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2일 일요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우상에 어떻게 대할 것인가?

 

고린도전서 81-13: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1023-3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한글개정개역판)

 

 

고린도 전서는 말할 것도 없이 귀한 서간이다. 그리고 그것이 특별히 귀한 까닭은 소문제에 관하여 깊은 진리를 가르쳐 주는데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고린도에 있어서의 신자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바울의 해결을 얻고자 하여 질문서 같은 것을 보냈으리라.

그 중에는 결혼의 일 특히 처녀의 처분 같은 것, 이 세상 문제로부터 부활 같은 교의상의 대문제 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때 바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에베소 땅에 있었고, 고린도 신자 위해 붓을 들어 회답을 쓴 것이 즉 고린도 전서이다.

 

당시 본래 교통 용이하지 않았고 따라서 일편의 서신에도 그 기록 하는 바 극히 간절한 데가 있었다.

 

그 제8장 이하에 있어서 바울은 우상에 대해 대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상, 즉 참 신 아닌 신에게 어떻게 하여 대할 것인가?

 

이 문제는 이미 서양 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동양인에게 있어서는 지금도 통절하게 느껴지는 대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고린도인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러했다.

 

당시 고린도라고 하면, 마치 우리 요꼬하마(일본 6대도시의 하나), 고베(일본 동남부의 도시)라고 하는데 같이 상업은성의 땅으로서 제국민 위집하고 따라서 커다란 우상의 궁전이 있었다.

 

거기에는 매일 소 돼지 등의 고기, 아채, 과일 등 많은 제물이 바쳐졌다.

그리고 이튿날에 이르러 이것을 처분하기 위해 염가로 팔리고 그것이 널리 팔려졌던 것이리라.

 

누구도 사서 이것을 먹는 일을 이상하게 여기는 자는 없었다. 이는 그 시대의 고린도의 습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천이 생기니까 새로운 문제는 일어났다.

유일신을 섬기는 크리스천이 우상에게 바쳤던 것을 먹을 것인가 아닌가?

그리하여 신자 중의 단체 중, 이파가 생겼다.

 

일파의 사람은 말한다.

일단 우상에게 바친 것은 이미 부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다른 일는 말한다.

크리스천의 눈으로 볼 때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있으나 없는 것이다.

 

우상에게 바친 것을 먹었다고 해서 무엇 자기 마음을 더럽힐 것이랴고, 전자는 말하자면 협량한 신앙파였다.

 

후자는, 그리스도인의 학자적 사색파였다. 그중에는 어떤 신자 같은 이는 자기의 대도광량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우상의 궁에 가서 중인환시(衆人環視)중에 이것 보라는 듯, 우상에게 바쳤던 것을 먹어 보이는 자도 있었던 듯하다.

 

* 참조 (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여기서 최후의 재결을 바울에게 구했던 것이다.

실로 이는 흥미 있는 문제였다.

 

고린도에 있는 신자로서 바울의 적이었던 사람들은 생각했으리라.

이 실제 문제의 해결에는 저 소문난 바울도 필경 당혹할 것이라고,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문제의 해결은 결코 곤난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에 대해서도(8:1)

 

이는 표제로 보아야 할 구절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일언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설명이 퍽이나 바울적이다. 아주 상식에 맞게 되어 있다.

간결하고 잘 통찰한 설명이다. 그러면서 조금도 회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근본에 걸쳐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실로 바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문제도 처세상 또는 편의상의 문제로서 그칠 수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문제에 대소의 별은 없었다. 가정의 내부에 있어서의 미세한 문제라 해도 인류문제, 국가문제와 한 가지로 깊은 문제였다.

 

우상에게 바쳤던 것을 먹을 것인가 아닌가?

이에 대하여 또 그는 언제나 처럼 그리스도교의 근본정신으로서 이것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식 있음을 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한다.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잘 사물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그 알아야 할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는 하나님께 알려진 것이다(1-3).

