로 잘못 이해되어 자고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약점을 지님으로써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어 겸손하게 된다.
이로써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은혜의 원리가 그에게도 적용되어 바울은 끊임없이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
▶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 여기서 '머물게'의 의미는 '장막에 확고히 머무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바울의 약한 부분들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은 확고하고 변함없이 머무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즐거이 약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고 자기의 약함을 도리어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약함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기들의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강함을 과시하는 적대자들은 결국 주님의 능력이 자기들에게 나타나지 않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된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강해지려고 했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는 감추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가 영광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영광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되신 그리스도가 영광 받도록, 철저하게 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 삶의 결과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약하고 비천(卑賤)하게 보였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충만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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