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1일 화요일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예배에 두건(頭巾)을 쓰는 문제

 

성 경: [고전 11:1-16]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6)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본절을 10장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2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문맥상 본절은 10:3과 상관성(相關性)을 갖는다.

 

(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바울은 8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본받는 그리스도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모델로서 그분의 삶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

 

(2:4-5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러나 그리스도나 바울의 삶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었다.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전 11: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

 

바울은 본절에서 부터 새로운 주제를 논하고 있다.

유전 - '유전'(파라도세이스)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가르침으로서, 관습과 교훈은 물론 교리를 포함한다.

 

(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살후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이것은 바울 자신의 교훈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복음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유전'은 교리보다는 구전(口傳)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준 교회의 관습을 의미한다(Godet, Meyer).

 

왜냐하면 이후의 본문들이 여자가 공동(共同) 예배(禮拜) 때에 두건(頭巾)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를 칭찬하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경고와 질책의 말을 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과 교훈을 잘 지킨것에 대해 칭찬의 말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깊은 상처 없이 자신의 권면을 받아들일 수 일도록 하였다.

 

이것은 바울서신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를 증거하며 아울러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세심한 배려를 잘 보여준다.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 모두가 바울이 전한 유전을 지킨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비판받을 점이 있었다.

그것은 여자들이 공예배 때에 남자와 동등하게 두건을 쓰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졌다 할지라도 이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창조 원리를 통해서 논증한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 바울은 교회에서 공예배시 여자들이 머리에 두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 논증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세 단계의 질서이다.

 

본절에서 '머리''권위'를 의미하며, '유기체적인 복종'을 암시한다.(Edwards, Morris, Meyer).

 

그리고 각 질서는 연합(union)에 의한 관계성을 나타내는데, 그 관계성은 교회의 질서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첫째 질서는 그리스도와 남자의 관계인데, 그리스도는 믿음을 통한 연합에 의해서 남자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그리스도와 남자의 연합 관계의 근거이다.

 

둘째 질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인데, 남자는 결혼이라는 연합을 통해서 여자의 머리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결혼 사상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 즉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랑과 복종'의 관계로 설명되고 있다.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3:18-19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며, 아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속이 남편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차이가 없다 할지라도,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지상의 다른 관계들, 즉 주인과 종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섭리 아래에서도 여자의 복종의 위치는 지속된다(Godet, Meyer).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존재 자체의 우열이 아니라 사랑과 화합과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 질서에 있어서 남녀 관계는,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지금도 존속(存續)하나 두 개체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격체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성()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

 

(20:34-36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셋째 질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인데, 하나님은 자신의 부성(Fatherhood)과 그리스도의 아들됨(Sonship)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신인(神人)이며 중보자(14:28;고전 3:23;15:24ff.)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머리가 된다.

 

(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고전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하셨다.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고전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15: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특히 본절에서는 세 가지 질서 중 그리스도와 남자와의 관계가 제일 먼저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가능케 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서로의 관계를 형성시키는 요체가 되기 때문이다.

 

 

[고전 11: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 - 본절에 나타난 기도나 예언이 행해지는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혹자는 가정 예배라고 하며(Bachmann, Hofmann), 혹자는 교회의 공적인 예배라고도 한다.(Grosheide, Meyer).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전자는 그 견해의 근거로서 8:1-11:1에서 가정 문제를 다루었으며 별다른 주제의 전환이 없으므로 2절 이후에도 가정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미루어 기도나 예언도 가정 예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절의 기도와 예언은 전체 교회를 위한 활동으로 공적인 예배에서 행해진 것이다.

 

(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4:3-4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더욱이 5절 이하에 나타난 본장 내용에서도 공적인 예배를 전제로 바울의 권면이 전개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의 공간적 배경은 공적인 교회의 예배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기도와 예언'은 본서 14장에서도 함께 나타나고 있는데, 거기서 기도는 방언을 말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다.

 

(14:14-17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서 말하는 기도를 방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Baur,Edwards).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 본절에서 '머리'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신체적인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다(Erasmus, Beza, Bengel, Meyer).

