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5일 목요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자비로운 권면

 

성 경: [고전 4:14-21]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전 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 상반부에 나타난 반어적인 풍자와 비유는 사라지고 부드럽고 친근감(親近感) 있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바울의 엄격하고 딱딱한 어조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극한 분노와 책망 속에서도 사랑으로 권면하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한편 '부끄럽게 하려고')란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사용되었는데,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그곳에서는 오히려 부끄럽게 하려고 경고의 말들을 기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절의 문맥은 그것과 다른 의도를 지향하고 있다. 그는 격한 분노 속에서도 아버지의 따뜻함과 같은 위로를 나타내려 하였음을 바로 이어지는 후반절에서 명백히 밝히기 때문이다.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녀에 대한 사랑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랑하는'이라는 말과 '하려 하는'이라는 말이 결코 그들의 죄악마저도 덮어두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것은 아니다.

'권한다'는 것은 '권면한다'는 것과 같은 보다 부드러운 해석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아버지의 훈계와 같은,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보다 준엄하고 권위적인 훈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사랑''훈계'를 동시에 나타내고자 하여 사용한 부자(父子) 개념은 다음 절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 '스승'으로 번역된 '파이다고구스'는 엄격하게 말해서 스승이라고 할 수는 없는 지위이다.

 

이들은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아들을 가르치며 아들이 아들로서의 예의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돌보는 노예들이다(slave-guide).

 

갈라디아서에서는 몽학선생으로 번역되었는데,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들은 아들을 학교에 데리고 가는 수행원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다.

 

보편적으로 '파이다고구스'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는데

(1) 하나는 '가르친다'는 지식적 개념이며

(2) 또 하나는 '지도한다'는 지도권의 개념이다.

 

로버트슨(A.T.Robrt-son)은 전자의 개념을 강조하여 가르치는 가정교사라는 긍정적 개념으로 이해하며, 바레트(Barrett)는 후자의 개념을 강조하여 지도권을 행사하는 하나의 집단이라는 부정적 개념으로 이해한다.

 

바울의 의도는 단지 '일만'이라는 풍자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스스로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의 신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J. Calvin).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여 개종하게 된 많은 이방인들에게 영적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생계비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12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그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마다 그들을 향한 지난 날의 해산의 고통을 상기시키면서,

 

(10-13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돌아올 것을 강청한다.

 

바울은 모든 복음의 지도자들에게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만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1) 본능적인 사랑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속성을 나타내려 하였다.

즉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 및 권면이 진실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또한 부성애적(父性愛的)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2) 다른 복음 지도자들보다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보다 친숙한 관계로 묘사한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복음을 통하여'라는 강조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비'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계속해서 그들을 젖과 밥으로 양육하는 영적 아버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고린도 교회에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교인들을 권면하며 훈계하고 의로 양육하려 한 자들보다는, 지도자라는 직책(職責)만을 얻기에 급급한 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

 

(18:1-1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그 교인들을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참된 영적 아비였다.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심한 책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11-12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바울은 자주 이와 같은 성격의 말들을 반복하고 있다.

 

(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2: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살후 3: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일 수도 있으나, 결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 주변에 붙어 다니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절의 의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L. Morris).

 

바울이 본받으라고 주장한 본받음의 내용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C.K. Barrett).

 

그러나 설령 바울이 자신의 삶을 본받으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않는 것은, 복음을 드러내고자 일평생 고난 속에서 살았던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통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따라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 되라'는 바울의 이 선언은 단순한 자신의 추종자나 바울 당파의 일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1) 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과

(2) 그의 겸손과 고난에의 동참,

(3) 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화합(和合)하는 것,

(4)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 4: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 바울이 디모데를 처음 만난 것은 실라와 함께 제2차 전도 여행을 하던 중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이다.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서 그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은 충실한 일꾼이었으며 바울의 사역 후반기에는 마가 이상으로 바울의 사역에 참여하였던 동역자다.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을 듣고 디모데를 파송한다.

바울이 지금 디모데와 동행하고 있지 않음에도(디모데는 실라와 함께 마게도냐에서 하역 중)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디모데를 파송하는 것은 그만큼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신임이 큰 것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본절의 파송은16:10, 11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약간의 난점이 제기된다.

