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0일 화요일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신자들 간의 소송 문제 2

 

성 경: [고전 6:1-1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

 

바울의 논지는 형제들 가운데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그 문제는 형제들 가운데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 랍비들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문제는 이방 신에게 소송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Hodge).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복음의 역사 속에서 새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아직도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보다도 못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이방 종교들이나 사회 단체들 조차도 스스로 분쟁을 해결하는 관행(慣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가 세상 법정에 송사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Morris,Barrett).

 

또한 그 송사는 부끄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 법정의 판결에 따라 형제를 멸시(蔑視)하고 괴롭히는 또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Calvin).

 

위에서 '불의한 자들'은 그들의 재판 자체가 완전히 거짓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의 재판관'들을 일괄적으로 지칭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인 의와 세상적인 의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데,

세상적인 의는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그 기반을 두는 반면,

그리스도인의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따라서 본절은

 

(1) 세상 법에 대한 하나님의 법의 우월성과

(2) 성도간의 문제는 법 이전에 신앙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것임을 교훈해 준다.

 

한편 칼빈(Calvin)은 본 구절을 성도는 세상 법정에 절대로 설 수 없다는 견해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성도들 역시 불가피한 상황에 따라서는 세상 법정에 송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책한 이후에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사용하는 차선의 방법이다.

 

또한 성도는 세상 법정으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을 때, 마땅히 법정의 순서상 절차를 따라 출두하여 해명(解明)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도 역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과 동시에 일반 국가 시민으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법의 정당한 보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Lenski).

 

 

[고전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판단할'은 미래 능동태로서 세상 끝 날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마지막 심판에 성도들이 참여한다는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한 사상은 구약성경에도 등장하는데, 7:22은 지극히 높으신 자가 성도들의 원한을 들어주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다고 미래 사건을 예언한다.

 

(7:22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

 

바울은 미래의 심판 날에 성도가 참여할 재판의 권위와 자랑스러움을 강조함으로써 불의한 이방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고린도 교인의 행위를 책망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미래에 누리게 될 세상에 대한 왕권 행사를 현실에 적용함으로써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사소한 일들조차도 심판할 능력이 없겠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판단 한다'라는 말은 히브리적 사고에서 '통치한다'라는 의미로서

 

(1) 현재적으로는 성도들이 빛된 생활로 세상을 교훈하고 복음을 통해 세상의 불의를 심판하게 되는 것이며

 

(3:18-20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 종말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주와 함께 세상을 심판하고 왕 노릇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Morris)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고전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하나의 논지를 향한 그의 수사학적(修辭學的) 질문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는 앞절에서 사용한 수사적 표현보다 더 강조된 부정 의문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논지가 필연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우리를 보좌하는 천사들까지도 심판할 수 있는 신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24:21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 왕들을 벌하시리니;

 

벧후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여기서 '천사'(앙겔루스)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곧 범죄한 천사들을,

 

(벧후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가리킨다.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그리고 '하물며'는 장차 세상과 천사를 판단하게 될 위치에 있는 성도들이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들로 인하여 세상 법정에 송사하며 그 권위에 굴복 하겠느냐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세상 일'로 번역된 헬라어 '비오티카'는 법정 용어가 아니라 '일반 생활 습관에서 발생하는 평범한 일' 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은 평소에 사소한 마찰 정도도 해결하지 못해 세상 법정에 소송한 것으로 추측된다. (Farrar).

 

 

[고전 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 본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1) '경히 여김을 받는 자'가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며,

(2) '세우느냐'로 번역된 '카디제테'를 직설법으로 쓰인 수사 의문문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풍자적 어조를 띤 명령문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카디제테''카디조'('임명하다')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이나 문맥상 그 의미는 의문문과 관계된 직설법 동사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명령형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본절을 다음과 같은 풍자적 의미로 해석한다.

 

'만일 너희가 세상과 천사들을 심판할 위치에 있는데도 이러한 세상 사건으로 논쟁해야 한다면 차라리 교회에서 교인들 중에 가장 경히 여김을 받는 자를 세워 이런 작은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KJV).

 

이처럼 명령법으로 받을 경우 '경히 여김을 받는 자'는 교인들 중에 '믿음이 약한 자'로서 '무시 당하는 자' 또는 '어리석은 자'로 해석한다. 그래야만 풍자적 의미가 강하게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교훈하는 바는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정당한 해결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분쟁의 사건이 사소한 생활의 문제이든지 아니면 큰 분쟁이든지 교회 자체 내에서 공동체(共同體)의 능력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 고린도 교회의 소송 문제에 대한 바울의 솔직한 심정이 토로되어 있는 본절의 뜻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교인 중에 경히 여김을 받는 자를 세우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E.B. Allo).