 

본절의 앞에서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라고 말함으로 신체적인 머리를 말하며, 5절에서도 같은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은유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로 해석한다(Hofmann, Maier, Osiander, Ruckert).

 

3절에서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본절에서 머리를 그리스도로 해석하기 위한 선언이었다고 본다.

 

이 두 견해는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머리에 수건을 쓰는 상징을 헬라 관습처럼 이중적인 알레고리(allegory)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교회 질서 속에서 남자에게 여자에 대한 주권을 부여했는데, 만약 남자가 여자에 대한 순종의 상징인 수건을 머리에 쓴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체적인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또한 신체적인 머리를 부끄럽게 한 남자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주권을 부여한 영적인 머리 즉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고전 11: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

 

바울은 본절에서 여자가 공예배시에 수건을 써야 하는 이유를 당시 관습을 통해서 논증하고 있다.

 

여자가 공예배에서 머리에 무엇인가를 쓰지 않으면 머리를 민 것과 같다는 것은 당시 헬라 여인들이나 유대 여인들에게 있어서 긴 머리는 여성다움을 표현하는 장식과 같은 것이었으며 짧은 머리는 매춘부와 같은 부도덕한 사람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Grosheide, Meyer)

 

여기서 긴 머리는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과 동일시된다고 본다.

 

(15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고전 11:6]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

 

본절은 5절에 대한 원인절로서 여자가 공예배에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본절에서 바울의 권면은 당시 기존 관습과 상식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 범주 안에서 공예배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당시 기존 관습에서 여자가 머리가 짧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 애통이나 슬픔을 표시할 때이다.

 

(21:12 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2) 조신(操身)하지 않거나 간음의 죄를 범했을 때이다.

 

그래서 매춘부는 짧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본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짧은 머리는 여자의 수치였다.

 

반면에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 사이에서 긴 머리는 여자다운 우아한 장식으로 여겨졌으며(Meyer), 여자의 권위와 명예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바울이 당시의 기존 관습을 인정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한 나라의 관습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을 때 그 관습이 인정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고전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본절에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 써야 하고, 남자가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창조 질서에서 찾고 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하셨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이 땅을 다스리는 주권을 주셨다.

 

(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形狀)'이라 함은 여러 의미를 갖지만 그 중에 하나는 자연에 대한 사람의 '주권'을 포함한다.(Edwards,Godet).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의 절정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다(8).

또한 남자가 '하나님의 영광'이라 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남자는 창조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위엄을 세상에 드러내며 그를 존귀케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처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적 지위를 소유하고, 창조주를 세상에 밝히 드러냄으로 존귀케 하는 존재인 남자가 '순종의 표'인 수건을 쓴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벗어남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며 '마땅히'라는 말을 사용한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 본절은 여자가 당시의 습관대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다.

 

여자가 수건을 쓰는 것은 자신의 정절과 순결, 그리고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 남자를 존귀케 하며 또한 자신을 성별(聖別)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고전 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 본절은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라는 논증에 대한 근거로서, 여자의 기원을 말한다.

 

'에게서''기원'이나 '근원'을 의미하는 전치사로서, 아담의 갈비뼈를 통한 여자의 창조를 암시한다.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고전 11: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 본절은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을 진술하고 있다.

 

이 진술을 통해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씀으로 자신의 순결과 사랑의 복종을 표하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함을 시사한다.

 

2:20에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또한 창 2:18에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되어 있다.

 

물론 이 말씀들은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성(從屬性)이나 여자에 대한 남성 우위론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혼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주권을 발휘할 수 없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 주권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과 복종의 관계에 있을 때 온전하게 행사될 수 있는 것이다.

 

 

[고전 11: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

 

'이러므로'는 본절이 8, 9절을 전제로 이제까지 논증한 것에 대한 결론임을 나타낸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창조 때에 함께 일하였으며,

 

(38: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죄인들의 회개와 개종을 기뻐하며,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성도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138: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또한 천사들은 사람들을 섬겨서,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성도들의 삶과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실현되도록 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천사들을 인하여'는 선한 천사들이 예배를 지켜보기 때문에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도록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권세 아래 있는 표'는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엑수시아'가 되는 이유는 당시 헬라의 여자가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자신을 매춘부로 취급하는 것으로 여자로서의 권위와 존엄성을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여자가 자신의 머리에 이런 권세있는 표식을 함으로, 창조 때에 함께 사역하고 성도들과 함께 현존하여 예배를 지켜보는 천사들에게 창조 질서에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주며, 천사들을 예우(禮遇)함과 동시에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세울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다.

