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전후서 서설(序說)
베드로전서
[영] Epistles of Peter(The First Letter of Peter)
[독] Briefe des Petrus
[불] Epitres de S. Pierre
신약성서 중의 1서. 공동서간에 속하고, 전후(前後)서로 되어 있다.
1. 본서의 저자 -
편지 처음에 ‘사도베드로’로 명기되어 있고, 또 저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증인’(5:1)임을 말하고 있다.
베드로의 이름을 들어 이 편지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최초의 사람은 소아시아 신학의 대성자인 교부 이레나에우스(Irenaeus 130경-200경)인데, 2세기 말 본서의 저자는 베드로임이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에는, 베드로의 저작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문점이 지적되고 있다.
(1) 이 편지의 그리스문은 뛰어나 있고, 구약성서에서의 인용은 그리스어역 (칠십인역 Septuaginta)에 의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무학자)’(행41:3)이라 불리우고, 아람어(→8권 238)를 모어(母語)로 하고 있었다는 것.
(2) 이 편지의 용어 및 사상에는, 바울 특히 로마서의 그것과의 유사함이 보이는데,
즉 ‘그리스도 안에서 ’(3:16; 5:10, 14 기타 4:1=롬6:7; 4:10, 11=롬12:6, 7; 2:13-17=롬13:1-7), 바울과는 반드시 입장을 같이 하지 않고, 더구나 자신이 사도였던 베드로가 바울의 영향을 그렇듯 강하게 받았으리라고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3) 사도의 편지로서는 예수의 회상이 부족하다는 것.
(4) 독자들은 본격적인 박해를 받고(4:14, 16), 그 박해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는데(5:9),
그러한 박해는 네로황제(Nero)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후64) 보다도, 도미티아누스 황제(후81-96), 또는 특히 플리니우스의 편지(Pliny's letters)와의 관련에 있어서, 트라야누스 황제(후98-117)의 치세의 박해에 부합하며, 베드로의 순교는 64년경이므로, 연대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
(5) 또는 ‘피 뿌림’(1:2), ‘다시 남’(1:3, 23) 등의 관념은 그리스의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와의 관련을 보이고, 율법에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은 유대인인 베드로에게 알맞지 않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필기자 실루아노는(5:12), 바울의 글의 필기자인 사도행전 중의 실라와 동일인물로 생각되고,
헬레니즘 세계의 사람으로(행16:37, 38), 그리스어에 정통한데다, 또 바울과 친한 사이었으므로(행15-18장, 고후1:19; 살전1:1; 살후1:1→실루아노→실라), 이 실루아노의 등장에 의해 의문점의 (1),(2)는 해소될 수 있다.
의문점 (2)는, 베드로와 바울과의 배후에 원시 교단의 공통의 전승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실루아노의 역할에 중요성을 지나치게 두면, 실루아노 저작설에 기울어지는 결과로 되고, 또 실루아노를 꺼내 말하는 것은 베드로를 저자로 하는 것의 모순을 혼동케 하는 고안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
박해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박해와 본격적인 박해와의 구별이 어느 만큼 엄밀하게 될 수 있느냐에 대하여,
또 순교에 관한 기술이 없는 것이라든가 국가권위에 대한 온전한 태도(2:13-17)가 보이고 있는데 대해서도 고찰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2:13-17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또 예수의 회상도 개무하지는 않다(1:8; 2:12; 22-24; 2:9, 14; 4:1, 14; 5:7).
의문점 (5)도 결정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대체로 베드로설 부정의 입장도 강력하나, 베드로설을 주장하는 것도 적지 않다.
베드로설을 부정하고, 베드로의 감화를 받은 유력한 전도자를 말하는 때에는, 저자로서는 실루아노가 유력한 인물로 되는데, 그 경우에는 실루아노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던 바울의 이름이 아니고, 베드로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어찌해서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2. 본서의 독자 -
이 편지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감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거류하는 사람들’(1:1)에게 보내져 있다.
이들 지방은 남부를 제외한 소아세아의 대부분(5주)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이중 갈라디아와 아시아는 바울의 선교지역이었다.
다른 지방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우스(소 Plinius 61/62-114경 로마의 정치가)가 로마황제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편지는, 112년경, 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Domitianus 재위 81-96)의 치세에도, 그 지방의 그리스도 신도들이 박해를 받은 것을 전하고 있다.
베드로의 편지는 이들 지방의 교회에 보내진 회장으로 추정된다.
‘흩어져 거류하고 있는 사람들’은 본래는 유대 본국을 떠나, 이국에 산재하는 사람, 즉 디아스포라(Diaspora)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지상의 나라를 천상에 나라에 대한 이국으로 보고, 상술의 지방에 거주하는
그리스도 신도 일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2:11; 빌3:20; 히11:13).
그들의 다수는 이방인 인 듯하고(1:14, 18; 2:10; 4:3), 또 입신 후 얼마 되지 않은 신자였을지도 모른다. (2:2, 10; 3:21; 4:2-4).
3. 본서의 집필 시기와 장소 -
베드로 저작설을 취하면, 집필의 때는 베드로의 순교(후 64년경)의 조금 전으로 된다.
독자들이 박해받은 때를 도미티아누스황제의 치세 중으로 보면, 저작 연대는 90-95년경,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시의 사건으로 하면, 2세기의 초엽으로 된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에서’(5:13)라고 있는데, 바벨론은 유대의 묵시문학에 있어서 로마의 이명으로서 씌어지고, 원시교회가 그것을 이어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계14:8; 16:19 기타참조).
집필의 장소가 로마인 것은, 베드로가 만년을 로마에서 보내고, 그곳에서 순교했다는 고대의 전승 및 베드로와 마가와의 관계(5:13; 몬24절)와 부합한다.
베드로 저작설을 부정하는 경우에는, 로마교회가 이 편지의 작성에 관여했다고 보는 설도 있는데, 이 편지는 로마교회와 관계가 있는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Canon 현존하는 최고의 신약성서 목록표)에도 빠져 있고(사본의 파손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로마는 베드로와 관계가 깊기 때문에 도리어 위작적인 조작으로서 의심될 가능성도 있어서, 시리아(수리아)설 및 소아시아설이 제창되고 있다.
4. 본서의 집필의 사정과 목적 -
독자들은 로마 관헌에 의한 박해의 고난에 직면하고 있었다.(1:6; 2:15; 3:14, 17; 4:12, 14, 16; 5:9),
저자는 박해가 가열을 더하려는 위급한 사태를 추찰하여, 독자들에게 다시
복음의 진리(1:3-5, 18-19; 2:9-10, 21-25; 3:18; 5:10)와
종말의 희망(1:7, 13; 4:7, 13; 4:7, 13; 5:4, 10)을 다시금 재확인케 하고,
박해 중에서 신앙을 지키며(1:7, 13; 2:19; 3:14; 4:7, 12-13, 19; 5:7-9),
올바른 생활을 영위케(1:14, 15; 2;12-3:9), 또 더 나아가
신앙의 증거를 하도록 격려 권면(2:15; 3:2, 15-16)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다.
5:12에 집필의 목적이 명기되어 있다.
(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또 1:3-4:11을 침례의 설교로 해석한다면, 이 부분은 새 입신자를 특별한 대상으로 하여, 그들이 침례에 있어서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존귀함과 그것에 부응한 생활의 책임을 가르치기 위해 집필된 것으로 된다. 또 이 편지 전체를 예배의 문서로 보는 설도 있다.
*‘사사기’공부의 대단원을 끝내고 오늘부터는 신약성경에서 ‘베드로 전후서’공부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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