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8일 토요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부활의 순서와 상태 2

성경 : 고전 15: 20-34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아래 때까지 불가불 노릇 하시리니

26)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저의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

30)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안에서 가진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죽은 자들의 부활의 진리를 확립한다.

 

.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1. 그는 "잠자는 자들의 열매가 되었다"(20).

그리스도는 자신을 일으키셨고 바로 이런 면에서 안에서 잠자는 자들의 열매로 일어나셨다.

유대의 추수가 열매를 바침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처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확실성이 있다.

처음 열매가 거룩한 전체의 떡이 거룩하게 된다.

( 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보장된다. 그리스도가 일어났던 것처럼 그들이 일어날 것이다.

열매가 거룩하여 전체의 떡이 거룩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자기만을 위하여 부활하심이 아니요 몸인 교회의 머리로써 부활하셨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다음을 주목하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보증이요 약속이다. 왜냐하면 그가 일어나심으로 우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한 덩어리의 한부분이며 열매의 용납과 은총에 참여한다. 이것이 부활의 진리에 대한 바울의 논술이다.

2.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병행으로 설명한다.

사람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므로 사람으로부터 구원이 오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모든 사람이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첫째 아담의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게 되고 같은 죄의 성질을 가졌던 것같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공로를 통하여 성령에 참여하고 영적인 성질을 가지게 되고 재생하여 죽지 않게 된다.

죽는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로 죽는다. 바위의 의미에 있어서 사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공적과 능력을 통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외 없이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의 논지는 일반적 의미에 제한한다.

그리스도는 열매로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그에게 붙은 " 일어나게 된다.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사람은 모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사망이 첫째 아담 때문일 것같이 부활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통하여 사망이 왔고 사람을 통하여 구원이 왔다.

첫째 아담이 그의 후손을 파멸시킨 것같이 둘째 아담이 그의 씨를 영광의 영생으로 회복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같다.

3. 바울은 논술을 그만 두기 전에 부활에는 질서가 있을 것임을 천명한다.

정확하게 어떻게 것인가는 말하여지지 않으나 다만 질서가 있음을 말한다. 아마 가장 높은 지위와 가장 훌륭한 봉사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장 무서운 악과 죽음을 당한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첫째 열매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그의 붙은 사람들이 다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사람의 부활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그의 붙은 사람들이 다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사람의 부활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들은 전체의 떡덩이가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열매들을 바쳐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순절과 봉헌제에 바칠 때까지 구별하여 둔다.

민수기 26 2절에 대한 패트릭 주교(Bishop patrick) 말을 참고하라.

(민수기 26 2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의 총수를 조상의 집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무릇 이십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라 하니)

열매들의 헌납은 전체의 떡덩이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추수하기 전에 시행하는 것이 아니고 바치기 위하여 구별하였다가 후에 바치더라도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도가 그리스도 앞에서 부활있었더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들의 부활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들이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기 때문임을 주목하자.

. 바울은 그리스도의 모든 원수가 파멸되고 마지막 사망이 파멸될 때까지 중보적 왕국의 계속에서부터 논한다.

(24-26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아래 때까지 불가불 노릇 하시리니

26)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부활 때에 왕국이 부여되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의 손에 주어졌다"( 28:18).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 2:9-11).

왕국의 통치는 모든 적대하는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모든 원수를 아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라"(24-25).

" 나중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26)

1. 주장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점이 있다.

(1) 우리의 구주는 모든 권세를 손에 넣고 중보자로서 왕국을 소유하고 다스리시기 위하여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셨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으셨으니 죽은 자와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4:9).

(2) 중보적 왕국은 끝이 있다. 하나님이 백성을 완전하게 보호하고 모든 원수를 정복할 때까지이다.

" 때에 끝이 오리니"(24)

(3) 모든 적대하는 원수들이 완전히 정복하고 굴복시킬 때까지는 끝이 오지 않는다.

(24-25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아래 때까지 불가불 노릇 하시리니).

(4) 다른 원수 중에서 사망이 파멸되고 버려져야 한다.

(26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망의 능력이 취소되어야 한다. 여기까지 바울은 밝히 말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일어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망과 무덤이 그들을 지배하고 우리의 구주인 왕의 권능이 백성의 마지막 원수를 지배하여 힘을 파멸시키지 못할 것이다. 성도들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사망은 취소되지 않는다.

때가 차서 중보적 왕국이 바쳐질 때에 일어난다. 성도들은 다시 일어나서 죽지 않는다. 이것이 논지의 범위이다.

2. 바울은 주목해야 가지 암시를 주고 있다.

(1)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로서 우리 구주는 위임된 왕국을 가진다.

