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일 토요일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바울의 부활론 2

 

고린도전서 1513-34: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개역한글판)

 

 

 

 

만약 죽음에서 다시 사는 일 없으면 그리스도도 역시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리라.

그리스도 만약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하는 바 헛되고 또 너희들의 신앙도 헛될 것이다.

또 우리들 하나님 위해 거짓 증거하는 자로 될 것이다.

우리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했기 때문이다.

만약 죽은 자의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는 일 없을 것이다.

만약 죽은 자의 다시 살아나는 일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는 일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또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도 망했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에 의지하는 우리들의 소망 다만 이 세상뿐이라면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불쌍히 여길 자이다. (13-19).

 

만약 육체의 부활 없다고 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전도는 공허할 것이다.

너희들의 신앙도 또 공허할 것이다([헛되다])내용 없다는 뜻).

우리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위증을 서는 자로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신앙은 무효로 될 것이다(17절에 있어서의 [헛되다]효과 없다의 뜻).

그리고 너희는 아직 죄에 있을 것이다.

또 신앙으로서 죽은 자는 직멸 되었을 것이다.

또한 전부를 버리고 이것을 믿은 우리들은 인류 중 가장 불쌍히 여겨야 할 자일 것이라고 실로 중대 문제이다.

 

만약 그리스도 부활하지 않으신 것이라면 어찌하여 우리는 아직 죄에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모든 그를 믿는 자의 죄를 사하신 무엇보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죄의 사유의 증거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몸이 완전하게 구원되기까지는 이것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들 각각의 몸의 구원은 미래에 속하지만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것이다.

 

이는 곧 그를 믿은 우리의 모든 죄가 이미 사유된 유일한 증거이다.

이 사실을 두고서 우리는 어디서 사죄의 증거를 구할 것인가?

 

이것을 각자의 심리상의 작용에 호소하여 나는 며칠 몇 시 몇 분에 죄사함 받았다는 것 같은 일은 도저히 확실한 증거로 하기는 족하지 못하다.

주관적 경험은 혹은 환각 혹은 감정 혹은 병적현상 아니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사죄에 관한 틀림없는 증거가 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는 대사실 곧 이것이다.

이 역사적 대사실이야 말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근저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죄는 아직 사유되지 못한 것이다.

 

어찌하여 우리들의 소망이 다만 이 세상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히 여길 자일까?

 

가령 육체의 부활 없다 해도 우리는 그래도 복된 것 아닌가?

오늘의 신자는 이런 말을 듣고서 괴이히 여기리라.

필경 그들은 신자로 되어 버린 것은 아주 적고 얻은 것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 기타 초대의 신자에게 있어서는 신앙생활은 곧 희생의 생활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일체를 버리고 다만 하늘에만 재물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의 소망이 세상뿐이라면 세상에 그들만큼 불쌍히 여길 자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 위해 바친 희생의 정도에 따르는 실험의 문제이다.

 

하지만 지금 그리스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잠든 자의 부활의 처음이 되셨다.(20).

 

만약 사자의 부활 없으면 그것도 헛되다. 이것도 헛되다.

 

우리들은 가장 불쌍히 여길 자이다.

 

하지만 지금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가장 복 된 자이다.

그러므로 신앙으로서 죽은 자는 적멸치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들의 신앙은 유효하고 너희들의 죄는 이미 사유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위증을 하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도도 너희의 신앙도 모두 내용 있는 것이라고.

 

이같이 이 한 사실에 의해 잃은 자(잃은 것) 모두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 없으면 우리들은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 있으므로 안전하다. 일체의 희망은 여기에 관계되는 것이다.

 

잠든 자의 부활의 첫 열매(첫 이삭) 되셨다.고 한다.

 

유대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일본)니이나메사이에 있어서와 같이 매년의 수확 중,

신곡(新穀)한 두 다발을 첫 이삭(첫 열매)으로서 하나님께 바쳤다.

이는 그 해의 전 수확인 몇 천만 다발을 모두 바치는 표시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역시 그를 믿는 몇 백천만 인의 부활의 첫 이삭 즉 표시였다.

