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6일 목요일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동정(同情)의 비결

 

고린도전서 920-22:

 

유대인에게는 나는 유대인처럼 되었다. 이는 유대인을 얻기 위해서이다. 율법아래(매여)이는 자에게는 나 자신을 율법 아래(매여)있지 않으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었다.

21) 이는 율법아래 있는 자를 얻기 위해서이다 율법없는 자를 얻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22) 약한 자에게는 나는 약한 자 같이 되었다. 이는 약한 자를 얻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의 모양에 따랐다. 이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 몇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일본어역)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개역개정판).

 

 

이상을 바울의 다른 말과 떼어 읽으면, 그는 실로 무주의(無主義) 무절조, 다만 자기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사람의 의향에 맞추려 한 이 세상의 지혜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현대의 일본 정치가처럼 자기에게 인망을 끌기 위해서는 사람 각자에게 그 태도를 바꾸고 알랑거리는 말을 흩뿌리는 자와도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은 명백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맡겨졌으므로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데살로니가 전서2:4)라고 말한 그가 사람에 따라서 그의 태도를 변경할 리 없다.

그가 사람에 접하여 그 사람처럼 되었다고 하는 데는 달리 깊은 이유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알기에 어렵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바울의 깊은 동정에 의하는 것이다.

동정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세상의 소위 동정은 지극히 옅은 것이다.

사람의 고통을 얼마나마 자기에게 느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자기의 의연히 자기로서 남는 것이다.

 

자기의 입장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타인에게 동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타인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된 동정은 자기를 타인의 입장에 두는 일이다. 자기를 잊어버리고서 그(사람)처럼 되는 일이다.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그 사람처럼 느끼고 그 사람처럼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를 이해하고 그를 돕고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에게 이 종류의 깊은 동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전도에 대성공을 울렸던 것이다.

 

나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되었다고 한다.

 

유대인과 다투어 격렬을 극했던 그()바울은 능히 자신 유대인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편견, 유전, 습관, 성벽 등을 자기 것으로 느끼고, 유대인의 입장에 서서 인생의 주요 문제에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을 인도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예수의 제자 될 수 있게 하고 자기 형제 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도 또 로마인에 대해서도 한가지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 의미에 있어서 바울은 최량이 교역자였던 것이다. 그는 로마인으로 될 수가 있었다. 약자로도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그리스도에게 온 것이다. 실로 전도사로서의 최상의 자격이다.

 

그는 말한다.

 

내가 복음 위해 이 같이 하는 것은 사람과 함께 복음에 동참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바울이 세계에 이르는 곳마다 열심 견고한 신자를 일으킨 것은 이유 없지않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는 어떤가 하면 전도자에게 이 자격이 아주 부족한 것이다.

부족할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개무이다.

 

대개의 전도사는 불신자에게 임하는데 자기주의 신앙으로서 한다.

그들은 자기 있음을 알고 타인 있음을 모른다. 그들은 타인을 자기 같이 만들면 전도상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전도라는 것은 타인의 정복이다.

 

자기는 옳다. 타인은 잘못하고 있다. 타인은 자기 같이 되면 구원되는 것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신앙에 대한 동정 같은 것은 조금도 없다. 뿐만 아니라 타 교도에 대한 동정을 갖는 것은 큰 죄악이라 그들은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타 교도에 대해서는 오만하다. 무례하다.

 

이에 임하는데 위압으로서 하지 않으면 연민으로 할 뿐이다.

그리스도교의 전도사가 불교도에 대하는데 먼저 자신 불교도로 되어 그의 입장에 서서 신앙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일 같은 것은 이는 그리스도교도 된 자의 굴욕인 것 같이 생각된다.

 

누가 적을 정복하려는데 있어서 적에게 동정하는 자 있으랴!

이 경우에 있어서 동정은 항복이다. 전도사로서는 죽는대도 못할 일이라고 대개의 전도사는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는 바로는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이 교도에 대한 동정에 결핍된 자로서 구미 선교사, 특히 영미 선교사 같은 이는 없다. 자고(自高)는 영민족의 특성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현저하게 이것을 종교계에서 나타낸다.

 

그들의 전도라는 것은 대개는 타교도의 정복이다. 그들은 타 국민으로 하여금 자기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려한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일을 그들은 컨벌션이라고 한다.

받아들인 자에게는 그들은 밥티스마를 주고 그것으로서 개신, 실은 항복의 표로 삼는다.

 

그들은 만국을 가르치려 하고 조금도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교도가 전연 자기 같이 되는 것이 아니면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 교도에 동정하는 일 같은 것은 죄악에 동정하는 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지금부터 38년 전에 니이가다(바다에 연한도시)에서 니찌렝종의 승려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으려 한때, 재류의 미국 선교사는 모두 일어나서 나를 공격하고 그리고 38년 후의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들은 영국 선교사와 함께 나의 당시의 행위를 용서치 않는 것이다.

 

불교도라고 하면 그들은 수적이듯이 생각한다.

그 신앙을 듣고자 하는 것은 정을 적에게 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불교도에서는 나는 불교도처럼 될 것이다 라는 바울의 정신 같은 것, 나는 일찍이 그들 중에서 본 일은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떤가 하면 전도의 효과는 조금도 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인도에 전도하여 인도를 구하지 못하고 인도를 정복하여 이것을 영국의 속국으로 해 버렸다.

미국 선교사는 하와이에 전도하여 마침내 하와이를 화하여 미국 영토로 했다.

기타 모두 그러하다.

 

그리고 만약 일본에 있어서의 그들의 전도가 성공했다고 하여 그들은 일본을 그리스도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영미화한데 그치지 않는 것이랄 때,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명백하게 대답할 수 있을지는 커다란 의문이다.

 

자신 일본인으로 되어 일본인을 교화한다면 되는 것은 일본적 그리스도신자이지 영미적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다.

 

바울의 전도와 영미 선교사의 그것과의 사이에 이 차이(상위)가 있다.

 

바울이 만약 선교사로 되어 일본인 사이에 나타나 준다면 그는 먼저 일본인이 되어주었으리라. 일본인의 입장에 서서 복음을 생각하고 일본인의 신앙으로서 전해주었으리라.

 

우리들은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서 조금도 이것을 외교로서 느끼지 않으리라.

 

그는 먼저 자기를 내어 주어버리고 그런 후에 우리들의 신앙으로서 복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으리라. 우리들은 바울에게 개신되어 조금도 굴욕을 느끼지 않으리라.

우리의 독립을 강하게 하면 했지 마침내 독립을 잃는 일 같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만약 바울의 전도의 결과로서 인도, 하와이 같은 경우가 실현한다면 그는 스스로 부끄럽게 느껴 무한한 우주에 몸 둘 곳 없음을 느꼈으리라.

 

사람을 자기에게 화()하게 하려 하면 먼저 자기를 그 사람같이 되게 한다.

 

이 심각한 동정 없이 교화는 불가능하다.

그 사람의 최선을 알고 그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리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내가 받은바 도를 전하다. 이것이 전도 성공 유일의 길이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법의 정반대가 영미 선교사의 그것이다.

 

우리들은 바울을 본받고 영미 선교사에 본받는 일 없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람같이 되어 그들과 함께 복음의 은혜에 참여할 것이다.

 

*내촌감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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