 

그것은 본 서신의 전반부에서 자기의 지식을 자랑했던 고린도 교인들의 자만심에 비해 현재 그들의 초라한 상태를 지적하려는 것으로서 '정말 너희 중에 그 분쟁을 해결하거나 중재할 만한 지혜자 하나 없느냐'라는 풍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L.Morris).

 

한편 바울이 4:14에서 '부끄럽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으나 본절에서 그 의도를 바꾼 것은 그들을 무시하는 듯한 심한 풍자를 사용해서라도 법관들에게 양도되어 판단받는 일들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다.

 

사도가 그들을 향한 지대한 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깨닫게 하고 반성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 이 면박(面駁)은 결국 그들을 명예롭게 할 것이다.(J. Calvin).

 

판단할 만한 - 이는 재판에 대한 판결이나 결정이라는 의미보다는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여 해결한다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Morris).

 

형제와 형제 사이에 발생한 분쟁은 재판의 판결이라는 것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려는 의지와 조정자의 중재에 의하여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런 지혜자 한 사람 찾지 못했다.

 

 

[고전 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 바울은 접속사 '카이'('그리고')를 사용하여 논리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들의 잘못은,

 

(1)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있을 수 없는 분쟁이 발생했다는 것이며

(2) 그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송사하였다는 것이고

(3) 결정적인 잘못은 그 분쟁을 제소한 법정이 불신자의 법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분쟁이라는 잘못된 행위로부터 출발하여 형제를 이방의 법정에까지 고소하고 이교도로 하여금 성도를 판단하게끔 하는 더 큰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마치 적은 누룩이 온 떡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그들 가운데 발생한 작은 악은 점진적(漸進的)으로 성장하여 개인과 이웃과 교회 공동체 전체를 멍들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이라도 악의 연결 고리를 끊는다는 의미에서 형제와 형제 사이의 분쟁을 서로 간에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다시 말해 분쟁 문제를 꼭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이런 일을 충분히 처리할 만한 지혜를 가진 교인을 찾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의 소송을 통하여 서로 다투고 판단 받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다.(Mare).

 

 

[고전 6: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 이들의 송사에 대한 판결은 소송을 제기하기 이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속한 두 형제는 세상 법정에 제소하는 그 순간 모두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허물'이라는 헬라어 '헥테마'는 초대 교부들 가운데서 '패배'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는데(Morris) 본절에서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도덕적 패배이며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공동체 의식, 즉 한 몸 의식(지체 의식)의 패배이기 때문이다.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그들은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랑의 원리를 저버리고 세상의 법정을 선택함으로써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영적 패배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한편 '헥테마''패배'가 아닌 '허물'이나 '결점'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경우, 그 의미는 송사한 사건이 이미 그들의 약점이 되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허물이든지 패배이든지 간에 사랑과 용서를 저버린 그들의 행위가

 

(3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는 의미를 전하는 데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여기에서 바울의 주장은 절정에 달한다.

 

교인들 사이의 문제를 법적 소송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악한 일이며 나아가서 완연한 허물이라고 지적한 사도는 이제 교인들이 이런 싸움에 휩쓸려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를 주거나 속이기 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어려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Mare).

 

그들은 분쟁의 승리를 위해 송사하기 이전에 또 다른 방법을 선택했어야만 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이다.

 

(5:39-4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그 희생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손해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신이 불의한 자가 되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양보이다.

 

'불의를 당하는 것'(아디케이스데)'속는 것'(아포스테레이스데)에 해당하는 두 헬라어 동사는 모두 현재 중간태로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허용적 의미를 띠는 수동태에 가깝게 해석되어야 한다.

 

'아디케이스데'('불의를 당하는 것')'부당함을 입는', 또는 '불공평한 상태나 모욕을 당하는'을 뜻하는 단어로서 공평하고 평등한 해결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불공평을 감수하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아포스테레이스데'('속는 것')'강도를 당하다', '빼앗기다'를 뜻하는 단어로서 형제에게 양보하는 것이 마치 강도에게 약탈당하는 것과 같은 불이익(不利益)을 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양보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자신의 지혜와 의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원리를 기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자들에게는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이기적인 추구보다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삶의 원리와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고전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 '저는 너희 형제로다'라는 말은 교인들 상호간에 불의를 행하거나 속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로 형제를 해치고 모욕하는 악을 행하였다.

