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3
(눅 24:27-35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28) 그들이 가고 있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매 그분께서 더 가려는 것 같이 하시거늘
29) 그들이 그분께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묵으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 앞에 앉으셨을 때에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매
31) 그들의 눈이 열려 그들이 그분을 알아보았으나 그분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더라.
32) 그들이 서로 이르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열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는
33) 바로 그 시각에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한 자들이 같이 모여
34) 말하기를, 주께서 참으로 일어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 것을 보고
35) 길에서 일어난 일들과 그분께서 빵을 떼실 때에 자기들이 그분을 알게 된 일을 말하더라)
[3] 그는 메시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을 그들에게 자세히 풀이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말씀들이 나사렛 예수안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방금 전에 그들이 그에 대해 그에게 말했던 것보다 더 자세히
그에 대해 그들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
(27절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구약 최초의 영적인 성서 기록자, "모세와" 차례로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며" 그가 받은 고난이
그에 대해 기록한 예언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그는 모세로부터 시작하였다.
모세는 메시야께서 뱀에게 "그의 발꿈치를 물리겠으나" 그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가 산산조각 날것이라는 사실을 소상히 예언한
첫 번째 약속의 말씀을 기록한 자였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첫째, "모든 성서"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된 글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그것들을 "모아" "연결"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
아무도 성서의 어느 한 부분에 깊이 통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언가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
즉 어떤 것은 예언으로 어떤 것은 약속의 말씀으로,
어떤 것은 기도로 혹은 다른 형식의 내용으로라도 만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구약이라는 "광야에 숨겨진 보물"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은혜라는 황금실이 구약이라는 피복을 가로지르고 있다.
어디를 보나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둘째,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들은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이라면 학자라 할지라도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행 8: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말씀을 깨달았다고 아는 척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율법에 의해서
잘못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율법의 장막은 걷히고 신약은 구약을 설명하게 되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제일의 성서 주석가이다.
특히 자신(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부활 후에도 그는 이런 식으로 제자들을 자신에 대한 신비의 지식으로 인도하고 있다.
성서와 상관없는 새로운 말씀을 들려줌으로써가 아니라,
어떻게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는가를 보여 줌으로
그 말씀을 연구하도록 이끄심으로 인도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 자체도 구약 예언서의 두 번째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계시록도 계속 구약의 예언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모세나 예언자들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구제 불가능한 자들이다.
넷째, 성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 말씀들은 질서 있게 다루는
"조직적인" 연구를 함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구약의 빛은 "조금씩" 비추다가 "완성의 날"에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햇빛 나는 날"에 어떻게 "다양한 방법으로"(이어지는 예언은 언제나 전에 있었던 예언을 보충하고 빛을 비춘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대해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들(조상들)에 의해 우린 지금 그에 대해 "듣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릇된 목적을 갖고 성서를 펼친다. 그들은 계시록을 먼저 연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여기에 "모세로부터 시작"하라고 가르치시고 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Ⅳ.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길가는 중에 그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설교나 그가 인용하여 설명한 성경 말씀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는 것이 좋았을 것이나 구태여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다른 성경 말씀을 통해 그가 하신 말씀의 본질은 파악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자들은 그 말씀에 매료되어 그들의 여행이
의외로 빨리 끝났다고 여기에 되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28절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은 그곳에서 그날 밤을 "지내기로" 계획했던 것 같다.
1. 그들은 그에게 함께 머물기를 바랬다.
"예수는 더 가려는 것 같이 하시니," 그는 더 가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나
행동으로 더 가겠다는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이 오면 친절히 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의 예이므로 그는 그들이 머물 친구의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머물기를 청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갔을 것이다.
이처럼 여기엔 위선 같은 것은 없다.
방문객이 "주저 한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신의 집이나 가족에게 "주제넘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으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를 당신의 손님이나 동료로 기꺼이 맞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이게 되면 그는 당신의 초대를 쾌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신"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자 하는 자는 그를 초청하고 끈질기게 졸라야 한다.
때로 "그를 찾지 않는 자가 그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를 "찾는" 자는 분명히 그를 "만날" 기회가 올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다면 그것은 우리의 끈질긴 간구가
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여기에 "저희가 강권하여"라고 하였다.
그들은 모두 그를 붙잡고 부드럽고 간절한 폭력을 쓰면서
"우리와 함께 유하 사이다" 하였다.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기쁨과 유익함을 맛본 자들은
좀 더 함께 있기를 바라고, 하루 종일이라도 "함께 갈" 뿐 아니라
밤에라도 "함께 유하기를" 강권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됨을 유의하자.
"한 날이 다 지나도", "저녁이 가까우면" 우리는 우리가 쉴 곳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도 눈을 돌려 그에게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셔서
우리의 마음에 그를 사랑하고 선한 생각으로 가득하도록
우리를 가르쳐 달라며 "우리와 함께 유하기를" 부탁함이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셨다.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받은 바 은혜로 즐거움을 얻은 그들에게
더 많은 교훈과 위로를 주실 작정이었다.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간구하면,
"그에게로 들어가리라",고 약속하셨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 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30-31절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아마 그는 처음 동행했을 때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계속 그들과 나누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대가 길을 가든지, 집 안에 있든지" 하나님의 일을 말할 지어다.