 

사리는 잘 알고 있다. 설명은 너희가 이것도 가지고 있다.자기가 지금 설명할 것도 못 된다.하지만 문제의 해결은 지식은 아니다. 사랑이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는 것이다.

 

만약 너희가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 좋은 설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직 참으로 이것을 해득한 것은 아니다. 이는 지식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이다.

 

사랑은 건설하는 것이다. 너희가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 알려지고 그리하여서만 비로소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알려지는 일 없이 지식은 아직 참된 지식은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사랑이 없을 것인가? 어떠한 설명을 한대도 돌아볼 것 못되는 일이라고.

 

과연 바울의 해석은 그 모두에서부터 고린도인의 예상하지 못했던 심원한 것이었다.

만약 고린도의 신자로서 이 한 가지에 주의가 갔더라면 문제는 절로 해결될 수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바울은 먼저 이 근본의를 천명했던 것이다.

 

우상에게 바쳤던 것을 먹는데 대해서는 우리가 우상이란 세상에 없는 것임을 안다. 또 한 분 하나님 외에 신 없음을 안다. 신이라고 하는 것, 혹은 하늘에 있고, 혹은 땅에 있어서, 많은 신, 많은 주 있는 듯해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다만 한 분 하나님, 곧 우리의 아버지 계실 뿐 만물이 이에게 생겼고, 우리가 그에게 돌아간다. 또 주 곧 예수 그리스도도 계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도 그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다.(4-6)

 

이는 곧 우상의 설명이다. 홀로 하나님 외에 신 없다.

우상이란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의심할 것도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마음으로 우상을 생각하며 이것을 우상에게 바쳤던 것으로 생각하면서 먹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약하여 더러워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는 식물로 말미암는 것은 아니다. 먹어도 유익할 것 없고 먹지 않아도 손해될 것 없다. 하지만 너희는 삼가 그 자유를 약한 자의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하라. 사람이 만약 지식 있는 바의 네가 우상의 궁에 앉아서 먹는 것을 보면 약한 마음이 이에 권고되어 우상에게 바친 것을 먹게 되지 않겠는가? 또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약한 형제,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겠는가?(7-11).

 

하지만 세상에는 아직 신앙 약한 자가 있다.

우상을 무로 보지 못하고 사람이 이에 바친 것을 먹는 것을 보고서 그 약한 신앙이 좌절되려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또 그들 위해서도 죽으신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자기의 지식만 따라서 자유로운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들 약한 자를 실족케 하는 것은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듯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범하고 그 약한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범함이다.(12).

 

우상 문제가 반드시 중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로서 그리스도에게 죄를 범하는 때, 문제는 그것 때문에 극히 중대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우상에 바쳤던 것을 먹는 일, 반드시 죄는 아니다.

약한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 이것 커다란 죄이다.

 

이러므로 만약 음식물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기 위해 언제까지라도 고기를 먹지 않겠다.(13).

 

바울은 여기 이르러 우리라는 말을 버리고 라 말하고 있다.

너희의 태도는 너희 스스로가 이것을 결정하라.

 

나는 별로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말라고 명령은 않는다.

다만 에게 있어서는 는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언제까지라도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바울의 이 태도는 우리들의 태도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율법적으로 일을 정할 수는 없다.

 

투도(stealing), 간음 등, 순도덕의 문제는 별도로 하고,

이른바 indifferent questions(절대적으로는 선악을 말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일컬어지는 것.

 

예를 든다면 음주, 끽연(喫煙), 관극(觀劇) 등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금지하면 일은 곧 그칠지도 모르나, 그러나 이는 구원 받은 자의 태도는 아니다.

 

이러한 것을 규칙으로서 강제하려 하여 커다란 잘못을 범한 것은 교회이다.

 

바울의 대답은 감독의 교서와 전혀 그 찬을 달리했다.

그는 말했던 것이다.

