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6일 금요일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근친 상간의 죄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성 경: [고전 5:1-8]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 '음행'(포르네이아)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다른 사람의 육욕을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를 뜻하지만, 보편적인 의미로는 불법적인 성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심지어'가 본문 초두에 나와 있는데 이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미 벌어졌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본서에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1) 그들 가운데 음행이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2) 이 추악한 음행을 그들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부도덕한 성행위가 보편화되지 않고 일부 사람들에게만 행해지는 제한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범죄가 교회로 부터 정죄(定罪)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 속에 음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한 바울에게까지 소식이 들릴 만큼 그 행위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한편 '들었다''라는 소문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이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들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고린도 교회에 음행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글로에의 집 식구들에 의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Farrar)

 

(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뿐만 아니라 이것은 널리 퍼져 있는 사실이기에 여러 경로(소문)를 통해서 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Lenski)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 - 유대인의 율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18:8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22:30 사람이 그 아비의 후실을 취하여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지 말지니라)

 

이러한 율법의 내용을 알고 있는 바울이 구태여 여기서 이방인과 비교한 것은 더 이상 재고의 가치도 필요없는 아주 경멸스런 행위로 취급하기 위함이다.

 

당시 고린도 지방은 성적 문란과 방종으로 소문난 곳이었으나, 바울은 그 이방인의 문란보다 더 큰 죄악이라고 규정 함로서 자신의 분노를 반영(反映)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방인들은 이러한 범죄를 전혀 저지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본절은 당시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죄로 취급하는 추악한 행위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Calvin).

 

그 아비의 이내를 취하였다 - 바울은 이 사건을 '간통'이나 '근친상간'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고 하여 음행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어머니'라고 표현하지 않고 '아비의 아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그 음행이 최소한 '그의 어머니'(친모)와의 관계 속에서 빚어진 음행은 아닌 것 같다.(L. Morris).

 

사실 본문에는 그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 대상이 '아비의 아내'였다는 점과 '아내'로 번역된 헬라어 '귀나이카'란 뜻으로 '계모'(메트뤼이아)라는 말과 거의 뜻을 같이 하기 때문에 '아내'는 아버지의 첩이거나 의붓 어머니일 수 있다.(Farrar, Calvin)

 

한편 '취하였다'는 이 음행 사건이 단회적이지 않고 지금도 지속적(持續的)인 반복 행위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여기서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말은 계모와의 관계에서 성적 부정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전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 그들은 도대체 어떤 지식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방인들도 정죄하는 음행을 저지르면서도 원통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교만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이방인의 생활 습관을 미처 다 버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괴이한 악행 가운데서도 여전히 회개 할 줄 몰랐고 버젓이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F. W. Farrar).

 

그들은 음행 사건으로 인하여 적어도 수치스러워하며, 그들의 공동체 속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자신들을 되돌아보아 최소한 통한히 여기는 모습으로 주의 용서와 은혜를 구했어야 했다.

 

여기서 '통한히 여기지''죽은 자로 인하여 애통한다'는 의미로 죄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이 어떻게야 되는지를 나타낸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한 자유와 방종으로 인하여 죄악이 성행하게 되었다는 공동체적인 책임을 느껴야만 했다.

 

(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적인 책임은 고사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영의 사람이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육체적 일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또 다른 교만과 거짓으로 더 큰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이처럼 형제의 죄악을 보고 애통할 수 있는 사랑을 잊어버린 교회가 분열과 분쟁을 격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추악한 성적 타락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음행한 자에 대해 무관심 내지 방조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 가운데 있던 고린도 교인들을 크게 책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1) 그리스도인들의 연대적(連帶的) 책임성과 지체 의식,

(2) 무관심과 교만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는 범죄라는 점,

(3) 어떠한 죄악 가운데서도 회개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고전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 '떠나 있다'라는 표현은 그 의미가 매우 선명하다. 그는 지금 고린도 지방을 떠나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있다''곁에 있다', '가까이 있다' 또는 '왔다'라는 뜻으로 공관 복음서에서 '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11: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17:6에서는 '이르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17: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본절에서는 몸이 떨어져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은 그들과 '함께 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한편 ''이라는 표현은 바울에게 있어서 주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기서는 바울 자신의 ''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마음'(카르디아)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Farrar)

 

즉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와 영으로, 곧 마음으로 함께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아울러 본절의 심각성을 생각할 때 바울이 영으로 그들과 함께 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심정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 음행한 자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매우 단호하다.

 

그들을 향한 심판이 이미 선고되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이러한 표현은 판결의 순간에 그들과 함께 실제로 있었던 것과 같은 확실성과 자신이 함께 한 심판의 권위가 다시 번복(飜覆)될 수 없다는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고전 5: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

 

바울은 자신의 판단이 독단적이거나 판협된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그들이 스스로 모임을 갖고 자신들의 판단에 의하여 음행한 자들을 징계할 것을 촉구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 속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야 하며 그곳에서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하였다.

 

여기서 '예수의 이름''예수의 능력'

 

(1) 일차적으로 분열된 그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며,

(2) 이차적으로는 음행하는 자들을 추방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한편 '너희가 함께 모여서'는 그 일들의 결정을 위한 단회적 모임을 시사하며, 이 회집이 그리스도인들만의 회집임을 시사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예수의 이름과 능력(能力)이 함께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판단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설명하고 음행한 자에 대한 징계가 정당하고 합법적임을 증거하며 나아가 교회의 징계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Harris)

 

따라서 예수 안에서 자신의 영이 그들과 하나되어 이미 그가 판단한 것과 같은 판단을 내려줄 것을 바울은 기대하였다.