"만물을 저의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두신 이가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27).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권세는 위임된다. 비록 그의 중보가 하나님의 성격을 가정하지만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성격을 밝히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사람으로 인간과 하나님의 성질을 가지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하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위탁과 권능을 받는다.

아버지는 전체의 섭리 중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낸다.

인간이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대리자로 나타난다.

하나님으로서 그에게 속한 피조물에 대한 영원한 지배가 아니고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중보자로서 그에게 위탁된 왕국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 후에 아버지와 함께 왕위에 앉으셨다.

(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그래서 예언이 이루어졌다.

"내가 나의 왕을 거룩한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2:6).

의미는 신약에서 여러 나타났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 16:19; 8:34; 3:1),

권능자의 우편에 앉으시다( 14:62; 22:69).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다( 12:2).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8:1).

자리에 앉으심은 중보적 권능과 왕국을 가지는 것으로 그의 승천 때에 이뤄졌다( 16:19).

이것은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겸손과 낮아짐과 인간이 되심과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댓가라고 말하여진다( 2:6-12).

 

승천하실 때에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를 다스리고 보호할 능력을 가지시고 모든 원수를 파멸하고 구원을 완성하실 때까지 수행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근원적이고 무한한 권력이 아니다. 특별한 목표를 위하여 제한된 권력이다.

권력을 가지신 그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으로 행동하시지 않고 중보자로서 행하며 거역을 받은 하나님으로서가 아니고 거역한 피조물을 위한 중재로서 행동하신다. 하나님으로서 지배하실 있으나 중보자로서 위임된 권력을 사용하신다.

(2) 위임된 왕국은 마침내 아버지께 바쳐진다.

(24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한 표를 위하여 받은 권력이며 교회의 모든 원수가 영원히 멸망될 때까지 교회의 성도를 다스리고 보호할 권력이기 때문이다.

(25-26 저가 모든 원수를 아래 때까지 불가불 노릇 하시리니

26)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목표가 달성되면 권력과 권위가 필요없게 된다. 구속자는 교회의 원수가 멸망하고 교회의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지배하신다.

목적이 달성되면 목적으로 받은 권력을 돌리신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서 영광된 교회를 영원히 다스리신다.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라"( 11:15).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나라가 무궁하리로다"( 1:33).

"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라"( 7:14)( 4:7 참조).

 

(3) 구속자는 그의 성도의 마지막 원수가 멸망하고 사망이 없어지고 성도가 재생하여 완전한 생명을 얻어 다시 죽을 위험이 없을 때까지 다스리신다.

그때까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신 그가"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고 우리를 생각하시는 그가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 즉었던 그가 영원히 사시고 통치하신다.

(4)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28).

의미는 그의 왕국에서 그러한 권위로써 통치하시던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국을 바칠 때에 아버지께 복종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인간성은 영광스러운 피조물이 끝나는 것이다. 이것은 왕국이 바쳐질 때에 나타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며 우리 구원의 완성은 전연 하나님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만 명예롭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인간이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행위이며 우리의 눈에 기적임을" 주목하자.

 

.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들의 경우에서 부활을 증거한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 (29)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하면 그들이 무엇을 했겠는가? 그들의 침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일까! 침례를 지지해야 하느냐 버려야 하느냐? 만일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하면 어찌 그들이 침례를 받겠는가? (u`pe,r tw/nnekrw/n)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가 무엇일까?

바울의 논술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보편적인 결론인가, 혹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는 특수한 사람에 대한 것인가?

관사를 제외하면 단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해석가들에 의하여 가지의 곱보다 많은 의미가 부여되는 모호한 귀절을 누가 해석할 있겠는가?

침례의 뜻이 무엇인지 혹은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 쓰였는지 비유적으로 사용하였는지 일치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 쓰여졌다면 그리스도인의 고유의 침례인지 혹은 다른 침례식인지도 모른다.

죽은 자가 누구인지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무슨 의미로 uvpe.r 이라는 전치사가 사용되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죽은 자가 우리의 주님 자신이라고 이해한다. 앞에서 언급한 휘트비(Whitby) 참고하라.

만일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으면 죽은 가운데에 남아있는 죽은 구주의 이름으로 누가 침례를 받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oi, nekroi 사람의 죽은 자를 의미한다는 유일한 예이다.

그것은 말들이 다른 곳에서는 가지지 않는 의미이다.

침례받은 자들(oi, baptizo,menoi) 만일 죽은 자들(oi, gek roi) 우리 구주를 의미하면 일반적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어떤 특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점은 순교자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는가?

이것은 때때로 사람들에 의하여 피의 침례라 불리어졌고 우리 주님에 의하여는 막연한 침례라 말하여졌다.

