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1일 수요일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몸의 청결


고린도전서 612-20: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바울은 신자의 소송 문제를 말하고 나서 이제는 결혼문제에 이르렀다.

 

결혼문제는 인생의 중대사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생의 기밀에 관계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보통 교회 등에서 이것을 말하는 일을 피함을 상례로 한다.

 

하지만 사람 누가 결혼문제에 조우치 않으랴!

이것을 높이 거룩한 문제로서 강구 해 두는 일은 자신 위해, 또 자녀 위해, 붕우 위해, 극히 필요하다.

 

일은 결혼문제이다. 하지만 바울은 예에 따라 사람을 이끌어 그 근본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게 하고서는 마지않는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이 문제를 요해해 두는 것은 곧 남녀관계의 전부를 요해하는 일이다.

 

고린도의 신자가 이 문제로서 바울을 괴롭히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소위 불신사회 보통의 그릇된 도덕관과 자유복음의 남용과의 합치이다.

 

불신자의 사회에 있어서는 누구나가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남녀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음욕도 또 기갈도 한 가지로 자연의 육욕이다.

 

음행, 반드시 죄악이 아니라고 그들은 가령 외관을 삼간다 해도 일조, 음주 기타의 원인에 의해 외측의 제재를 떠날 것인가?

 

곧 그 흉중의 가장 부패한 곳을 토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공공연하게 이것을 선언하여 조금도 난처해하지 않는 것이다.

 

불신자에게 있어서는,

 

음식은 배 위해, 배는 음식 위해라는 것과 한가지로 몸은 또한 음() 위해인 것이다.

 

이는 때와 장소 여하를 물을 것 없이 모두 죄의 세상 보통의 관념이다.

특히 당시 고린도에 이르러서는 이 점에 있어서 부패를 극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고린도는 로마와 아시아의 무역의 중심이어서 동서(東西)양 왕복의 선객은 반드시 한번 이 땅에 하선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여중(旅中)에 난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또 그들로 하여금 타락케 하도록 모든 기관이 이곳()에 갖추어졌던 것이다.

 

그러한 곳에 바울의 복음은 들어왔다.

그의 복음은 자유의 복음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에 의해 온갖 죄는 멸해졌다는 것은 그가(바울) 고조한 바 였다.

 

그러므로 이제 죄는 죄가 아니고 자기 몸을 더럽혀도 또한 가하다는 관념을 고린도 신자 사이에 생기게 했다.

 

이것은 말할 것 없이 자유의 복음의 남용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먼저 그 오해를 바로잡으면서 말했던 것이다

 

모든 것 내게 가하다. 하지만 모두 유익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 내게 가하다. 하지만 그것의 하나라도 내 주가 되지 못하게 한다.

 

모든 것 내게 가하다 가하지 않는 것 없다는 것은 일찍이 그의 가르친 말이다.

 

옳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량된 자는 무엇을 해도 가하다.

그는 그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하나라도 이것을 그의 주되게 하기에 이르러 그의 자유는 곧 소멸되는 것이다.

 

자유의 복음을 받았다고 하여 죄의 노예 될 것인가? 자유는 이미 그 몸에 있어서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 때문에 속박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이는 바울의 서언이었다.

 

다음으로 그는 음행과 기타의 육욕과의 근본적 상위를 논하여 말했다.

 

음식은 배 위해, 배는 음식위해서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도 저것도 멸하실 것이다.

몸은 음() 위해서가 아니다. 주 위해서이다.

주는 또 몸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이미 주를 다시 살리셨다.

또 그 능력으로서 우리들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라고.

 

이 말을 해득하기 위해서는 바울류의 신체 구조관을 알 필요가 있다.

 

바울의 견해에 의하면 육(sarx)과 몸(soma)과는 전연 별것이었다.

우리들의 신체를 위요 둘러쌈 한 외포는 곧 육이다.

이는 눈으로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육 안에 다시 신이라는 것이 있다.

() 만약 체라면 신()은 체의 정이다.

 

육은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멸하실 것이다.

하지만 신()은 부활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거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신()이다.

주 오셔서 거하시는 곳 성령의 전, 이것은 신이다.

 

그리고 간음은 육의 죄가 아니라 신의 죄라고 한다.

 

사람의 모든 행하는 죄는 몸밖에 있다. 하지만 음을 행하는 자는 자기 신()을 범하는 것이다(18).

 

음식, 의복, 이는 모두 신의 밖()인 육에 관한 죄로서 깊이 생각할 바 못 된다.

 

배는 음식 위해라고 해도 가하다.

하지만 신()은 음() 위해서 아니다. () 위해서이다.

주는 또 신()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음을 범하는 것은 신을 범하는 것이다.

신을 범하는 것은 주를 범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다. 음행의 죄는 기타의 죄와 근본적으로 차이 있다는 것을.

 

바울의 인체관이 정부에 대해서는 학자에게 물론 설이 있으리라.

하지만 그가 음행의 죄의 중대성을 강조하여 다른 죄와 전연 범주를 달리하는 특수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르러서는 인생의 실험상 뒤엎을 수 없는 사실이다.

 

모든 죄는 사람의 품성에 관계되지 않든가 혹은 이에 관계되는 일 선소한테 반하여 다만 간음의 죄는 그렇지가 않다.

 

이는 사람의 성격을 범하는 죄이다. 그 존재의 깊은 곳을 손상시키는 죄이다. 그 생명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는 죄이다.

