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5일 금요일

바로 그 날에 그들 중의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육십 스타디온쯤 떨어진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24:13-18 보라, 바로 그 날에 그들 중의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육십 스타디온쯤 떨어진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일어난 이 모든 일들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의논할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가까이 오사 그들과 동행하셨으나

16)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17)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것들이 무슨 대화이기에 너희가 슬퍼하느냐? 하시니

18) 그 중의 한 사람 곧 글로바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대답하여 그분께 이르되,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단지 나그네로 있기에 요즘 거기서 일어난 일들을 알지 못하느냐? 하거늘)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가 현현(顯現)하셨다는 사실을

다른 복음서에선 간략하게 언급하였으나 여기에선 비교적 길게 언급하고 있다.

 

(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그날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바로 그날,

그와 함께 부활한 새 세계의 첫날이었다.

 

그 둘 중의 한 사람은 "글로바" 혹은 "알패오"라 불리는 자로

고대 교부들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요셉의 형제라 한다.

 

다른 한 사람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어떤 학자는 그가 베드로일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날 베드로에게 특별히 나타나셨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듯하다.

그 사실에 대해선 열한 제자가 증언하고 있으며

 

(34절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바울도 이를 언급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고전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러나 그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베드로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이 돌아올 때 맞이한 "열한"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에 대해선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가

"두 사람" 중의 하나였다면 글로바가 아니라 그가 "대표적인 목격자"

지명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9절에 언급된 열한 사도와 함께 있던 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 이 두 제자들의 "여행""대화".

 

"그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도보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곳에 위치한 촌이었다.

여기에선 이십 오리, 7마일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13절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그곳에 사업상 가는지 아니면 친구를 만나러 가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들은 더 이상 이 예수에 대해선 미련을 버리고

갈릴리를 향해 고향으로 가던 중인 것 같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쉴 작정으로 다른 제자들에게

떠나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빠져 나온 것 같다.

왜냐하면 그날 아침 그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것을 "어리석은 이야기들"로 돌려 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재빨리 집으로 돌아갈 길을 모색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들은 여행하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14절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예루살렘에 있을 때엔 유대인들이 두려워

방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유대인들의 귀에서 멀어진 지금엔

아주 자유롭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 서로 따져 보았다.

그 결과에 따라 계속 고향으로 가든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판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그들이 함께 있을 때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눔이 합당한 일임을 명심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남의 지식을 계발시키고

남의 기억을 새롭게 하며 서로의 독실한 사랑을 증진시키게 된다.

 

 

.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도중에서 선한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15절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아마도 그들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그들의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며,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부정적으로 나왔을 것이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마치 그들과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는 이방인처럼 꾸며

그들이 "기꺼이 동행으로" 받아들이도록 다가섰다.

이 사실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적인 연대감을 유지하며 그에 대한 대화를 진행시켜 나갈 때

진지하게 말하는 두 사람을 돕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제 삼자로 참여하신 것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에 그는 "귀를 기울이고 들으시며" 진리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

그리하여 신앙과 사랑으로 꼬여진 그들은 "쉽게 끊여지지 않는 삼 겹 줄"이 된다.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중에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비교해가면서

그리스도를 구했으며 좀 더 그를 알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그를 만날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라.

 

그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내보이실 것이며

자기들이 지닌 지식을 위한 도구로써 그리스도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의 지혜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 곁엔 그리스도가 계셨지만 처음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16절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대상"에 변화가 있었으며

(마가복음에는 그때 "그는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감각기관에도 지장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혹은 다른 주석가가 생각하는 대로 "시야"에 혼동이 생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공기가 너무도 탁해 그가 누구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못 알아보았는지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렇게" 그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와 좀 더 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으

그도 그들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그 말씀의 효력은

그의 육체적인 모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 하였으며

그의 육체에 집착했던 제자들도 이제는 그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를 통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다는 것도 가르치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영적인 모습을 지니고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의 은혜를 계속 내려 주실 것임을 보여 주셨다.

