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4일 월요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불행의 전용(轉用)

 

고린도후서 121-10 :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에게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로마서 828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누구에게나 불행이 임합니다. 불행이 임하지 않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불행은 이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하여 불행에 처할 것인가, 그것입니다.

말을 바꾸어 한다면 불행에 이기느냐 지느냐, 그것입니다.

지면 불행은 참으로 불행입니다. 이기면 불행은 행복입니다.

 

불행을 불행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이것을 화하여 행복 되게 하는 길.

누구나 모르면 안 되는 길은 이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우리로 하여금 불행에 이겨 이것을 행복 되게 하는 도라고 믿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그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허다한 실례를 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현저한 것이 사도 바울의 생애입니다.

 

그는 결코 이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의 몸에 임한 불행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것을 밝히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마는

하지만 우리들도 그가 남긴 서간을 읽어보고서 그가 불행의 사람이었음을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는 일찍이 한번도 그의 부모, 형제 등에 대하여 말한 일은 없습니다.

그는 다만 복음 전파의 명이 하나님에게서 그에게 임한 때에,

 

[그때 나는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라고 하여

 

그는 일찍이 그의 혈육과 절연하기에 이른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울 같은 열정의 사람이 부모, 형제 등에 대하여 세차게 생각하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그에게 자매가 있었던 것은 우리들은 이것을 사도행전 2316절에 의해 아는 것입니다.

[바울의 자매의 아들, 이 모의를 듣고서]라고.

 

그런데 바울 자신은 이 자매에 대해서는 일회도 진술치 않습니다.

그는 또한 잘 이성의 사랑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에게 애인이 있었음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무언가 깊은 이유가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은 고린도후서 127절 이하의 그의 말입니다.

 

[또 내게 주신 많은 묵시로 인하여 나를 교만치 않게 하시기 위해

하나의 가시를 내 육체에 주셨다. 곧 나로 교만치 않게 하시려고 나를 치는 사탄의 사자이다.

나는 이것 때문에 세번 주께 구했다. 이것을 내게서 제거해 주시기를 그런데 그는 말씀하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대저 내 능력은 약한데서 완전해 지기 때문이다. ’라고.

이러므로 나는 오히려 기뻐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련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가시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은 다수의 주해자의 억측을 자아내개 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는 이것도 아마도 악질의 일종으로서 바울은 이것 때문에 도처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전도상 지대한 방해를 느꼈으리라는 것입니다.

 

혹은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을 그의 몸에 임한 어떤 인생의 대불행으로 보는 편이 그의 생애의 대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깊은 또 총합적인 견해가 아닐까요?

 

어쨌거나 바울의 생애의 이면에는 무언가 그에게 있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잠겨 있었음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실로 그에게 있어서 일생 몸에 지녔던 가시로서 그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견딜 수 없게 생각하여 몇 번이고(다만 세 번이 아니라)그것이 제거되기를 주께 원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주는 그것이 제거되지 않음을 도리어 좋게 여기셔서 이것을 그대로 투어 은혜로써 낫게 이것을 채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애는 그 환난을 떠나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는 그 주와 같이 [비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면을 안 사람은 말했을 것입니다.

 

[그의 전도 무언가? 그의 괴로움을 숨기기 위한 사업이다. 이것에 고귀함은 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간에 그의 대사업은 이룩된 것입니다.

 

그에 의해 인류의 역사는 일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의 몸에 임한 불행, 환난이, 그로 하여금 이 대사업을 하게 한 기회를 만들었다면 우리들은 그에게 이 불행이 임한 것을 좋은 일로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의 사업은 결코 불행에 의해서만 이룩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로 하여금 이것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행은 은혜를 부르는 기회로 되었습니다.

그 의미에 있어서 불행은 그에게 있어서 좋은 역사()를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불행에 이겼습니다.

이겼을 뿐 아니라 이것을 자기에게 있어서 인류에게 있어서 대행복을 가져오는 기회가 되게 했습니다. 실로 그가 말한 대로입니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 죽으심의 모양 따라 그의 고난에 참여하여 어쨌거나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빌립보서 3:10-11)이라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임한 까닭에 그는 그리스도에게 임한 모든 고난에 이겨내고 이 세상에서 부활의 생애를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말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나는 그리스도 위해, 약함과, 수치와, 궁핍과, 박해와 환난 당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그것은 내가 약할 때에 강하기 때문이다](고린도 후서12:10)라고.

