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신자와 그 희망
베드로전서 1장 1-5절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이제는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어느 것이 그 순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때에 있어서, 원시(초대)에 이것을 말한 사람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극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 목적 위해 가장 적당한 것은 베드로전서이다. 베드로 자신 깊은 학문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전하는 바는 단순하고 평이했다.
그러므로 한번 독자의 마음을 당시의 신자의 입장에 둘 것인가?
쉽게 이것을 해득할 수가 있다.
특히 처음으로 신앙에 들어선 사람들(크리스천)이 가장 애독할 것은 본서이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이것을 성차지 않게 여겨, 떠나 바울에 가는 자 많다 해도, 처음으로 예수의 복음을 해득한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베드로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혹은 베드로가 바울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 있대도, 그것은 오늘 바울이 쓴 것만 많이 잔존하는데 기초하는 오해이다.
최초의 신자 사이에 있어서 가장 존경된 것은 베드로였고, 바울도 또 그에게 힘 입는바가 많았던 것이다.
저 갈라디아서에 있어서, 바울이, 베드로에게도 가르침을 받은 바 없다고 주장하는 그 말이, 곧 베드로가 교회의 주석(主席)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울처럼 속죄, 율법 등의 논전을 하지 않고, 단도직입 사람의 직감에 호소했던 것이다.
그가 서간의 발단에 있어서 자기를 소개하는 말은 아주 간단하다. 이르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라고.
그는 바울처럼 몹시 길게 자기의 특권을 서술치 않았다.
겸손한 베드로!
예수 재세(在世)의 당시는 무슨 일에 있어서나 나서서 자기를 수위(首位)에 두기를 바라고, 또 두텁게 자기를 믿어,
‘옥에라도, 죽음이라도, 주와 함께 마음을 정했나이다’(누가복음 22:23 일역)고 한 저 베드로는,
계명(cock's crow) 3회의 쓴 경험에 의해, 마침내 전혀 자기를 믿지 않는 가장 겸손한 사도로 되었던 것이다.
서간의 수신인(address)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거류하는 자’(일역)였다.
본도(폰토스) 이하의 다른 주는 오늘의 아시아 터키의 북반부로서, 본래 아주 풍요한 땅이다.
그리고 그 지방에 ‘흩어져 거류하는 자’, 즉 diaspora란 고유명사이다.
유대인에는, 본국에 잔류한 자 있었다. 국외에 산재한 자 있었다.
그 후자를 일컬어 diaspora란다.
그 수, 오늘 약 천이백만으로 일컬어진다.
본국에 있는 자는 극히 소수이다. 그리고 당시 바울은 이방인에 대한 전도자였고, 베드로는 유대인 위한 사도였다.
베드로 전서는 그 유대인중의 국외 거주자에게 보내진 서간이다.
마치 오늘 도쿄(동경)에서 서간을 보내, 캘리포니아, 오레곤, 아이다호, 네바다의 제주에 산재한 일본의 신자에게 보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신자의 정의를 주어 말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 복음에 복종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뿌림을 입게 하시려고, 그 미리 아시는 바에 따라 영의 성결로서 택하신 사람들’(2일역)이라고.
말은 길지만, 모든 신자가 당연하게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어떠하신 신임을 물을 것 없이, 모두 자기와 인연 먼 자, 가까이 할 수 없는 이로 사유하던 때에 있어서, 하나님은 다만 구주이실 뿐 아니라 또 우리들의 아버지라는 제창은 놀라운 복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받게 하시려고’(출애굽기 24장 참조)라는 것은 구약의 말씀이다.
모세, 광야(황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피를 뿌리고,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 됨의 표로 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신자에게 뿌려지는 피는, 소, 양의 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이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감의 특권을 받은 자가 곧 신자이다.
‘미리 아시는 바에 따라 택하시고∼’ 이는 이른 바 예정이다.
하지만 예정이란 신학상의 이론은 아니다. 신앙상의 실험이다.
그리고 이것을 신앙상의 실험으로 알 때, 신자는 누구도 예정을 의심치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하던(피하던) 죄의 자녀가 하나님께 순종하기에 이른 그 시초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넘어서 함부로 취마(추단 interence) 억측(speculation)하는 것은, 우리들의 할 일은 아니다.
