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7일 금요일

신도(神道)와 인도(人道)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

 

-신도(神道)와 인도(人道)-

베드로전서 122-25

 

너희가, 이미 성령에 의해, 진리에 복종하여, 영혼을 정결히 하고,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정결한 마음으로서 서로 열렬히 사랑하라, 너희가 다시 난(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즉 한없이 보전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산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대저 사람은 모두 풀과 같다.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그 꽃은 떨어진다. 하지만 주의 말씀은 한없이 보전된다. 그리고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은 곧 이 말씀이다‘ (베드로전서 1:22-25. 일역)

 

크리스천은 어떠한 자인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자이다. 하지만 자기의 수양 노력에 의해 사랑하는 자는 아니다.

 

성령에 의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영혼을 정결히 함을 입은 결과로서, 그렇게 형제를 사랑할 수 있기에 이른 자이다. 크리스천의 특징은 여기에 있다.

거짓 없이, 즉 사심과 악의를 섞는 일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이다.

 

이 사랑이 없이, 다른 것은 무엇이 있대도, 크리스천은 아니다.

사상 있고, 신학설(新學設) 있고, 기적을 행하고, 병을 치유 받은 실험있다 해도,

 

이 거짓 없이, 정결(순결)한 사랑이 없이, 그는 크리스천은 아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대로이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에 의해 이미 죽음에서 나와, 생명에 들어간 것을 안다’(요한제I3:14일역).

 

크리스천이 된 확증, 확실히 구원된 증거는 여기에 있다.

거짓 아닌 순결한 사랑 없는 곳에 참된 그리스도교는 없다.

 

열신(熱信) 있고, 신학 있고, 활동 있고, 넓은 성서 지식 있고, 기적 있고, 병을 고치는 능력 있대도,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 없는 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은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 먼저 제1로 할 일은, ‘순결한 마음으로서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들이 크리스천인것을 자각하고, 또 이 일을 세상에 보이는 길은, 이것을 두고 달리 없는 것이다.

 

너희가, 만약 서로 사랑하면,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을 알 것이다’(요한복음 13:35 일역)라고 있는 대로이다.

 

바울도 또 가르쳐 말했다.

 

너희는,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율법을 온전히 이루라’(갈라디아서 6:2일역).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의 진리라 하고, 우주 유일의 교()라 하며, 만세 불후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순결하고 거짓 없는 사랑을 말하되,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행하게 하는 때문이다.

 

너희가 다시 난(거듭난) 이라고 함은,

너희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함과 같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에 의해, 이미 죽음에서 나와, 생명에 들어간 것을 안다.

 

재생이란, 특별히 신비적인 일은 아니다.

실제로 목격하고, 또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 크리스천에게 이 재생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썩지 않을 씨, 즉 한없이 보전되는 하나님의 산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 사랑을 말하여 사랑을 일으키게 하는 바의 복음, 이것은 썩지 않을 씨, 즉 원리(영어로 역하여 말한다면 prineiple), 그리고 한없이 보전되는 것, 세상과 함께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또 하나님의 산 말씀이다.

 

그저 우아한 완미(음미 appreciation)할 진리는 아니다. 활동하는 진리이다.

사람과 사회와의 대변화를 일으키지 않고서는 맞지 않는 진리이다.

 

한없이 보전되어 활동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복음의 진리이다.

 

이 말씀, 이 진리에 접하여, 우리들 크리스천은 재생의 기적을 본 것이다.

 

즉 영혼을 정결히 한 바 되고,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어, 죽음에서 나와서 생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는 이 같은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말()는 어떤가?

사람이 주창하는 주의 주장은 어떤가?

철학자의 철학조직은 어떤가?

사회주의자의 사회개조설은 어떤가?

이른 바 신도덕, 신종교의 운명은 어떤가?

 

대저 사람은 모두 풀과 같다.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오랜 것은 없다. 잠시의 생존이다. 드디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혹은 10, 혹은 30, 50년 길어서 100, 또는 200, 이것을 한없이 보전되는(영원한) 주의 말씀에 비교하여 보면, 실로 근화 일조의 꿈이다.

 

옛것은 두고서 물을 것 없이, 새것에 대하여 보라.

 

서양 외래(박래)의 신주의로서는, 니체주의, 윌슨대통령의 신 데모크라시(democracy), 끄로뽀낀(크로포트킨 knopokin 1842-1921. 러시아의 지리학자, 무정부주의자)의 공산주의, 카를 마르크스(13339 마르크스 참조)의 자본론, 그리고 우리나라(일본)에 생겨난 여러 가지 잡다한 신종교, 흑주교, 금광교, 천리교(423역주),

 

이들은 모두 풀처럼 나서, 풀의 꽃처럼 떨어지며, 또 떨어 지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는 나까에 쵸우밍(중강조민 1847-1901 일본의 사상가) <1년 유반>을 저술하여, 무신, 무영혼을 주칭하여 낙양(수도)의 지가를 높이었다. 그러나 오늘 누가 이 글을 읽으려 하는가. 이 글()의 운명은 그 제목처럼 1년 유반으로 그쳐버린 것이다.

 

또 제국대학 총장 문학박사 가또우히르유끼(가등홍지 1836-1916929)씨는 <일본국의 국체와 기독교>를 저술하여, 이 교를 욕하고, 또 조소하며, 싸움을 그리스도교도에게 걸어, 그들의 간담(심담 heart)을 서늘하게 했다.

 

마치 블레셋의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싸움을 건 것 같아, 천하 이에 당하는 자 일인도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떤가? 누가 이 글()을 읽는 자가 있는가? 저자의 이름마저 이제는 잊혀지려 하고 있지 않는가?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한창 팔리고 있다. 인쇄하고 또 인쇄해도 세상의 요구에 응할 수가 없다.

 

가또우 박사(가등박사)가 음부 마리아가 낳은 사생아라 주창한 예수의 이름은, 일본국에 있어서도, 인류 최고의 이상의 대상으로서, 더욱 더 높여지고 있다.

대저 사람은 모두 풀 같다.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 같다’.

 

대문호, 대박사의 저서도, 옛 성서에 비해 보면, 잠깐의 나팔꽃(morning glory), 실로 덧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두려워하랴 이다.

 

대본교 또는 대영도 또 신일련주의(2208 니찌렝),

이것 역시 영원한 하나님의 산 말씀과 그 영광을 겨를 수 있으랴?

 

진리를 가려 판단하는 것은 서간이다.

 

시간은 오늘까지, 모든 사람의 도를 묻어버렸다. 때에 초월하고 때에 이길 수 있는 것은,

 

다만 한없이 영원한 하나님의 산 말씀,

 

우리들의 손에 있는 성서에 보인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뿐이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동하지 말라. 우리들은 이 말씀을 지켜 우리들의 신앙을 온전히 할 것이다.

 

이것은 전 세계에 걸쳐, 과거 천년간의 오랜()동안, 인류 역사의 중심으로서 그 존재 발달을 계속하여 온 것이다.

 

이것만이 영원한 반석이시다.

 

내촌감삼의 (192010성서지연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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