그의 부활 가운데 우리 모두의 부활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바울이 종종 우리의 부활을 과거의 것으로 말함은 이 때문이다.

 

대저 사람에 의해 죽는 일이 있게 되고 사람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일 있게 되었도다.(21)

 

사람에 의해 라고 있는 것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로 읽을 것이다.

 

모든 악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오고, 모든 선도 또 한 사람에 의해 왔다.

 

인생의 선악, 그 근원은 모두 한 사람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간단 하지만 심원한 진리이다. 우리들의 마음에 임하여 품성을 감화하고 개인성을 변화케 하는 것은 모두 한 사람에 의해 온다.

 

나라에 만약 한 사람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정의를 사랑하는 자 있으면 그 나라는 일신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공자 나와서 그 감화를 동양 전체에 끼쳤던 것이다.

 

인류를 악으로 인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대표자 아담 나와서 죽음은 인류에게 임하고,

한 사람의 대표자 그리스도 나와서 부활은 인류에게 임했다.

 

죽음과 부활, 타락과 구원, 인생의 최대사건은 모두 한 사람에 의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신앙도 또한 개인적이다.

우리들은 비개인적인 대 세력의 운동의 와중에 투신하여 함께 흘러가려는 자는 아니다.

다만 한 사람 나사렛 예수의 종이 되어 그로 말미암아 온전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이다.

 

아담에 속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사람은 살 것이다.(22)

 

바울은 의론하고 요한은 발표한다는 것은 사람이 흔히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요한도 때로 이론에 호소함이 있듯 바울도 진리를 점점이 말해주고 있다.

 

본장 21절 내지 28절 같은 것은 그것이다.

이것을 읽을 때 마치 대시를 읽는 감이 있다.

 

일구 또 일구 전후의 맥략 없는 것 같으면서 그 사이에 깊은 정신적 관계가 있다.

 

그것 사람에 의해 라고 하여 대사상의 제목을 제공한 후 그는 말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살 것이다. 라고.

 

사람이 죄를 범한 결과로서 그 안에서 전 인류가 죽듯,

그리스도 부활한 결과로서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은 사는 것이다.

다만 그를 믿지 않고서 죽은 자의 운명 여하는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각각 그 차서에 따른다. 처음은 그리스도 다음은 그리스도 오실 때 그에게 속한 자이다. 뒤에 그는 모든 정사 및 모든 권위와 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넘겨드릴 것이다. 이것 마지막이다. 그것은 그가 모든 적을 발아래 두기 까지는 왕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최후에 멸망될 적은 죽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두셨기 때문이다. 만물을 그 아래 두셨다고 하시는 때는 만물을 그 아래 두신 바의 분은 그 가운데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23-27)

 

부활에 순서가 있다. 처음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신자의 첫 이삭으로서 이미 2000년 전에 부활하셨다.

다음은 그의 재림 때 그에게 속한 자 즉 신자이다.

그리고 신자의 부활 후 신시대는 시작되고 그리스도는 크신 능력으로서 모든 정사 및 모든 권위와 능을 멸하신다.

이것 역시 일조에 되는 것이 아니다. 긴 기간을 요하는 일이다.

* 참조 : (마태복음24, 25, 데살로니가후서 2, 요한계시록 등 ).

 

그리하여 그는 모든 적을 발아래에 굴복시키고 최후에 죽음을 멸하시어 마침내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넘겨드리신다. 그런 후 영원히 완전한 천국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부활과 최종 심판은 동시에 행해지는 것 아니다.

그 사이에 그리스도 신자의 통치의 시대가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반대론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한번 카이제르주의의 압제시대가 세상에 임하는 것인가고?

 

아니 도리어 하나님의 목적에 거슬리는 바의 모든 명령과 그 권력이 그에 의해 제거되는 것이다. 죽음 그것마저 그의 멸하는 바로 되는 것이다.

 

만물 그에게 복종하는 때는 아들도 역시 스스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할 것이다. (28).

 

모든 것은 모두 자기 이외의 힘 즉 외래의 힘에 의해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한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된 것도 역시 그러했다. 이것을 나 자신의 실험에 비추어 보아 나는 스스로 분투 노력하여 드디어 하나님의 종으로 되었다고 할 수가 없다.