우리들은 다만 하나님의 성지(聖旨)에 의해 성도로 된 것을 믿을 뿐이다.
다음으로 주의할 말은 ‘영의 성결로서∼’이다.
성결인가, 성별인가, 이는 또 신학론으로서 지식적으로 해석할 것 아니다.
그리고 신앙의 실험으로서 이것을 해석하는 때는, 그 의미는 명백하다.
즉 성별은 단지 성별만으로서 끝나지 않고, 이것을 나눔과 함께 반드시 성결은 시작된다.
하지만 성결은 또 완전한 성결이 아니다. 독소는 아직 마음 속(심안)에 유류(leave behind)된다. 성결의 완성은 신체의 구증의 때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란 무엇인가?
침례를 받은 자인가?
교회에 출입하는 자인가?
아니, 베드로는 말한다.
‘하나님의 성지와 영의 성결에 의해 택정 된 자, 이는 곧 신자이다’라고.
이로써 이것과 저것과의 관념을 알 것이다.
그리하여 2절로서 인사의 말은 끝나고, 3절에서 송영의 말씀이 시작된다. 이르기를,
‘찬양하리로다, 하나님,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하나님은 만인의 아버지라는 것은, 근대인의 사상으로서 또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사상이었다. 그렇지만 초대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신자는 그리스도의 종인 까닭에, 또 그의 아버지를 자기의 아버지로 부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들의 아버지이심은, 그가 먼저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때문이다.
‘그가,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나게 하사’(3상 일역)란, 앞에서
‘미리 아시는 바에 따라 택하시’었다고 함과 한 가지로,
하나님의 애심에 의해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생명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언가?
이르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산 소망을 얻게’(3하 일역)하신 일, 이것이다.
‘산다’하고, ‘소망’(희망)이라고 한다. 모두 베드로 특애의 말이다.
세상에 ‘죽은 소망’이라는 것이 있을까?
본래 그러한 말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은 극히 많이 있다.
모든 달성될 수 없는 소망은 모두 죽은 소망이다.
청년에게 이것 있다. 노인에게 이것 있다.
사람이 가진 범백의 희망은 거의 이는 죽은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있어서,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주어지는 희망만은,
반드시 성취될 산 소망이다.
이 희망을 가질 때, 사람은 온전히 과거의 불철저한 생애를 버리고, 전도에 확실한 목적을 정할 수가 있다.
배가 그 진로를 정하고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는 것 같이, 신자로 하여금 그 부동의 목표에 향하여 곧바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로 이 희망이다.
이는 모두 실험으로서만 해득할 말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다시 그 희망을 설명하여 말했다.
‘또 우리 위해 하늘에 간직해 둔 것 있다.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으며, 쇠하지 않는 사업(분깃)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4일역)라고.
‘다시 난다’하고, ‘산 소망을 얻게 한다’고 하며, 그리고 또 이렇게(4절 같이) 말한다.
전언을 되풀이하면서 깊이 의의를 첨가하는 것은, 이는 히브리인 특유의 문체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성지에 의해 선택된 그 목적은, 지금은 감추어져 있는 영구한 영광을 후에 얻게 하렴에서 라고 한다.
초대 신자의 신앙은 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커다란 은혜임과 함께 또는 크신 약속이었다.
그들은 현대인 같이 ‘현생’(이 세상의 생애 this life)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의 부활에 의해 아버지에게서 약속된 미래에 받아야 할 큰 은혜를 대망했던 것이다.
대망을 떠나 그리스도교의 신앙 없다.
신자가 특별히 우아함은, 그 대망의 태도에 있는 것이다.
약속의 성취를 대망하는 일 그것(사)이 큰 특권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취의 날이 속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참으로 아버지를 믿는 아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기다려지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10년 가하다. 100년 가하다. 500년 가하다, 아니, 천년을 하루같이 보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우리들은 무덤(분묘 tomb) 속에서 대망하는 일 1만년이라 해도, 조금도 길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1918년 3월 ‘성서지연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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