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3일 월요일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사도의 권리

 

성 경: [고전 9:1-1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고전 9: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 여기서의 '자유'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영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으므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8:13에서 그 자신이 고백한 대로 형제를 위해 그의 자유를 포기하였다.

 

(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사도가 아니냐 - 이 말 속에는 혹자의 말대로 사도인 바울이 사도로서 자신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Godet).

 

동시에 바울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하였다.

 

즉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과 고린도인들이 자신의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 '못하였느냐'는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말로서 바울이 본절에서 던진 네 개의 질문 가운데 이 구절에서만 사용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된 근거로 먼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사실을 제시하는데, 이 단어가 그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혹자의 말대로 행 9:3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목격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 이 말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는 두 번째 근거이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또한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가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도로서의 근거는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3:7의 말씀과 같이 바울 자신이 씨를 뿌렸다 해도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없었다면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 9: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의 사도권을 의심할 근거가 적당치 않았다.

 

''()은 어떤 일정한 모양을 새기는 도구를 가리키거나 그 도구를 사용하여 진흙이나 밀납 등에 새긴 소유권과 증명의 표시를 말한다.

 

바울로 인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들이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였다. 엄격히 말해 사람들의 회개는 성령의 역사이다.

 

하지만 바울의 복음 전파로 말미암아 교회가 생긴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Hodge).

 

 

[고전 9: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앞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고 뒷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다.

 

'힐문하는''엄밀히 조사하다', 혹은 '심문하다'의 뜻이며 '발명할 것'에는 '답변하다'의 뜻으로서 둘 다 법률 용어이다.

 

즉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이 심문하듯이 자신의 사도권을 따진다면 앞에서 말한 내용들, 곧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하였으며,

 

이방인인 고린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시킨 뚜렷한 사도됨의 증거들을 법정에서 증인이 되어 증명하듯이 단호하게 답변하겠다는 것이다.

 

 

[고전 9: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 바나바를 의식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혹은 '우리' 속에 실라와 디모데를 포함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바울과 협력하였으며 바울의 삶의 방식을 따랐었다.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 '''권리'를 뜻한다. 이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생계에 필요한 물질적 원조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을 뜻한다.

 

(고전 9:9-11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고전 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다른 사도들 - 사도행전에서는 사도가 예수의 열 두 제자와 바울과 한 두 사람이 더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14: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본절에서도 사도의 범위가 사도행전의 언급보다 그리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의 형제들 -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들들로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 네 사람들이다.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1: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게바 -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구분하여 '게바'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탁월한 사도이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드러진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탁월한 사도였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게바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또한 본절은 베드로가 아내가 있는 자임을 추측케 한다.

 

(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 - '자매된 아내'라는 말은 '자매''아내' 이 두 단어가 서로 동격(同格)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라는 말 속에는 '믿는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Lenski).

 

'데리고 다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아게인'('사방으로 데리고 다니다')'관례적인 선교 여행'에만 적용시킬 수 있는 용어로 당시의 사도들이 아내를 대동시키면서 도움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2세기 말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4세기 로마 교회의 부제(副祭)였던 암브로시에스터(Ambrosiaster)에 의하면 요한과 바울을 제외하고 모든 사도들에게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한 사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딸린 식솔까지 교회로부터 공궤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바울은 자신도 역시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할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고전 9: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일하지 아니할 권 - 본절은 사도들이 교회로부터 그들의 생계비를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바울과 그의 제1차 전도 여행시 동역자였던 바나바는 이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한 기술을 한 가지씩 익히는 관습이 있었다. 더욱이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은 모두 스스로 생계비를 벌었는데 바울 역시 그리하였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천하게 생각하였으므로, 혹자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을 매우 특이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한다.(Grosheide).

 

 

[고전 9: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

 

바울은 본절에서 두 가지 예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군인들이 자신의 비용으로 봉사하지 않는다는 것과 일꾼들이 포도원이나 목장에서 일을 할 때에 보수를 기대하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

 

(20:6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바울은 이같은 실 생활의 예를 들어 그들이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한 순리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도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보조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복음의 역군들과,

 

(딤후 2:3-4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3:6), 그리고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들이,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보수를 받고 신령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세속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자비량(自備糧) 하고'의 문자적인 뜻은 '스스로 구입한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후에 '군인들의 봉급'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바울은 이러한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자신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피력한다.

 

 

[고전 9: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사람의 예대로 -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습(人習)이나 생각에 따라'의 의미이다.

 

이 말이 때로는 육체의 그릇된 이해를 따른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3: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본절에서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임금 지불의 도리가 당연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6절에서 예를 든 것처럼 사람의 피습을 따른다 할지라도 일한 대가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그러나 바울은 보다 더 결정적인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제시하였다.

 

율법도 - 여기에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인모세 오경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울은 인간적인 생각과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이 서로 일치함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혹자는 인간을 만드신 분과 인간에게 계시를 주시는 분이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Grosheide).

 

 

[고전 9: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곡식을 밟아 떠는 소 - 본절에서 인용된 구절은 신명기 25:4이다.

 

(신명기 25:4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떠는' -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소를 이용하여 곡식을 터는 방아를 돌리거나, 혹은 일정한 반경(半徑) 안에 있는 곡식을 소로 하여금 발로 밟아 떨게 하였다.

 

혹자는 이 때 이집트나 다른 이방 지역에서는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그 입에 망을 씌웠다고 한다.(Lenski).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것을 금()하였다. 소가 일을 할 동안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들과 자연에게까지 관심과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을 가르쳐 준다.

 

(38: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 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147:9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소들을 염려하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리 새에게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신다.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바울의 의도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에 대하여는 가축도 율법에 의해 보장을 받는데 하물며 인간들이 일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구약에서 달리 인용할 말씀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4: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굳이 본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처럼 일꾼의 품삯을 예로 들지 않고 가축을 예로 든 것은 짐승들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더욱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귀중하게 대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고전 9: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소망을 가지고 -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이 문자적인 뜻으로는 일하는 소에게 먹을 양식을 주라는 것이지만 내면적인 뜻은 인간을 위한 것으로서 밭 갈고 씨뿌리는 자들이 결실을 거두어 들이는 소망을 갖고 일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고전 9: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10절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일한 대가로 그에 상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으로 결론을 맺었다.

 

이제 본 절에서는 앞 구절의 비유들에 빗대어 바울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신령한 것', 곧 한없이 고귀한 영적인 씨앗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뿌렸으므로 그들에게 '육신의 것' 즉 세상에 속한 것으로 영적인 것과 비교할 때 지극히 미미한 것을 요구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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