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8일 수요일

바울의 독신관

  

바울의 독신관

 

(앞에 실은 [혼인문제]의 계속)

 

인류의 가정적 생명은 본래 유대인으로서 시작한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 있어서도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를 보지 못한다.

 

혹은 국가를 중심으로 하고 혹은 주권자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는 아주 많지만, 그것이 가정을 중심으로하는데 이르러서는 다만 이것을 유대에 있어서 볼 뿐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역사는 전적으로 가정의 역사였다.

부자의 관계 같은 것, 아브라함과 이삭과의 사이에서 이것을 그 가장 아름다운 형태에 있어서 볼 수가 있다.

 

아브라함이 막 이삭을 번제로서 드리려는데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여 하자. 그가(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아들아 내가 여기 있다 하니. . ](창세기 22:7).

 

아버지여 하고 부르면 아들아 하고 대답한다.

그 간단하고 심각한 부자의 정애는 실로 유대 독특한 것이다.

부부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야곱이 7년 동안 라헬을 위해 일했으나, 그녀를 사랑하는 때문에 이를 수일같이 여기더라](창세기29:20)라고 한 것은 그 소식을 전하여 유감없다.

 

만약 이것을 신약성서 중에서 취하려 하면 즉 베드로 전서 31-7절을 볼 것이다.

 

(베드로 전서 31-7 아내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은 누가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여도 그들 또한 말 없이 아내의 행실을 통해 얻고자 함이니

2) 두려움이 동반된 너희의 정숙한 행실을 그들이 눈여겨보느니라.

3) 너희가 단장하는 것은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며 옷을 차려입는 그런 외적 단장으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으로 하되 썩지 아니하는 것 즉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 장식으로 할지니 그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니라.

5) 옛적에 하나님을 신뢰한 거룩한 여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며 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너희가 잘 행하고 어떤 놀라운 일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사라의 딸들이 되느니라.

7) 남편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그녀를 더 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자로 여기고 존중하라. 그리하여야 너희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인의 가정생활은 여기에 역연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부자(父子) 사이, 상하의 구별 엄연하다 해도, 또 잘 융화 친목하고 모든 관계에 있어서 신성했던 것은 이는 유대 특유의 가정생활의 상태였다.

 

그러면 바울이 독신생활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은 결코 가정적 생명의 멸시에서 온 것이 아닌 것임은 확실하다.

자신 유대인으로서 태어나 유대인 가정에서 성장한 그 바울 어찌 가정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사상은 불교 또는 중고시대의 천주교 승려의 사이에 있어서 행해진 것 같은 그릇된 가정관과 전연 그 범주를 달리하는 것이다.

 

남녀동서를 죄악으로 보는 일등은 바울이 털끝만치도 찬성하지 않는 바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오해를 낳는 경우에는 그 자신 몇 번이고 가정의 신성을 말했던 것이다.

 

(디모데전서 4:3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

 

그러면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독신생활을 주장하게 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전혀 다른데 있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신앙이 곧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곧 재림하시어 이 세상의 상태는 모두 일대 변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 날에는 장가간 자나 아니 간 자나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문제 같은 것은 깊은 주의를 요하지 않는다고.

이는 바울의 생각이었다.

 

즉 명백한 사실은 바울의 독신론이 그의 확호한 그리스도 재림이 신앙에서 왔던 것이다.

이에 입각하지 않고서 그의 결혼관의 모두를 해득할 수가 없다.

아니 그의 전 사상을 해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바울의 인생관의 중심점은 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는 결혼은 근세인에 있어서와 같이 중대 문제는 아니었다.

동시에 또 다만 결혼뿐만이 아니라, 기타의 일에 관한 그리스도의 절대적 명령도, 이것을 보통의 사회에 응용하고자 하면 거의 불가능으로 인정되지만도 바울의 산앙에서 보면 극히 쉬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재림의 신앙이 바울로 하여금 우리가 풀기 어려운 많은 말을 발하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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