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방문과 체류
성경 :〔고린도 전서 16:5-10〕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이 절에서 바울은 그들을 방문할 목적을 통고하고 설명한다.
1. 그의 목적에 대하여. 바울은 그때에 있었던 아시아에서 나와(8,19절 참고)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로 가서 그들과 함께 머물고 월동할 것을 의향했다.
(5-6절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오래 일했고 많은 유익을 줄 것을 희망했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머물고 그들을 보기를 원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참다운 기독교의 목사는 자기가 오래 일하고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 있다. 바울이 다른 의무가 허용해 주는 한 고린도에 가서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들 중에는 바울을 경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도와 영적 아버지에게 합당한 존경을 주는 사람도 많았다.
바울이 그들을 방문하여 머물고 싶은 것이 이상할 것인가?
나머지의 사람들, 즉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개선시키고 교회의 무질서를 바로 잡으며 그들과 함께 유하기를 원했다. 바울이 얼마나 좋은 효과를 기대한 것은 분명하다.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6절).
그들이 바울과 동행함이 아니고 바울의 여행을 촉진시키며 그를 격려하며 돕고 여비에 협조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행하기를 원했다.
(요삼 :6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그래서 부족한 것이 없이 하는 것이다.
(딤전 3: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그들 중에 더러는 바울의 체류가 그들의 당파심을 고치고 그들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기를 원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유익을 줄 전망을 가진 곳에 사도가 머무는 것은 당연하다.
2. 지금 그들을 만나지 않는 변명을 한다. 즉 지나가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7절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e,n paro,dw -- in transitu-en passant).
그것은 다만 순간적인 방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식욕만 돋구고 먹지 못하여 함께 있고 싶은 소망만 일으키고 만족하지 못한다.
바울은 그들을 너무 사랑하였기에 얼마 동안 머물 기회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것이 지나가는 길에 방문하는 것보다 그에게 더 기쁘고 그들에게 더 유익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지금 만나기를 원하지 않고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다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3. 이 목적에 대하여 제한이 있다.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7절).
사도들이 비록 성령의 감동으로 썼더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실까를 그들은 알 수가 없다.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그들과 함께 머물고 유익을 주기를 바랬다.
이것은 성령의 어떤 특별한 감동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동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형성된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가겠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바울 자신의 의향이었다.
우리의 목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행하겠다."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의 모든 목표는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약 4:15)
하나님의 허락없이 우리의 계획을 수행할 수가 없다. 우리가 모든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허락과 지도에 의함이다.
이방인도 신의 섭리를 인정하는데 우리는 더욱 이것을 인정하고 여기에 유의하여야 한다.
4. 당분간 에베소에 머물 바울의 의향이 나타나 있다.
오순절까지 그곳에 머물 것이라 말한다.
(8절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19절과 비교하여 이 절에서 서신을 쓸 때에 바울은 에베소에 있었던 것 같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라고 말한다.
에베소에서 보낸 적당한 인사이며 빌립보에 있었다면 적합치 않다. 많은 사본이 이런 추신을 가지고 있다.
만일 빌립보에서 보냈다면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라고 삽입했을 것이다.
5. 에베소에 머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9절).
에베소에서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많고 그에게 큰 성공을 주었다. 바울도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고, 더 많은 사람을 인도할 큰 희망이 있었다. 이 이유 때문에 에베소에 잠간 머물기를 결정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목회의 성공과 전망이 바울로 하여금 어떠한 장소에 머물고 노력하도록 했다. 넓고 효과적인 문이 열려있었으므로 대적자들도 많았다.
복음의 사역에 있어서 성공은 보통 많은 적을 만들어낸다.
사탄은 자기의 왕국을 치명적으로 공격하는 자들을 맹열히 반대하고 고통을 준다.
이 절은 바울이 로마의 원형극장을 은유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한 문에서 투사가 나오면 다른 문에서 도전자가 나온다.
참다운 용기는 반대에 의해서 고무된다. 바울의 열심히 반대자들의 정열로 불이 붙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들은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기에 열중하였다.
이 때에 바울이 그의 위치를 버리고 그의 인격과 교리에 치욕을 가져오겠는가?
바울은 대적자들에 의하여 위축됨이 없었고 그들이 날뛰고 반대하면 할수록 더욱 사역에 힘썼다.
바울이 도망을 하겠는가?
대적과 반대는 충성스럽고 성공적인 목사를 꺾을 수가 없고 그들의 정열에 불을 붙이고 새로운 용기로 감동시킨다. 참으로 헛된 노력이 실망을 시킨다. 이 일이 의기를 꺾고 마음을 상하게 한다.
적이 날뛰고 중상하고 박해하여도 사역만 성공하면 활력을 목사에게 준다. 목사를 누르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대적의 반대가 아니고 그의 청중의 고집과 후퇴와 거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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