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2
성 경: [삿 13:19-25]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20)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2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22)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23)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24)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삿 13:19]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 - 일전에 기드온은 번제로 '염소 새끼 하나와 무교 전병과 국'을 취했던 적이 있다.
(6:19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그런데 마노아가 바친 소제물도 아마 기드온이 바친 것과 유사한 종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제물로는 발효된 식품과 꿀이 섞인 것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 2:11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따라서 마노아의 소제물은 본문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화덕에 구은 무교병이나 기름 바른 무교전병이었음에 틀림없다.
(레 2:4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병을 드릴 것이요).
▶ 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 여기 사용된 '이적'이라는 용어는 역시 앞 절의 '기묘'를 뜻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지닌다.
따라서 본 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자의 행동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할 만큼 놀라왔다'로 된다.
이 이적의 내용은 20절에 묘사되어 있다.
(20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이적은 잉태하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들을 낳게 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24절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또한 역사상의 이적에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동정녀 탄생,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의 성육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의 부활, 등
(마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고전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문학적 비유 내지 신화가 아니라 엄연히 역사상으로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인 것이다.
오늘날 합리주의를 숭배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성경에서 초자연적 요소들을 제외시키고 다만
자유, 평화, 헌신 등과 같은 소위 '예수의 정신'만을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코자 하는 지극히 불순한 행위이다.
(롬 10:6-7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삿 13:20]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 혹자는 19절을 근거로 하여
(19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마노아가 번제물에 불을 붙였으며 다만 하나님의 사자가 그 불꽃을 타고서 하늘로 올라간 것이라고 주장한다(Goslinga, Cundall).
그러나 19절에는 마노아가 번제물에 불을 붙였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따라서 기드온의 경우에서와 같이,
(6: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이번에도 하나님의 사자가 이적으로 번제물을 태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Keil).
이때 나온 불은 더러운 것을 태우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암시한다.
(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또 이 불은 제물을 태우면서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제사를 열납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꽃을 타고서 여호와의 사자가 승천(昇天)한 것은 그가 마노아 부부와 관련된 일을 모두 마치셨음과 또한 그 자신이 정작 하나님이셨음을 시사해 준다.
▶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 이러한 표현은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 17: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수 5: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단 8:17 그가 나의 선 곳으로 나아왔는데 그 나아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
겔 1:28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3:23 내가 일어나 들로 나아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 머물렀는데 내가 전에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영광과 같은지라 내가 곧 엎드리니;
43:3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44:4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을 통하여 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대).
즉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제서야 자기들과 대화한 사람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던 것이다.
[삿 13:2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
마노아 부부가 자신들에게 나타났던 사람을 '여호와의 사자', 즉 하나님으로 인지한 것은
(22절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번제단 이적 사건으로 인해서이다.
(20절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그런데 본 구절은 마치 그 후 여호와의 사자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므로 인해 그때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후의 사실을 추가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더욱 더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이었음을 확증하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인식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삿 13:22]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 죄악에 물들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경우에는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출 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따라서 이사야도 여호와의 영광을 뵈온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부르짖었으며,
야곱과 기드온도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기 때문에 죽을 줄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6:22-23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피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을 터 놓으신 것이다.
(히 9:14-15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