 

 

[고전 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제까지 바울은 창조 질서를 통해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며, 예배시에도 순종의 표인 수건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주 안에서 서로 하나인 것을 밝힘으로 여자의 지위에 대해 변호하고 있다.

 

그러나 - 이는 앞서 진술된 내용에도 '불구하고' 라는 의미이다.

비록 본질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순결과 복종을 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이다.

 

주 안에는 - 여기서 ''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Godet).

왜냐하면 12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그에게 복종하며, 그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뜻이며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라는 의미이다.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이제까지 논증한 여자의 순종성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본절은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게 구속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여자와 남자가 하나이며, 상호 의존적인 관계라는 사실의 근거를 제시한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 본문은 여자의 기원이 남자임을 말한다.

 

이것은 8절의 반복으로서,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되었음을 상기시킨다.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 본절은 여자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 사람의 '일반적인 출생 과정'을 말하고 있다(Morris).

 

이처럼 여자가 남자에게서 태어났고, 남자가 여자로 말미암아 태어났다고 하는 구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과정과 질서를 바울이 염두에 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설사 바울이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 할지라도 본절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서로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여기서는 의미로서 기원과 원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창조 질서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과정 속에서 창조되었다 할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두 존재의 기원은 결국 하나님이다(1, 2).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며, 동등하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

 

 

[고전 11: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

 

바울은 이제까지 여자가 하나님께 두건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한다는 논증을 마친 후, 이런 논증들이 틀렸는가를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판단하라고 권면한다.

 

'마땅하냐'의 의미는 바울 자신이 이제까지 논증한 것의 적절성과 타당성에 대한 것으로 당연히 수건을 써야 한다는 호소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음 절에서 여자는 긴 머리를 가지거나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인간의 본성(本性)이 말하고 있다고 제시하기 때문이다.

 

 

[고전 11: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바울은 앞절의 질문에 대한 반어적인 답을 주고 있다.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 고대 헬라 세계에서는 철학자들이 머리를 길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남자들이 긴 머리를 하는 예는 극히 부분적으로 행해진 일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의하여 자신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본성'(퓌시스)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본질에 대한 천성적인 감각과 인지를 말한다(Meyer).

그래서 남자는 본성적으로 긴 머리를 갖는 것이 부끄러운 일로 안다.

 

(2)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여자의 본래적인 신체 구조를 암시한다(Godet).

이는 15절에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을 때 남자가 긴 머리를 하는 것을 본성적으로 부끄럽게 느낄 뿐만 아니라 신체 구조상 긴 머리는 여자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긴 머리를 소유한다면 그것은 남자의 권위와 명예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나실인이다.

 

(6:5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44:20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

 

그들은 머리에 삭도를 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긴 머리는 하나님에게 구별된 존재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고전 11: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 긴 머리는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과 동일시되며, 그것은 하나님이 여자에게만 허락하신 권세이다.

 

여자가 긴 머리를 갖는 것은 본성이 아름답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남자와 구별된다. 또한 긴 머리나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여자의 권위와 존엄성을 나타낸다.

 

 

[고전 11: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 - '변론하려는'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기 위해서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바울이 이 말을 언급하는 것은 헬라인들의 국민적 특성인 변론이 무익하며 잘못된 습관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 - 단순히 '모든 교회'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라는 것을 부가하여 수식하는 것은 모든 교회들의 거룩성과 존귀함을 나타낸다.

 

이는 헬라인들이 교회의 관습에 대해서 경솔하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교회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 '규례'(規例)는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이제까지 바울이 공예배 때에 여자가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의 정당성에 대해 논증해 왔기 때문에 본절은 그런 논증의 결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