 

그들은 약탈과 보복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결국 그들이 한 형제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되었다.

 

'불의를 행하고'는 모두 능동태 동사로서 단지 그들의 소송이 '방어적 소송' 이상임을 시사한다.

 

소송을 제기하는 자나 소송으로 말미암아 고발된 자나 이들은 모두 서로를 이해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형제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이교도와 같은 삶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바울이 '서로를 형제라고 판단하지 않았다'고 표현한 것은 그 당시의 교회 공동체 속에서 '형제'(아델포스)라는 단어가 양보와 희생으로 하나 된 공동체의 일원(一員)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반증한다.

 

 

[고전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

 

'의한 자''악을 행하는 집단'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악을 행하는 자들의 특성', '악의 성격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대적 관계에 놓여진 자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교회 공동체와 같은 또 하나의 집단적 공동체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스스로 행하는 악의 성질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동지가 된 자들이다.

 

그들은 악의 동지 의식에 의해 더욱 하나님의 나라와 강한 대조를 이루는 세력이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되었다.

 

본절에 기록된 다섯 가지의 악의 형태는 모두 불의한 자들에게 속한 것으로서 성적 타락과 관계된 것들이라고 할수 있다.

 

(1) '음란'은 모든 형태의 성적 타락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였으며

(2) '우상 숭배'는 당시 이방 신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로서 특히 성적 타락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이방 신전들은 성적 타락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3) '간음'은 특별히 결혼의 신성함을 파괴하는 성적 타락을 지칭한다.

(4) '탐색'은 원래 '유약한', '여자같은'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이 단어의 수동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남자들과 더불어 음행하는 자들 중에서 수동적 위치에 있는 상대자를 뜻하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Barrett).

 

여기서 특별히 주색(酒色)에 빠진 것을 뜻하는 말로서 동성연애자들을 지칭하는 '남색하는 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 곧 자기의 몸을 동성연애자에게 내어 맡기는 부끄러운 악을 행하는 자들을 뜻한다.

 

미혹을 받지 말라 - 이는 갈 6:7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러한 표현은 당시의 논쟁 가운데서 자주 사용되었다.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21:8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웠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이것은 '외부적인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의미보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유혹을 극복하라는 뜻이 더 강하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만한 지혜로 도덕적 수준을 규정하였으며, 하나님은 거룩한 삶의 수준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과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이러한 것들이 악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고전 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

 

본절에 기록된 악들은 앞절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들이다.

앞절의 행악은 주로 자기의 몸을 더럽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주로 이웃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종류의 악들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이들 역시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제외되었음을 강조한다.

 

(1) 도적 - 전문적인 강도라기 보다는 '좀도둑'을 의미한다.

(2) 탐람하는 자 - '자기 욕심에 의하여 이웃의 것을 탐하는 자'를 의미한다.

(3) 술 취하는 자 - '술로 인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자들'을 의미한다.

(4) 후욕하는 자 - '남을 비방하는 자'를 뜻한다.

(5) 토색하는 자 - 탐람하는 것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완력뿐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남의 재산을 강탈하는 자'(extortioner)를 의미한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 만연하던 죄상(罪狀)을 지적하여 그들의 수치를 자각시키고 성도 본연의 사랑과 순결의 중요성을 깨우치며 죄악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음을 명백히 선포하고 있다.

 

 

[고전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옛 생활을 회상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죄악들을 나열하며 지난날 고린도 교인들이 이방인 가운데서 살 때의 죄악과 예수 안에서 얻게 된 새로운 삶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너희 중에 이러한 죄에 빠져 있던 자들이 있었으나'라는 뜻에 더 가까운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이는 그리스도의 모든 인격과 사역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성도들을 정결케 하였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성화(聖火)의 소망을 갖게 하였다.

 

특별히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이 영위하는 성화의 삶의 원동력임을 시사한다.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이제는 더 이상 죄악 가운데 묻혀 있지 않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헬라어 원문은 접속사 '알라'('그러나')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 '거룩함', '의롭다 하심'을 뜻하는 세 동사 앞에 각각 하나씩 기록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때 일어난 세 가지 사실을 열거한다.

 

 

한편 본 구절에서 주의할 점은 바울이 세 동사를 사용하여 그들의 현재적 신분을 설명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세 단어는 모두 동일한 '()'의 개념 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Calvin).

 

, '죄 씻음''거룩'''는 그들의 죄가 아무리 컸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며 그들이 새로운 의의 삶을 지향하게 된 것을 가리키는 법정적 선언의 개념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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