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3일 토요일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예수의 승천

 

성 경: [24:50-53]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4: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 누가복음의 에필로그(epilogue)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작별 장면이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나감'(여사고)으로 시작되고 있다.

 

'여사고'는 출애굽 사건을 묘사할 때 언급한 70인역의 용어라는 점에서 볼 때

누가는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어 내는 모습을 통해

또 다른 출애굽을 상징적(象徵的)으로 나타내려 했다고 볼 수 있다(Lohfink).

 

이들은 예루살렘 성을 벗어나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베다니'로 나갔는데

이 장소는 승천의 장소로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다.

 

(19: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1:12에 따르면 승천의 장소가 감람산이라고 언급되는데

장소의 모순은 발견되지 않는다.

 

(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하는 이 모습은

예수를 사제적인 모습으로 기리려고 하는 누가의 의도로 볼 수 있기도 하나(Lohfink),

누가는 사제의 모습으로

예수를 묘사하려 했던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I. H. Marshall).

 

이 같은 축복의 장면은 증인들의 활동이 인간적인 사역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되는 것이며,

그 같은 사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요청을 암시하는 것이다.

 

 

 

[24: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 누가는 예수가 축복을 할 때

그들로부터 떠났음을 하늘로 '올리워 갔다'(아네페레토)는 승천의 묘사로 그리고 있다.

 

개역 성경은 이 문구를 괄호로 묶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을 언급하지 않는 사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 16:18,19과 행 1:2,9에서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삭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16:18-19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1: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그러나 삭제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부활 후 사십 일 간 지상에서 머물렀다는 행 1:3의 언급과 모순된다는 점이다.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왜냐하면 여기서는 승천일이

부활한 날 밤이거나 그 이튿날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천에 관한 기사는 같은 저자의 기록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에 불일치(不一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막 16;19에서는 누가복음과 일치되고 있다.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모든 점을 염두에 둘 때 50-53절의 기록은

앞의 이야기와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50-53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어쨌든 승천에 관한 기사는 분명하게 일치되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다.

 

 

 

[24: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 승천하는 예수가

'예배'(프로수퀴네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이제부터 예수의 신성(神性)

인정되고 예배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제는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거니와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이적적 권능으로 인식되고,

제자들이 존재하는 근본 의의가 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그에게 경배하고'가 괄호로 묶여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누가는 이제부터의 복음의 내용을 곳곳에서 증언하고 상고하게 될 것임을

이 구절을 통해 언급하고 있다.

 

(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 실망과 좌절 그리고 두려움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다.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사실이 그들에게 새 힘과 용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 같은 묘사는 53절과 함께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사도들의 활동을

암시적으로 예시해 주고 있다.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4: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매우 진지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다.

 

첫째는,

성전 안에서 예수의 명령대로 위로부터 오는 능력,

즉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에게서 성전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전에서의 가르침과 관련 지어볼 때

기독교의 발생이 구약 전통(傳統)과 성전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21:37-38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는 점이다.

 

'찬송하니라' 대신에 '축복하다'(율로군테스)는 말로 언급되었든

또는 '찬양하고 축복하다'(아이눈테스 카이 율로군테스)로 되어 있든,

각 사본마다의 차이점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예수에 관한 사건 즉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사건을

모두 하나님과 관계된 사건으로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의 모든 활동과 삶 전체를 하나님과 관련시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누가는 또한 자신의 복음서를 마치면서,

자신의 책에 기록된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근거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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