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1일 월요일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성 경: [24:13-22]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4: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그 날에 - 여기 언급된 '그 날'은 앞에서 언급한 사건이 일어난

'안식 후 첫날'(1)을 가리키는데 관찰자의 시점이 옮겨갔다.

 

(1절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즉 앞에서 언급한 관찰자의 시점은 예수가 부활한 당일이었으나

현재의 관찰자는 먼 훗날 시점에서 부활 사건이 있었던 그날을 회고하고 있다.

 

그들 중 둘이 - 부활 현장을 목격한 여인들로부터 증언을 들었던 사림들이다.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 이 장면 묘사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긴박한 사건 묘사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즉 유월절 축제와 예수의 체포, 그리고 사형 집행과

빈 무덤의 발견으로 나타난 부활의 충격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긴박한 사건 전개와 그 사건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떠나

한적한 시골로 향하고 있는 두 사람에 초점을 맞춘 이 장면 묘사는

이야기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한다.

 

요컨데 이 사람들은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를

열렬히 추종했던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고 유월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던 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뜻하지 않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대가 좌절(挫折)된 경험을 안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기 언급된 '엠마오'라는 지명은 정확하게 고증되지 못하고 있다.

분문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이 십 오리 즉 10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십 오 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우스 혀세콘타'의 정확한 거리는 약 11.2km이다.

 

이 정도의 정보로 추정할 수 있는

두 개의 지명이 학자들 사이에 거론되고 있다.

 

첫째는,

욥바(Joppa)로 가는 방향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32km 지점에 위치한

'암와스'(Amwas)로 보는 경우인데(Lagrange, Metzger)

거리가 누가의 언급보다 배가 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걸어갈 수 있는 거리로서는

적당하지 못하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둘째,

유력한 장소는 예루살렘 서쪽 약 6km의 거리에 위치하였고

A.D.69-70년경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침입(侵入)으로 인해

식민지가 되었던 '칼로니에'(Kaloniye)이다(Weiss, K.Lake, Harrey).

 

이 지명 역시 거리의 차이가 문제인데 누가가 언급한 거리의 절반밖에 안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혹자(Benoit )의 말처럼 누가가 왕복거리로 언급했다고 추정한다면

그리고 하루에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에서

첫째 지명보다는 둘째 지명이 훨씬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이 모든 된 일을 -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즉 예수의 성전 숙정(肅整)을 비롯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빈 무덤으로 대두된 부활 문제를 서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 두 사람이 열심히 지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걸을 때 예수가 그들과 동행하기 시작함을 언급한다.

 

문맥으로 보아 예수께서 처음부터 동행한 것이 아니라

도중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여기서 묘사된 예수는 분명히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 생전(生前)에 가까이 있어서 예수의 얼굴을 매우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옆에 다가선 예수를 그들은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만을 생각했지, 정작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들 곁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크라테오)라는 말은 고정되고 변동이 없음을 뜻하는데

두 사람의 의식과 시각이 변함없음을 가리킨다.

 

이 말이 시사하는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두 사람의 의식과 시각이다.

즉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의식과 시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식 변화 또는 영적 각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둘째는, 부활한 예수의 존재 문제인데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즉 늘 함께 하였던 사람도 면전에서 알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길 가던 두 사람은 예수가 왔을 때 보통 사람으로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 비로소 부활한 예수와 길가는 두 사람과의 대화가

예수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예수의 질문 내용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었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누가는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을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가던 길을 멈추어 섰다.

이 두 사람은 예수의 죽음에 따른 깊은 실의(失意)에 빠져 있었으며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글로바라 하는 자 -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클레오파스'

밝혀지고 있으나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첫째는,

19:25에 언급된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견해(Alford, Gilmour )이며,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둘째는,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말에 근거하여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시몬의 아버지와 동일한 인물이자

예수의 삼촌이라는 설(Origen, Zahn )이 있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다.

 

두 견해의 다른 가능성에서 제시된 인물이 동일인일 수도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름을 언급한 점으로 보아 당시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이거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특히 유월절 행사에 참석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가족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따라서 동행한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신빙성있다 하겠다.

 

아들보다는 아내일 확율이 높은 것은 가족의 구성상

남편과 아내가 기본 구조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예수의

질문에 대한 글로바(Cleopas)의 대답은 핀잔 섞인 어투로 시작되고 있다.

 

글로바는 부활한 예수를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자신들과 같은 나그네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같은 곳에 머물렀으면서도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왜 혼자만 모르느냐는 반문(反問)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에 관한 사건이 예루살렘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큰 사건이었음을 반증해 준다.

 

 

 

[24: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무슨 일이냐 - 글로바의 흥분된 반응에 대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식으로 되묻는다.

 

이 같은 예수의 질문 의도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해명(解明)하기 위한 문제 제기였다.

 

즉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사건 이해에 대한 잘못된 것을 시정하고

바로 잡아주기 위해 그들의 견해를 직접 듣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하면서 예수의 언행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힌다.

 

그들은 예수를 '능력있는 선지자'(프로페테스 뒤나토스)로 말한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견해는 당시 일반 대중들의 의견과도 일치되는 보편적인 견해였다.

 

(9:19 대답하여 이르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그들 두 사람에 의하면 예수가 선지자로 보여 진 것은

그의 말과 행동에 권능(權能)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과 민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24: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두 번째로 그들은 예수의 처형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힌다.

 

그들은 하나님과 민중들로부터 인정받았던 능력있는 권능의 선지자 예수를

죽이게 한 주범들이 자신들의 종교, 정치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임을 천명한다.

 

여기에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예수를 처형한 책임이 전적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누가의 의도와 일치된다.

 

특히 두 사람이 '우리들의' 지도자임을 밝힌 사실은

예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대인의 책임을 더욱 강조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 - 그들이 갖고 있었던 세 번째 견해는 예수에게 걸었던 기대였다.

 

그들은 예수가 악의 세력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예수가 선언하였던 것처럼 하늘나라(The Kingdom of God)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따라서 그들은 예수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된 다른 세계를 기대하며 예수를 추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17절에 언급된 바처럼 얼굴에 슬픈 빛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걸었던 기대가 예수의 사형으로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 그들의 실망은 예수의 죽음 뿐 만이 아니라

예수가 죽은지 사흘이 지났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를 죽였던 그들이 여전히 세상의 주인이 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어투로 보아 그들은 어렴풋하게나마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하다. 즉 그들은 예수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적어도 사흘째 되면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사흘째까지

희망을 갖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희망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하소연하고 있다.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 이야기의 전개는 점점 감정을 고조시키면서

뜨거워지고 있다.

 

앞 구절에서 표현되었던 실망감에 덧붙여 경악스럽고 놀라운 사건을 언급하면서

10절에서 언급되었던 여인들을 소개한다.

 

(10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여기서 그들은 '우리들 중'이라는 말로써 그 여인들과 자신들의 관계를 언급한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10절에서 언급된 여인들과 동향(同鄕),

즉 갈릴리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친분이 있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우리'라는 의미로 볼 때 열두 제자들 외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어느 정도 고정된 숫자를 유지하며 공동의식(共同意識)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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