(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있나이다;

12:50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그러나 무슨 뜻으로 순교를 하는 자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침례를 받는다고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초대 교회 시대에 침례없이 죽는 자들의 이름으로 어떠한 사람을 침례 주는 관습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관습이 당시에 유행했더라면 바울이 혐오하지 않고 그것을 언급했을 수가 없으리라는 뜻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관습이 당시에 유행했더라면 바울이 혐오하지 않고 그것을 언급했을 수가 없으리라는 뜻도 나타난다.

어떤 이들은 당시에 지켜주던 죽은 자들에게 침례를 주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들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의미에 적당하나 그러한 행위가 사도 시대에 사용된 같지 않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위하여 죽은 자들의 이름이나 정절을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확실히 어떤 이들이 이것을 지킴으로써 기독교인으로 개종되었다. 만약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 살아나지 못하면 이런 동기로 그리스도인이 사람은 것이 된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당시에 많은 핍박을 받지 않았고 순교의 일들이나 순교자들의 확고한 신앙에 의하여 개종하는 자들도 보지 못했다.

oi nekroi. 너무나 일반적인 표현이므로 순교자들만 의미하지는 않는 같다.

oi, nekroi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옮기어진 자들을 의미한다.

"너희중에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11:30) 주의 식탁에서 무질서하게 행했기 때문이다.

일이 그들의 얼마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기적적인 지진이 간수를 개종시킨 일과 같다. 사도행전 16 29, 30절을 참고하라.

(사도행전 16 29-30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그러한 경우에 침례를 받은 사람은 죽은 자를 위하여 침례를 받았다고 말하여질 있다. 죽은 자들과 침례를 받은 자는 서로 부합한다. 이런 가정 위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들이 무엇을 하며 어찌하여 침례를 받았겠는가?"

이들이 현명하고 옳게 행하였다고 너희들은 생각한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빨리 죽은 그들이 저편의 소망을 가지지 않겠는가?

의미가 옳은지 혹은 다른 의미인지 모르나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 바울은 가정에 대하여 자신의 행위와 다른 그리스도인의 행위에서 오는 모순으로 주장한다.

1.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은 위험을 당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것이다.

(30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릎쓰리요. 우리가 계속적인 위험을 당하겠는가 더욱 사도들인 우리가 그러할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위험하며 더욱 전도자와 사도가 되는 것은 당시에는 위험한 일이었다.

사도는 말한다.

"이제 우리가 죽은 뒤에 소망이 없고 우리가 온전히 죽고 재생하지 못하면 위험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기독교를 처음 증거할 때에 따를 위험 때문에 이생의 너머에 소망이 없음은 어리석은 고백일 것이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이생의 모든 복과 안락을 바치고 모든 악을 당하며 장래의 보장도 가지지 못하는 일이 된다. 이것이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하는 기독교인에게 적당한 신앙의 성격이겠는가?

 

바울은 주장을 밝힌다.

"내가 날마다 죽는 것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너희의 기쁨과 기독교의 모든 위로와 거룩한 믿음의 도움으로 증거하노라"(31).

바울은 죽음의 계속적인 위험 가운데 있었고 그의 손에 목숨을 들고 다녔다. 생명 뒤에 소망이 없다면 어찌하여 이렇게 자신을 내어 놓을까?

죽음을 바라보면서 소망 없이 사는 것은 낙담스럽고 위로가 없으며 우울한 삶임에 틀림 없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확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극단적인 약함을 당하게 된다.

바울을 어려움과 사나운 원수들을 당하였다.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32).

사나운 무리들에 의하여 찢기고 데메드리오와 다른 직공들의 소동을 당할 위험에 있었다.

( 19:24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어떤 이들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짐승들과 싸웠다고 해석한다.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당한 일로 이해한다.

니케포러스(Nicephorus)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말하고 짐승들이 바울에게 접근했을 때에 유순한 기적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나 특별한 시험과 환경을 누군가 빼놓고 바울 자신이 그의 고난을 상세히 말할 때에 간과할 이가 없다.

 

참고 :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맞았으며)

그가 유대인들에 의하여 다섯 맞고 막대기로 맞고 돌로 침을 당하고 풍랑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 짐승과 싸웠다고 언급하지 않았음은 이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짐승들과 싸움은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의 짐승은 사나운 야생과 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바울은 말한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지 않으면 이러한 싸움에서 내가 무슨 유익을 가지겠는가? 죽은 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찌하여 내가 매일 죽으며 난폭한 손에 의하여 죽을 위험을 당하는가? 그리고 죽은 후에 멸망한다면(post mortem nihi), 후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불쌍한 일이 있겠는가?"