 

간음을 행하는 것은 자기 신()을 범함이다라는 것은

 

이것은 원문에서 직역하여 ()을 먹어버리는 죄를 범함이다라고 함으로써

좀 더 잘 그 어세를 나타낼 수가 있다.

 

간음을 범하는 자에게는 거룩한 문제를 미해하는 능력이 소멸된다.

 

다른 방법에 있어서는 아무리 우수하대도 그러한 자의 눈에 하나님의 일, 예수 그리스도의 일, 부활의 일 등, 심오한 영적 진리는 마침내 봉해진 수수께끼이다.

아니 그들은 대미술의 진가를 진관하는 명마저 잃은 것이다.

 

간음을 범하는 자에게 도덕적 의지력이 소멸한다.

일 있어서 그가 최후의 결단을 필요로 하는 때, 정의 위해 노라는 일언을 발할 수는 도저히 없다.

만난을 물리치고 자기의 이성을 수행하려는 결의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자가 하는 일은 필경 책략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인생관 역사관도 역시 극히 천박하다.

 

역사의 배후에 감추인 정의의 위력을 통찰할 수가 없다.

대사건의 전기가 된 참된 원인을 간취할 수가 없다.

 

또 간음을 범한 자에게 웅변이 없다.

웅변이란 무엇인가? 자기의 도덕적 인격의 발양이다.

뭇사람에게 향하여 당당히 그 생각하는 바를 토로한다.

이는 도덕적 인격 없이는 가능하지 못한 것, 그리고 음행자에게 이것 없다.

그 웅변을 가지지 못함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고래, 희세의 천재로서 다만 이 죄에 관련되어 몸을 가짐이 완만하기 때문에 그 힘을 잃은 실례는 결코 적지 않다.

 

그 가장 현저한 것은 프랑스 혁명의 요인 미라보이다.

그는 모든 집에 있어서 세상 위인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사가 그의 몸에 임박하면 언제나 자기의 무력을 발견하고 실망 중에 쓰러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즉 이 일점에 있었다.

구약성서중의 위인 삼손도 또한 호적례이다.

그는 부인과 접근하고 있을 때는 이상하게도 그 괴력이 소멸됨을 발견했던 것이다. 기타 유사한 소실례에 있어서는 이것을 어디서라도 볼 수가 있다.

 

이에 있어서 어떻게 하여 이 죄를 피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생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소극, 적극 두 가지의 해답을 주었던 것이다.

 

너희는 음행을 멀리하라(도망치라)(피하라)보다는 멀리하라, 도망치라이다)(18).

 

이는 바울이 가르친 소극적 방법이다.

 

사람 혹은 말하리라.

 

어찌하여 죄와 싸우지 않는가? 신자는 신앙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자가 아닌가?.

하지만 멀리하라(도망치라)고 한 바울의 일언은 실로 인생의 깊은 실험을 말한 것이다.

 

다른 죄는 모른다. 다만 이 죄만은 싸워 이에 이길 것 아니라, 멀리하여(도망쳐) 이미 이기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름 아니다. 이 죄만은 여기에 열낙을 동반하는 때문이다.

특히 이 죄의 왕성함이야말로 사회의 표리에 미만하고 인심의 심소에 침윤하여 드디어 무구한 청년을 삼켜버리지 않고서는 마지않는 세력이다.

위험한 것으로서 이 죄에 위요된 청년 같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멀리 도망하라. 곧 그 자리를 일어나서 떠나라.

산중, 독사에 조우한 것 같은 마음으로서 급히 떠나 안전한 장소로 옮기라.

이는 바울의 가르침이다. 또 구약 성서중 창세기, 잠언 등이 거듭하는 경계이다.

 

바울은 그 위에 또 적극적인 해답을 주어 말했다.

 

너희, 크리스천에 있어서는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속량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너희의 몸에 와서 거하시는 것이다.

너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신성하다.

그러므로 너희 몸으로서 (몸에 있어서나 영에 있어서나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깊도다, 바울의 교훈,

그는 두려워할 바 간음죄를 논하고 그리고 이에 이길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육체 신성론을 주장하고 우리들의 육체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맺은 것이다.

 

저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육체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의 가능뿐 아니라,

육체로서 하지 않는 때는 이 귀한 도덕미의 발양은 결국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에 청년에 대해 몸의 청결을 가르치는 말은 많다.

하지만 어떤 가르침이 능히 그 실현을 기할 수 있는가?

이들 중에서 다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만이 확실히 청년을 악마의 파악에서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만이 간음죄의 참으로 가공할 것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육체로서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의 길을 가르쳐 주는 때문이다.

 

간음은 실로 죄악 중의 죄악이다. 사람의 생명의 근본을 해독하고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파괴하는 최대 죄악이다.

 

하지만도 그리스도에 접함에 의해서만 이 세력을 내 몸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구축할 수가 있다.

 

세상의 청년아, 이 죄의 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아 그리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안전하게 그 독수에서 구원되기를 힘쓰라.

 

바울은 앞서 형제 서로 사랑을 말하고 신자간의 소송문제를 근본에서 해결했다.

그같이 지금 남녀관계의 신성을 말하여 결혼문제의 근본의 명백히 한 것이다.

 

청년아 그리스도에게 와서 신()을 깨끗이 하라.

이것을 제외하고 달리 몸을 깨끗이 할 길은 없다.

도덕도 애국도 이것에 대해서는 아주 미약하다.

우리나라의 정치가에 비추어 보라.

그리스도 만, 능히 너희로 거룩하게 하신다.

 

*내촌감삼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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