 

[개의치 않는다]가 아닙니다. [기쁨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환난에 견딜 것이 아닙니다. 이기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 한 사람에 한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는 이것을 실험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모두 바울에게 임한 것과 한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로 인하여 불행을 바꾸어 행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역사는 긴 그리스도교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 강세(降世) 이후의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대사업이라는 대사업은 모두 불행이 화하여 행복으로 된 것이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심벌인 것으로서 인류는 십자가에 의해 구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18세기의 영국에 죤 하워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개량으로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영국을 비롯하여 구주(歐洲)제국의 감옥은 그의 종생의 노력에 의해 현저한 개량을 이룩했습니다.

우리나라(일본) 오늘의 가몽각이라 해도 이 사람에게 힘입은 바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자선가의 호모범입니다.

그에 의해 자선 사업은 그 모든 방면에 있어서 현저한 개량, 진보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세상에도 드문 불행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복한 집에 태어났으나 행복은 그의 몸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찍이 최애(最愛)의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 의한 한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또 세상에도 드문 불량아였습니다.

이 사람에게 이 아들 있다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워-드는 일생 이 아이로 고생했습니다. 그의 일생의 기도는 이 아이가 그 심신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하워-드는 많은 타인의 자녀를 고치고 있는 동안에 자기의 아들을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쓰라린 일이었을지요?

그도 때때로 바울과 함께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가시를 내 육체에 주셨다. 즉 나를 치기위한 사탄의 사자이다. 나는 이것 때문에 몇 번이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 가시를 내개서 없이하여 달라고. 하지만 그는 이것을 제거해 주시지 않고서 다만 내게 고하여 이르셨다. ‘내 은혜, 네게 족하다]

 

하워드는 이 중하(重荷)를 진 채 그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다만 그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동안에 남 러시아 케르손에 있어서 역병에 걸려 막 죽으려는 때, 우연히 영국에서 그의 애아(愛兒)가 좀 개선의 조짐을 보였다는 길보(吉報)에 접했습니다.

 

그때 긴 잠들려고 하는 대자선가는 그의 얼굴에 미소를 가득히 지으면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임종하려는 아비에게 있어서 좋은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이 한 마디를 입 밖에 내고서 그는 천국에로 소천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수인의 아버지로서 불리는 사람의 나중으로서 비참의 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그러한 불행은 임할 것 아니다. 만약 임한다면 하나님은 곧 이것을 없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있음이, 하나님이 없이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라고.

 

하지만 하워-드 자신은 결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몸의 불행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더욱 더 두텁게 하나님을 믿고 그 지도하에 그의 사업을 진척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행은 그에게 있어서 도리어 선한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마음의 교만을 바로잡고 그의 자선의 진순을 보존했습니다.

 

그는 또 이에 의해 세상의 허다한 불량아를 가질 어버이(부모)에 대하여 심후한 동정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 그로 하여금 언제나 겸손케 하여 그에게 끊임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의 생애의 실험을 쌓는데 따라 그는 이 불행이 그의 몸속에서 제거되지 않는 깊은 이유를 깨달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에게서 없이 할 수 없었던 것 아닙니다.

차고 넘치는 은혜를 그에게 주시어 그로 하여금 이에 이기고도 남음이 있게 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입니다.

 

불행을 없이하여 주는 것만이 길이 아닙니다.

이에 이기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은 불행을 없이하여 주시는 이상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하워드 같은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몸의 불행이 도리어 자기를 유익하고 남을 유익케 하는 기회로 된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미국 태평양 샌프란시스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스탠퍼드 대학은 그 신식인 것과 설비의 완전한 것에 있어서 세계 제1로 불리는데 그것도 또한 불행의 소산이라는 것은 사람이 잘 아는 바입니다.

 

그 건설자는 칼리포니아주 선출의 상원위원 스텐퍼드로서 그는 그 외아들을 잃고서 견딜 수 없는 비애를 고치는 길로서 여기 그의 전 재산을 던저 이 대학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사업은 달리 몇 가지나 있습니다.

 

많은 병원은 이같이 하여 세워졌습니다.

많은 고아원이 아들을 얻고자 하여 얻지 못한 결과로서 나타났습니다.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불행, 환난을 내려주시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있는 자선 사업의 대반은 없었으리라는 것을.

여기에 불멸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 불멸을 아는데 내세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이것을 충분히 금세에 있어서 실험할 수가 있습니다.

 

대불행에 조우하여 쓰러지지 않고 이것을 화하여 자타의 행복으로 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다수의 사람에 의해 시험 된 능력입니다.

누구나가 가지지 않으면 안 될 능력입니다.

 

*내촌감삼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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