바울이 그렇게나 무식했을까?

바울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하도록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떤 여지를 주었던가?

죽는 것이 그에게 유익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다면 바울이 그의 생명을 던졌을까?

죽은 후에 보다 더좋은 생이 있다는 생각 외에 무엇이 이생의 사랑을 버리게 하겠는가?

"죽은 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나에게 무엇을 약속하겠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울이 그러하였고 우리의 주님이 그러했다.

( 12: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들도 그들의 본을 받도록 명령을 받고 우리의 열매를 거룩하게 바쳐 우리의 목표가 영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요 우리 영혼의 구원이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2. 둘째의 모순은 이생의 안락을 취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되는 것이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32).

식도락자가 되자.

선지자 이사야의 22 13절에 그렇게 나타난다.

(이사야의 22 13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짐승같이 죽으면 짐승같이 살도록 하자. 이것이 죽은 후에 부활이 없다면 생의 쾌락을 포기하고 생의 모든 비참함을 당하여 잔인하게 죽는 것보다 현명한 일일 것이다.

귀절은 분명히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린도 교인 중에서 부활을 부인한 사람은 사두개인이며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23:8). 이다.

인간은 육체이며 육의 것을 살릴 아무것도 없으며 죽으면 다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사두개인들에 대하여 반대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주장이 아무런 힘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다시 살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살리면 유익하기 때문이다.

아니 마음이 천국의 영광과 행복의 주된자리이며 주체이다.

만일 사후의 소망이 없다면 현명한 사람은 바울이 비참한 생애보다 안락한 생애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아니요 가능한 생애를 즐기게 것이다. 왜냐하면 생애는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생후의 소망보다 아무 것도 생애의 안위와 쾌락을 무시할 없게 하고 가난과 경멸과 비참과 죽음을 사랑할 없게 한다. 사도들과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았다. 만일 그들이 자기를 속이고 허망하고 헛된 소망으로 세상을 버렸다면 그들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고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 바울은 주의와 격려와 책망으로 그의 주장을 끝맺는다.

 

1. 나쁜 사람과 타락한 생활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위험한 교제를 피하도록 주의한다.

바울은 말한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33),

아마도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문란한 생활을 사람들이었고 타락한 원리로써 그들의 악한 행위를 지지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들의 입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먹고 마시자. 왜냐하면 내일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만일 장래의 세계가 없다면 그들의 말이 적절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신념을 논박한 후에 그들과의 교제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고한다.

만일 그들이 저들의 신념에 동조하면 그들에 의하여 타락하고 그들의 생활을 따를 것이라 하였다.

다음을 주목하자.

나쁜 친구와의 교제는 나쁜 사람을 만들기 쉽다.

잘못과 악은 전염된다.

감염을 피하려면 그들과 멀리해야 한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13:20).

2. 여기에서 저들의 죄에서 떠나 일어나서 보다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권면한다.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혹은 의롭게 깨어서(evkh,fate diai,wj) 죄를 짓지 말라.

"스스로 일어나서 회개하여 죄를 버리고 악한 길을 버리고 잘못을 고쳐 나태와 어리석음으로 기독교인의 소망을 삼키고 행위를 타락시킬 그러한 교제와 원리를 버리라."

내세에 대한 불신은 모든 덕과 경건을 말살시킨다. 진리에 대한 가장 어떤 개선은 죄를 그만두고 열심으로 신앙에 정진하는 일이다.

만일 부활과 장래의 생활이 있다면 그것을 믿는 사람답게 살고 행해야 한다. 우리의 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우리를 타락시키며 음란하게 만드는 주정뱅이와 같이 행하면 된다.

3. 그들 중에 얼마에게 주는 엄한 책망이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성질과 은혜와 통치에 대하여 모든 지식을 제공한다.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있음은 자신을 책망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나태와 하나님을 경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경시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그렇게나 무지하고 하나님에 관한 일에 그렇게나 무관심한 일이 무서운 수치가 아니겠는가?

부활과 장래의 생애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종들을 버리지 않으며 그들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렇게나 어려운 고통에 처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력과 인내를 잊을 만큼 불성실하며 불친절하시지 않음을 안다.

나는 표현이 보다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 가운데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의 일만 인정하는 무신론자가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 교회의 중상이며 수치이다.

마치 무신은 내세를 불신하는 근저에 있다. 하나님과 섭리와 세상의 생활이 얼마나 불공평하며 선한 사람이 얼마나 고난을 당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모든 일이 바로 판단을 받을 내세를 의심할 수가 없다.

*매튜 헨리의 주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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