 

규칙이 아니다. 지식도 아니다. 사랑이다. 한 사람의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 없느냐, 문제는 그것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라고.

 

일찍이 삿뽀로 농학교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를 심은 클라크 씨는 나이 50으로서 고국을 나서는 때, 약용 브랜디 및 타()(dozen)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상륙하여 보니 음주의 폐해, 그 청년에게 끼치는 악영향 아주 심한것을 알고 마침내 자신이 이것을 끊어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이는 규칙이 아니고 사랑의 법칙에 매인 것이다.

 

바울은 더 첨가하여 우상문제를 논해 오면서 마침내 1023절 이하에 이르고 그 결론을 말하고 있다.

 

모든 것 내게 좋지 않은 것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 아니다. 모든 것 내게 좋지 않은 것 없다. 하지만 모든 것 덕을 세우는 것 아니다.(23).

 

모든 것, 내게 좋지 않은 것 없다는 것은 필경 고린도의 신자 스스로 입으로 한 말이었으리라.

* 참조 (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우리들은 이미 전적으로 자유의 몸이다. 그러므로 무엇도 우릴 속박할 수 없다고 이는 확실히 일면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에 반대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라고.

 

유익이란 신앙상의 유익이다. 모든 것 내게 좋지 않은 것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 아니다. 모든 것이 형제의 구원을 돕는 것 아니라고.

 

또 말한다.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 아니다 라고.

 

즉 모든 것은 사람의 신앙을 진보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나를 묶을 수 없다 해도 그런 경우에는 스스로 어떤 것에 매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사람 모두 자기 유익을 구하는 일 없이 각각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24).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는 크리스천의 생애이다. 그는 이에 의해 자기를 묶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노예의 신분에서 구속되고 가장 자유의 몸이 될 자이매 천하를 활보 할 수 있음과 동시에 또 실은 크리스천만큼 매이는 것은 없다.

 

그는 하나하나 타인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어머니로 된 자는 자녀 위해 스스로 자기를 매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실험한다.

 

크리스천은 바로 그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머니가 만사를 자식의 입장에서 보듯, 크리스천은 무슨 일이나 하나님과 형제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절대의 자유는 절대의 속박으로 되는 것이다.

율법에서 탈출하여 보다 높은 율법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곧 사랑의 율법이다.

 

통틀어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 위해 묻지 말고 먹을 것이다. 그것은 땅과 이에 가득한 것은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만약 불신자에게 초대되어 가려하면 모두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을 양심위해 묻지 말고서 먹으라.(25-27)

 

여기서 논보 일전하는 까닭에 그런데라는 문자를 넣어 읽어야 할 것이다.

시장이란 고기를 파는 시장이다. 그곳에는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도 팔렸던 것이다.

 

그런데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을 때는 우상에게 바쳤던 것인지 아닌지를 묻지 말고 양심문제를 만들지 말고서 이를 먹으라 불신자에게 초대되어 함께 먹는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만물 모두 주의 것이므로 이것을 먹어도 아무 나쁜 것도 없기 때문이다.(시편24:1)라고.

 

만약 사람이 너희에게 이것을 우상에게 바쳤던 것이라고 하면 말한 사람위해, 또 양심 위해, 이것을 먹지 말리 양심이란 너희의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을 말함이다(28-29).

 

(28절 후반 그것은 땅과 이에 가득한 것 모두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는 어떤 고본 따라 이것을 없이 함이 가하다).

 

그런 것을 말하는 자는 혹은 신앙의 적일지도 모른다.

즉 신앙을 시험하고 또 괴롭히기 위해 이것을 할지도 모른다.

 

또 혹은 신앙의 형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신앙이 약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마음에 걸리는 나머지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어느 것이든 문제는 마찬가지이다. 특히 그것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지 주의하는 자 있으면 이것을 먹지 말라 이는 그 사람의 양심을 좌절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이에 유사한 기회는 일본에 있어서는 극히 빈번하다.