 

 

.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

 

그리스도는 그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변장을 하거나 신분을 알지 못하게 하고 만나는 친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그들은 서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1. 그들에게 던진 그리스도의 첫 번째 질문은

"그들의" 현재 "슬픔"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엔 그 슬픔이 역력히 들어났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이것은 대단히 친절하고 다정한 물음이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들은 "슬퍼하고" 있었다. 그들이 슬퍼하고 있음은 이방인에게도 나타났다.

 

[1] 그들은 사랑하는 주인을 잃고 자신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그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빗나갔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였으며 무슨 수로 그 손해를

만회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그리스도가 떠나가 버릴 때

그들이 슬퍼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신랑"이 그들에게서 납치당했을 때

그들이 "금식"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2]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였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거나

알아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계속 슬픔 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종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에도

슬퍼하거나 걱정하곤 한다.

믿음이 약함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내릴 위로를 받지 못하곤 한다.

 

[3] 슬픔 가운데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로 가득 차 있거나 그의 행적이나 그가 우리를 위해

고난 받은 사실에 대해늘 염두에 두고 있다면(사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하나님과 그의 섭리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 및 사랑에 대해서

"마음의 충만한 것을 입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둘째, 참된 친구와 참된 대화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효과 있는 처방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슬플 때 각자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내어보내셨던 것처럼 둘씩 둘씩 흩어졌다.

왜냐하면 한 사람 보다는 둘이 나으며 특히 슬픔의 시기엔 더욱 그러했기 때문이다.

울음을 터뜨리게 한 것이 때로 울음을 그치게도 한다.

그리고 계속 반복해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와 친구들은 어느새

좀 맑은 기분을 갖게 될 것이다.

같이 울어 주는 사람은 서로 위로가 된다.

때로 그런 데서 제일 큰 위로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 대화의 내용을 물어보고

그들이 슬퍼하는 원인을 물었다.

 

"너희가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리스도는 이제 성별된 상태에 계셨지만 제자들에 대한 사랑엔

변함이 없어 그들을 위로할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는 마치 그들의 우울함을 보고 조심하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40: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우리 주 예수께선 그의 제자들의 슬픔과 걱정을 아시고

그들의 근심에 함께 참여하심을 명심하자.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몇 가지 있다.

 

[1] "붙임성 있게" 행동하라.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방인이었으며 그들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형편에서는 그는

이 심각한 두 제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까다롭거나 수줍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바람직한 단체에 소속되어 기쁨을 얻도록 하라.

 

[2] "동정심 있게" 행동하라.

 

우리의 친구들이 슬픔과 걱정에 싸여 있을 때엔,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보여 주신 것처럼 그들의 슬픔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위로와 조언을 해 주어야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라."

 

2.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대하여 그들은

그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글로바는 그에게 정중히 대답을 하였다.

 

그는 "우리가 얘기 하는 것에 대해 당신이 상관할 바가 뭐요?"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자기 걱정이나 하라고 돌려버리지 않았다.

 

우리도 우리에게 친절한 자들에 대해서 친절히 대해 주어야 하며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든지 정중히 대해야 함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당시가 위험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글로바는 이 이방인이 어떤 음모를 가지고 자기들에게 접근하여

해로운 짓을 하거나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지나 않나 하여 그를 경계하지는 않았다.

 

자비로운 행동은 "악을 도모하는것"이 아니다.

이방인에게라도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2) (글로바)는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수난 등으로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소!

예루살렘에 있었으면서 그곳에서 우리 주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나 되요"?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에 대해 알지 못한 자들이야말로

진짜 이방인들이었음을 명심하자.

 

(3) 글로바는 이 낯선 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려 주려고 하였으며

이 문제를 가지고 좀 더 그와 대화를 나누고자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사람의 얼굴만 보면 참지 못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자들은 최선을 다해 그 아는 바를 퍼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알도록 이끌어야 함을 명심하라.

그리고 이 제자들은 낯선 이에게 가르쳐 주려고 열을 올리다보니

그들이 그로 말미암아 가르침을 받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가진 자가 그 가진 것을 유익하게 쓸 때에 그에게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4) 글로바의 말로 미루어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예루살렘에서 큰 소란을 일으켰는데 그 도시에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온 도시 안에 이야기가 퍼졌고 사람들은 모이면 그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와 같이 사건의 진상은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성령 강림 이후 그 사실은 "설명되었다".

 

*메튜헨리의 주석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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