 

나 같은 죄인, 즉 선보다도 악을 사랑하고 타락의 경향이 아주 강한 자가 이에 이른 것은 전혀 성령의 힘에 의해서다.

나는 마치 혹까이도의 벌판에서 야생마를 마구간으로 몰아넣듯 성령의 능력에 의해 밖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몰아놓은 바 되었던 것이다.

 

내외의 압력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는 다만 나의 경험만은 아니다.

버년(4250역주), 크롬웰(559역주), 루터(2277)의 실험 모두 그러하다.

 

그리스도가 모든 정사와 권위를 멸하시는 때의 방법도 역시 동양이리라.

 

그런데 여기에 다만 한 분, 모든 사람이 취하는 길과 전혀 다른 길을 취하여 하나님께 복종하는 이가 있다. 그 분만은 자진하여 하나님께 따른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는 인류의 왕이시다. 그 구주이시다.

여기에 그와 우리들과의 근본적 상위가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모든 것에 주가 되시기 위해서이다. (28)

만물의 귀착은 어찌될까?

사람은 죽고 죽어야 할 자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먼저 부활하여 우리들의 부활의 첫 이삭(열매)이 되셨다.

이에 의해 그가 다시 오는 때에 우리들도 또 부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시대는 시작되고 그는 몸소 모든 권능을 멸하시고 그런 후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넘겨드리고 스스로 나아가 하나님께 복종한다.

 

그 최후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 만물 위에 주가 되시기 위해서이다.라고.

 

생각하건대 성서 중 만약 짧은 일언 중에 최대진리를 포함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다.

만물의 귀착처, 그리스도의 강탄과 그 십자가와 그 부활과 그 재림의 귀착은 하나님께 만물 위에 주가 되시는데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때에 이르러 우주는 완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실로 모든 철학 사상도 이것으로서 끝난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만물 위에 주되신 자 라는 것은 의역이다.

 

이것을 원어로 읽으면 하나님 모든데 있어서 모든 것 되시기 위함이다.라는 것이다.

 

모든데 있어서 모두 이는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사상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또는 우주에 관한 인류의 사상에 이종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으로서 전부로 하는 것이다.

 

말한다. 각 사람 모두 신으로 되는 것, 이것 구원이다. 개성의 차별을 몰각하고 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듯 각자가 신 가운데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선인도 악인도 신에 삼킨바 되어 여기서 비로소 조화 있다. .

 

이는 곧 범신적 사상으로서 인도 철학에 의해 대표되는 것이다.

혹은 그렇게 명료하지 않대도 예를 들어 명상에 의해 신과 융합하고, 자아 없고, 사람 없고, 하늘 없고, 땅 없고, 황홀한 상태를 가지고서 구원으로 하는 것 등은 모두 이 사상에 속하는 것이다.

 

또 이는 개인으로서 전부로 하는 사상이다. 개인은 영구히 신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바는 이들 이종의 사상과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전범적임을 말함과 함께 또 명백하게 개인성의 존속을 가르친다.

 

하나님 모든데 있어서 전부되시기 위해서이다. 라고.

 

환언하면 하나님 각자에 있어서 전부로 되시기 위해서이다. 라는 것이다.

 

나는 영구히 나이다. 개인은 언제까지든 개인성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 있어서 전부로 되시고 각자를 통하여 일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어서 이미 그러하다.

 

만약 여기에 진실한 교회라는 것이 있을 것인가?

이에 속하는 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하나님의 영으로서 채워지고 그 개인성을 발휘하면서 이르는 곳 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하물며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랴!

 

그때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우리들 각자에 있어서 전부가 되시고 이를 통하여 그 크신 힘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는 실로 철학의 절정이다. 또 역사의 종국이다. 또 신앙의 이상이다.

 

그리고 이 이상에 달하기 위해 육체 부활의 필요 있다고 논한 전도자의 위대함은 숙고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종말관이 이에 있음을 알 때 구구한 또는 비천한 현세적 관념은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일소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죽은 자가 전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사자 위해 침례를 받아 무엇 하려는가 그들 사자 위해 침례를 받음은 어쩌함인가. (29).