 

 

[고전 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 본절은 3절의 '판단하였노라'와 연결된 것으로서 연결의 엄숙한 조치를 가리킨다.(Deissmann).

 

다이스만은 '내어주다' (파라두나이)라는 단어를 이교도의 저주 의식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주장하여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가 저주의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어주다'라는 말을 꼭 이방인의 저주 의식에서 유래된 단어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바울은 이 단어를 범죄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으로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Lenski)

 

따라서 바울은 교회가 책임있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그러한 자들을 출교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13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이러한 표현은 딤전 1:20에도 나타나는데,

 

(딤전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그들의 출교는 일차적으로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성도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고린도 교회의 순결한 영혼들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 우리는 본절에서 중요한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보호하심 아래 머물러 있는 반면, 교회 밖은 그리스도의 지배하심에서 떠난 사단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Calvin).

 

따라서 출교는 사단에게 내어주는 멸망의 극단적인 조치로서 그들에게 있어서는 제일 큰 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토록 극단적인 조치가 취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들 가운데 있는 음행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이라는 것을 반영해 준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 이 구절은 해석상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육체의 죽음을, 속죄받지 못한 죄들을 속죄하는 수단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 이와 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영과 육이 따로 분리되어 구원받거나 멸망받는 일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둘 다 구원받든가 둘 다 멸망하든가 해야한다.(Lenski).

 

특히 바울은 다른 모든 구절에서 속죄는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본절의 육신의 멸망과 영의 구원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칼빈(Calvin)은 전반부에 등장하는 '내어준다'라는 말의 법정적, 선언적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는 일시적(一時的)인 것으로서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에 선행하는 임시 조치라는 뜻이다.

 

음행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교회의 심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하여 그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된 사랑의 원리인 징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그들에게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또한 올바른 징계를 행함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

 

한편 바울은 '주 예수의 날'이라는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그 징계받은 죄인들을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목적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징계는 범죄한 영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유기가 아니라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일시적 고난이며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본절은 특히

 

(1) 범죄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의 소치로서 그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며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타락케 만드는 범죄라는 사실과

(2) 참된 징계의 정신은 사랑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교훈해 준다.

 

 

[고전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 '자랑하다'는 자랑하는 표면적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내용을 의미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그들 교회가 분열과 음행으로 가득찬 교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가졌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그 사랑과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은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은사를 죄악을 묵인하는 곳에 사용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곡해하여 죄악을 용납하고 그들과 더불어 죄악에 빠지는 것에 사용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죄악의 행위를 묵인하는 것이 그들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L. Morris).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누룩은

 

(1) 그리스도의 복음,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13: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2) 죄를 의미할 때도 사용되었다.

 

(12:15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여기서는 죄악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본문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누룩, 즉 죄악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은 새로운 존재임과 죄악의 파급적인 영향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살전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즉 바울은 그들의 자만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누룩'이라는 하나의 실례를 들어 증명한다.

 

누룩은 아주 작은 미량의 효소로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반죽 덩어리를 발효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력은 더욱 왕성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교회 내의 범법자는 처음에는 그 이웃을 감염시키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 전체를 부패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은사에 비하여 악의 요소인 누룩이 작아 보였기에 자만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 앞에 닥친 위협은 결코 작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교회의 순결성(純潔性)을 유지하는 일이다.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기 전의 타락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특별히 바울은 '누룩 없는 자이어야 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누룩 없는 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의 표현은 그들이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 자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신분임을 상기시킨다.

 

(4: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만약 그들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었다면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누룩없는 상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인 상태로서 그들이 다시 묵은 누룩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분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 하반절은 헬라어 원문에서 '가르'로 시작하는데 '왜냐하면'의 뜻을 가진 '가르'는 왜 묵은 누룩을 버려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와 그들이 어떻게 누룩 없는 자가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암시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희생양이 되셔서 그들의 백성의 죄를 다 도말하셨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들을 멸망으로부터 이끌어 내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주셨다.

 

바울은 누룩으로 시작된 비유를 유월절의 무교병과 유월절 어린 양이라는 또 다른 비유의 의미에 연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성취된 무교병에 참여한 자들은 더 이상 누룩있는 떡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Lenski).

 

 

[고전 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

 

칼빈(Calvin)은 이 구절을 '영적(靈的)인 유월절을 지키자' 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새로운 유월절의 개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만찬에서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나누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다시 범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새로운 명절에 참여한 자들은 옛 습관의 죄악된 누룩을 가지고 새 덩어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새 명절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룩이 아니라 순전함과 진실함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적인 생활이다.

 

한편 '순전함'은 동기의 순수함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행동의 순수함을 나타낸다.

 

새로운 명절은 더 이상 종교적 의식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누룩없는 새 명절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거룩한 삶으로 드려져야 할 성도의 순결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 바울은 '묵은 누룩''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버려야 할 것을 권고한다.

 

여기서 '묵은 누''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이란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속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죄의 습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빚어진 성도들은 묵은 누룩이 뜻하는 음란과 정욕, 술 취함과 방탕,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등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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