혹은 불교의 법사에 초대되어 향응을 받고

혹은 불장식에 회장하여 소향을 하는 일 같은 것, 이것이다.

 

그런 경우에 사자에게 호의를 표하기 위해 또 유족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양심 문제를 마련 말고서 이에 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때 혹은 자리에서 나를 적시하는 승려 있어서 내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나를 궁경에 넣어 그것으로 항복시키려 할 것인가?

 

혹은 신앙 약한 형제로서 그것 때문에 커다란 고통을 느끼는 일 있을 것인가?

곧 이에 응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유와 사랑과의 이자가 충돌하는 때 부득불 사랑으로서 자유를 묶는 것이다.

 

불교의 의식에 임하여 상당한 의례를 다하는 것은 우리들이 자유를 잃는 것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의 신앙에 해()있음을 아는 때, 우리들은 사람 위해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타인의 양심에 내 자유를 판단 받는 일을 하랴. 만약 내가 감사하고 먹는다면 어찌 그 감사하는 바의 것에 의하여 비난 받는 일을 하랴.(29-30).

 

만약 이 말을 해석하여 자유는 이것이다.

어찌 타인의 양심에 의해 이를 심판받는 일을 하랴고 읽는다면 무의미하게 된다.

 

이 말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울의 자유관을 알 필요가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유란 자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 위한 것이었다. 타인에게 바치기 위한 내 자유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율법에서 떠나 온전한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유를 쓰는 때문에 타인의 양심에 의해 시비되는 일이 있을 것인가?

 

나 자신을 위해서는 본래 아무런 고통할 만한 것 없지만도, 이는 타인의 양심을 해치는 일이다.

 

내 자유는 이것을 타인의 양심에 찬미되도록 써야할 것인지 도리어 누구인가의 양심의 걸림이 되고 그 비난을 부르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그러한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함만 같지 못하다.

 

자유는 내게 있다. 그러나 타인의 양심을 해쳐서까지 이것을 쓸 일은 못되는 것이라고 이는 바울의 자유관이다. 그리고 이는 음식, 기거, 모든데 통하는 법칙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먹는데 있어서나 마시는데 있어서나 모든 일을 하거나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라.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또 하나님의 교회도 실족케 하지 말라. 즉 내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합하도록 하고 그들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듯 너희도 그렇게 하라 내가 그리스도에게 배우듯 너희는 내게 배우라.(10:31-11:1).

 

알 것이다.

바울의 자유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유와의 사이에 얼마나 큰 경정이 있는지를 저 갈라디아서에 있어서 자유 위해 절규한 바울은,

 

모든 일에 있어서 타인의 양심에 합하도록 하기를 힘쓴 사람이었다.

 

자유의 바울은 속박의 바울로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두 형제의 구원을 돕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향하여 자주의 사람이지만도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모든 사람의 노예로 했다.(9:19).

 

크리스천은 땅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

 

그는 자기 위해서만 살 수는 없다.

타인의 영혼의 구원여하는 항상 그의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커다란 속박이다. 그러므로 타락 신자는 왕왕 말한다.

 

신앙을 잃고서부터 마음의 속박 풀린 듯한 감 있다 .

 

하지만 완전한 자유를 가지셨던 그리스도는 인류구원 위해 최대의 속박을 감수하시었다.

 

우리들도 또한 그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또 그의 귀한 기쁨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너희 자유를 사랑위해 쓰라 , - 이것 율법 이상의 율법이다.

 

그리고 순도덕 이외의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다만 이 법칙 있을 뿐이다.

 

고린도에서 당시 연극도 성했다. 음주의 풍도 성행했다.

 

이들 문제에 대해서도 바울의 의견을 들어두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상문제에서 미루어 보아 그의 해석을 거의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조금 이 문제에 스쳤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대천재의 플래시 같은 것이었다.

일쇄의 묵흔에서 심원하기 그지없는 의미를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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