 

바울은 그 논보를 진전시켜 절정에 달하기에 이르자 앞서 말하고자 하면서 남겨둔 것 있음에 마음이 갔다.

그는 만약 부활 없다면 신자의 실제 생활의 무의미 무효임을 일언 부가 하려 하는 까닭에 여기 이르러 다시 만약 죽은 자가 전혀 부활할 수 없다면. 이라고 되풀이 한 것이다.

 

이는 수사학상, 졸렬하다 해도 바울의 기질을 잘 나타내 보임과 함께, 또 이 서간이 칸트 헤겔등의 철학 같은 서재의 산물이 아니라, 그의 심중 용해된 무쇠 같은 열성에서 병출된 것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죽은 자 위해 침례를 받는 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지금에 이르러 이것을 정할 수는 없다. 이것의 주석은 36종이나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대한 것 아님은 분명하다.

혹은 말한다. 신앙을 일으킨 후 아직 침례를 받지 않고서 죽은 자가 있을 때는

그가 부활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다른 친구 또는 친척이 대신하여 이것을 받은 습관이 있었는데 바울은 물론 그러한 습관에 무게를 두지 않았으나 다만 이것을 가져다가 부활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라고.

 

그리고 이 습관이 바울로부터 200년 이후의 교회에 있어서 행해진 기록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과연 바울 시대의 습관이었는지를 알 수는 없다.

 

혹은 또 말한다. 신자로서 죽으렴에 있어서 남은 친구 또는 친족 중 아직 신앙을 일으키지 않은 자의 구원위해 크게 걱정하면서 잠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경우에 그 사자의 감화력에 재촉되어 신앙을 일으키고 침례를 받게 되는 것을, 사자 위해 침례를 받는다고 했을 것이라고.

이는 실로 훌륭한 설명이다.

 

어머니가 임종의 자리에 불신의 아들을 불러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성도 부활의 아침에 다시 너를 만나고 싶다. 고 하여 아들은 이 한마디에 촉구되어 마침내 신앙을 가지기에 이르는 일 있음은 결코 희유한 일은 아니다.

 

특히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사랑의 관계에서 사자의 위대한 최후의 동기로 되어 인상의 전파를 도운 사실은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기타 이 일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내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이든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이 있음으로만 침례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로 침례는 부활 신앙의 표상이다.

그것은 침례의 형식에 비추어 명백하다. 침례의 형식은 일단 수중에 몸을 담갔다가 그 후 일어나는 식이다.

 

그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죽어 장사되었다가 그리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신 일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부활 및 이에 기초한 자기 부활을 믿는 신앙의 표명이다.

 

그러므로 육체적 부활의 신앙은 수침(水浸)의 조건이다.

이것 없이 세례(洗禮)를 받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또 무엇 때문에 우리가 언제나 위험에 있으랴?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 대해 내가 가지는 기쁨을 가리켜 맹세코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한다. 만약 내가 사람들 같이 에베소에서 짐승과 함께 싸운 것이라면 무슨 유익이 있으랴? 만약 죽은 자가 부활치 못하면 먹고 마심만 같지 못하다. 우리가 내일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30-31).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는 복음위해 노력하려는 동기를 좌절시키는 일이라는 뜻이다. 부활의 신앙이 있음으로서만이 신자에게 세상을 두려워 않는 마음이 생기고 세상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 육체의 부활 없고 따라서 내세의 생명 없으면 이 세상에 있어서 나아가 박해를 받는 일 같은 것 무슨 의미가 있으라고 이는 바울의 입장이다.

 

그런데 근대인은 말한다.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대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복음위해 노력할 충분한 이유 있다.

노력의 동기를 도덕심에 호소하지 않고 미래에 있어서의 육체상의 일에 호소하는 등은 아주 저속하다고.

 

이자 어느 것이 바른가? 이것을 의론에 의해 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각자의 실험은 명백한 증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세상을 두려워 않고 박해를 피하지 않고 복음위해 강렬한 노력을 계속하기에 이르는 것은 언제인가?