 

(16:10-11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본절의 '보내었노니'는 부정 과거 시제로서 과거의 행동을 가리키고 있으나 16:10,11은 미래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레트(Barrett)는 서신상에 쓰여진 부정과거는 때로 현재시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는 현재 파송되지만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 보다는 늦게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디모데가 다른 목적지를 경유하여 고린도에 도착하도록 명령된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렌스키(Lenski)는 편지는 배편으로 보내지고 디모데는 육로를 따라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편지보다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파송하는 것은 그 만큼,

 

(1)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반영하며,

(2) 그의 표현대로 '신실한 아들' 디모데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확신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디모데는 이 편지를 고린도에 보낼 즈음에 마게도냐 지방을 통해 고린도로 향하고 있는 도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각 교회에서 기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문맥에서 볼 때 각처에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역적인 모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를 특수한 임무로 파송(派送) 함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특수한 처방법을 명령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했던 지난날의 가르침의 내용을 상기시키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잊어버린 기억들이 다시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누렸던 복음의 능력들을 상기시키려고 한다.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왜냐하면 사람을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르게 하는 것 중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고전 4: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특징이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시기인 A.D. 51년 경 까지 고린도에 머물렀다고 추정해 볼 때 제 3차 여행 중에 서신을 쓰고 있는 이 시점은(A.D. 53-58) 결코 오랜 시간이 지난 때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불과 몇년 사이에 이토록 교만한 자들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들 중에 일부는 교인들의 방종을 부추기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바울이 차지했던 영적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바울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기대하며 바울이 이뤄놓은 귀한 설교 활동의 열매를 훔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 하며,

 

(9: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의 몸은 약하고 그의 말은 시원치 않다'(고후10:10)고 조소(嘲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고린도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고전 4:19]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란 말은 조건을 전제로 한 말로서 인간적인 인정과 감정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뜻에 자신의 전도 계획을 맡기는 참된 주의 종의 태도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계획하고 애쓰는 바울 일지라도 그의 계획과 앞일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로서의 바울의 모범을 다시 발견한다.

 

그런데 16:8에서 바울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러 있겠다고 말하나,

 

(16: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본절에서는 '속히 가기를 원한다'고 하여 약간의 모순이 발생하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16:8과 본절을 모순된 것으로 생각하여 이들이 서로 다른 서신서 들에 의하여 재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J. Weiss, J. Hering).

 

그러나 우리는 바울 당시의 여행 문화가 오늘날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역이나 터미널에 나가면 당장 운송 수단을 만날 수 있는 오늘날과는 달리 여행을 위하여 오랜 기간 준비해야 하며 때로는 항로를 이용하기 위하여 몇 달 몇 칠일씩 항구에 대기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필기도구나 노트가 없는 환경 속에서 이 많은 분량의 편지를 기록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4장과 16장을 집필하는 사이에 대두될 수 있는 시간의 경과와 환경의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C.K.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될 수 있는대로 빨리 가기를 소원하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그들이 더 이상 실수하지 않기를 경고하고 있으며 16장에서는 구체적인 시간, 곧 오순절 이후라는 계획(計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타났듯이 바울의 여행 계획에 모순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16:8에서 바울이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도 에베소에서 전도 활동을 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14: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고후 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러므로 바울의 이 같은 표현은 자신의 에베소에서의 복음 전파 사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며 특별히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기회가 자기에게 많이 주어졌기 때문에 에베소를 쉽게 떠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너희에게 가겠다는 간절한 심정을 지니고 있다.

 

 

[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교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서 공관복음서에서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 바울서신 가운데서는 본서에서 제일 많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림으로 성취될 메시야 왕국을 의미한다.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즉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이 세상 끝 날에 도래하게 될 하나님의 신천 신지(21)이다.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2)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해 이미 성도들 간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현재 영적으로 지배하시며 그들의 삶 속에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신다는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한 말이다.

 

본절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도입하여 저들을 책망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1:5,6과 본장8절이 시사한 대로 모든 구변과 지식에 풍족한 수준에 있었으나 생활의 실제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거리가 먼 시기(猜忌)와 심한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1:5-6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4:8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새로운 삶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 능력을 암시한 것이다.

 

(3:3-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즉 고린도 교인들의 삶의 공동체 곧 교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과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로고스)에 있지 아니하고에서 '''능력'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말에 상응한 내용이 따르지 않는 단순히 '헛된 말'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한편 '능력'은 가시적인 것으로서 예수께서 그의 왕국을 선포할 때에 나타났던 기적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본절에서는 인간의 공허한 웅변과 대조를 이루는 능력,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변화된 품성, 새 사람으로서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린 의와 거룩함과 화평을 이루는 실제적인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보다 타당할 것 같다. (L. Morris, J. Calvin).

 

따라서 바울은 인격과 삶의 변화, 즉 행동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헛된 말과 지식, 즉 영적 교만 속의 열매 없는 신앙생활을 고발하고 있다.

 

 

[고전 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 - 이것들은 모두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바울은 14절에서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과 훈계하는 것이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 바 있다.

 

본절에서도 매와 사랑을 대치시키지 않는다. 만약 바울이 매를 가지고 나아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아픈 채찍으로 훈계하든지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격려하든지 간에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사설(邪說)과 교만으로부터 해방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문제는 바울이 매를 택하느냐, 사랑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한편 ''는 공관복음서에서 전도자들이 지니는 지팡이를 의미하기도 하였으며,

 

(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6: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때로는 지배자의 상징으로서 홀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그 외에 '목자의 지팡이' 또는 '스승의 매'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훈계하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4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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