우리들 가운데 부활의 신앙 일어나 내세의 관념이 명확해 지는 때가 아닌가?

 

그러므로 바울은 그 실험에 호소하여 자기가 에베소에서 싸운 3년의 노력은 자기에게 부활의 신앙 있었음에 의한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모두 귀한 생애를 보낸 자의 실험한 바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를 보라.

그 강당은 어찌하여 낙막하여 사기가 오르지 못하는가?

그저(함부로) 사회적 봉사를 말하고 부활, 내세를 말하지 않는 때문이다.

사람의 지심한 요구에 저촉하여 그 영혼의 깊은 속에서 생명의 일출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서 부활의 신앙 같은 것은 없다.

교회에 이 신앙 생겨날 때 비로소 그 부흥을 기대할 수가 있다.

 

너희는 스스로 미혹되지 말라. 나쁜 교제는 선한 행위를 해치는 것이다. 너희 깨어 의를 행하라. 죄를 범하지 말라. 너희 중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여 너희를 부끄럽게 한다. (33-34)

 

이것을 다음과 같이 개역하는 것이 가한 것으로 여긴다.

 

너희는 유혹되지 말라 나쁜 교제는 선한 품성을 해치는 것이다(바울 보다 약 200년 전의 그리스 시인 메난드로스의 말을 인용한 것이리라). 너희는 의를 가지고서 취함에서 깨라 죄를 범하기를 그치라. 너희 중 하나님에 관하여 무지한 자가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여 너희를 욕되게 하려 한다..

 

바울이 만약 이 말로서 오늘의 교회에 임한다면 어떨까?

 

혹은 과학 혹은 사회 문제 등에 의해 신앙을 좌우 당하는 일은 품성, 생명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

또 부활을 믿지 않음은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그가 그러한 격렬한 말을 말함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부활케 하시는 능력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부끄럽게 하여 잠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함에서라고 한다.

 

실로 사랑에 넘치는 경성의 소리이다.

부활을 믿지 않고 재림을 믿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여 좌고우면하고 있는 지금의 교회는 이 소리를 듣고 분기해야 할 것이다.

이상, 1절 내지 34절에 있어서 바울은 주로 부활의 사실에 대하여 말했다.

 

오늘의 말로서하면 부활의 역사 및 예언이다.

그리고 이것을 말하여 그의 전도사로서의 의무는 끝났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는 더 깊고 넓은 학구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나아가 대담하게도 부활의 이유 즉 부활의 과학에 들어 가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과학은 결코 업신여길 것은 아니다.

그의 고향 다소는 일찍이 유명한 대학이었던 성읍이었다.

어떤 이는 말한다.

 

바울의 아버지는 지위, 소양 모두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아들 사울을 예루살렘에 보내기에 앞서 반드시 다소 대학에 넣었을 것이라고.

 

또 어떤 사람은 바울이 다소 재학 중 그는 아마도 유명한 철학자 아테노도라스와 동급 또는 지우였으리라고 한다.

 

어쨌든 그가 그 시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교육도 또 이것을 그리스도 복음 위해 쓰지 않고서는 마지않은 것은 그 바울이었다.

 

그가 자기가 가지는 천연학으로서 부활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가 만약 이것을 시도치 않았더라면 우리는 근세 과학에 대하여 부활을 변호함의 중하가 지워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시도한 것은 우리들도 또한 이것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도 또 우리가 가지는 천연학에 호소하여 부활의 설명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오늘 과학자와 신앙가는 전혀 그 방을 달리하여 과학자는 저쪽에서 현미경을 살피는가하면 신앙가는 이쪽에서 다만 성서를 찾는다.

 

종종 신앙가로서 과학자의 입장으로 돌아가려는 자 있으면 과학자는 이것을 연구실의 침입이라 하여 문을 잠그고 들이지 않으려 한다.

흔히 소위 신학자에 이르러서는 과학을 무서워하는 일 심하여 과학자의 반대를 듣는 때마다 전률하는 상태이다.

 

하지만 어찌 두려워하랴!

바울은 대담하게 과학자의 영역에 치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도 또 그를 따라 이것을 시도하여 무슨 불가 있으랴?

 

*내촌감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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