저녁 식사가 마련되는 동안
(그 마을이 작고 초라한 곳이므로 식사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들과 "유익하고", "교훈적인" 대화를 계속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먹으며 앉아 있을 때" 그의 입술은 그들을 "먹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이 분이 예수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셨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1) 그들이 "음식을 먹으러 앉을 때," 그는 제자들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음식을 나누셨으며 그것을 보고 비로소 그들은 그가 예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그는 이 일을 평소에 하시던 것처럼 권위와 사랑을 보이시며,
옛날과 같은 태도와 몸짓으로,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일도 옛날과 같은 형식으로 하셨을 것이다.
이 떡은 보리떡 다섯 개처럼 "기적의" 떡도 아니요,
성만찬에 쓰였던 "성례적인" 떡도 아니라 그저 "평범한" 떡이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는 여기에서도 전에처럼 같은 형식을 취하셨다.
이는 특별한 성례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은총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요,
매일 먹는 양식에 대해 감사하며 축복을 구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요,
잘 사는 가정 뿐 아니라 우리 모든 가정에 우리 주님 주 예수께서
손수 일용할 양식을 마련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우치시기 위함이다.
우리도 어디든 가서 "음식을 먹으로 앉게" 되면
비록 음식이 볼품없고 입에 맞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를 식탁 끝머리에 앉히고
음식은 그가 "우리에게 축복하신" 것으로 알고 그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며",
그가 우리에게 "축사하신" 모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믿음으로 그 음식이 그리스도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의 축복이 함께 한 음식임을 알게 될 때 우린 기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2) 그때 "저희 눈이 밝아져" 그가 누구인지 보게 되고 "그 인줄 알아보았다".
지금까지 그를 몰라보게 한 것이 무엇이었든지 이제 그것이 사라져 버렸다.
안개가 사라지고 베일이 걷히면서 그가 그들의 주님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는 타당하고 거룩한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형상을 쓸 수도 있으나
다른 사람이 그의 형상을 쓸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바로 주님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의 성령과 은혜를 통해 그의 백성들의 영혼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알아보자.
[1] 성경 말씀을 펴 주신다.
성경 말씀은 "그 말씀을 구하며" 그 말씀 안에서 그를 찾는 자들에게
그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성만찬의 예식을 통해 주의 식탁에서 만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성례를 통해 자신을 그들에게 밝히시며 "떡을 떼시는 중에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신다."
[3] 그러나 베드로의 회심과 같이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열고
마음에 끼었던 때를 벗겨버리심으로 그 일은 완전히 이루어진다.
계시를 주신 그 분께서 오성(悟性)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린 계속 어둠 속에 머물게 된다.
3. 그는 그 순간 사라졌다.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Afantoj evge,neto - 즉 그는 자신을 감추셨고 갑자기 사라지셨으며
"보이지 않으셨다." 또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그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후에도 그가 고난받고 죽었을 당시와 "같은 몸"이었고
그 흉기 자국까지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이미 상당한 변화를 일으켜
그가 합당하다고 여겨질 때엔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게
변할 수 있는 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영광의 몸"이 되는 첫째 단계가 아니었을까 한다.
제자들에게 잠깐 자신의 모습을 비춘 후 그는 즉시 사라지셨다.
그러한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그리스도 환상은 오늘 우리들도 보게 된다.
우리도 그를 본다. 그러나 잠시 후엔 다시 그의 모습이 사라진다.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그때엔 그를 영원히 뵐 수 있게 될 것이다.
Ⅴ. 이같은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마음에 느낀 생각과 이 사실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형제들에게 보고한 내용이 계속된다.
1.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나누신 대화를 통해 느낀 감정
(32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
"그래, 내 마음은 그랬어" 하고 한 제자가 말하자 "내 마음도 그랬어"라고
다른 제자도 동의하였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그처럼 깊은 감명을 받기는 처음일세.
이와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설교 말씀에 견주어 "소리"를
비교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교해 보았다.
비록 설교자가 누구인줄 알지는 못했었지만
그 설교는 능력 있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일을 그들에게 간단하고 자세히 풀이해 주었다.
그리고 특히 더 귀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그들의 영혼에 "거룩한 빛"과 함께, "거룩한 열정"이 생겨났으며
그들 마음속에 경건하고 간절한 사랑의 불이 붙여진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다시 생겨남으로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지금까지 함께 대화를 나눈 그 분이 바로 "예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누구였는지 좀 더 빨리 알아채지 못했으니 우리 같은 바보가 어디 있을까!
그 외에 어느 누군가, 그분의 말씀 외에 어떤 말씀이
이처럼 우리 속에서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으랴.
마음의 열쇠를 가진 분은 그 분밖에 없다.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어떤 "설교"가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선을 이루는" 설교인가.
"쉬운 설교" 우리의 수준에 맞으며 친근성 있는 설교 -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성경적인 설교." - "우리에게 성경을" - 자신에 관계되는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성경에 있는 신앙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성경에 있지 않은 교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성경의 말씀이 그들의 지식의 샘이며 신앙의 근본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한 성경 말씀을 그들에게 풀이해 주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고 동시에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음을 명심하자.
(2) 어떤 "반응"이 "선을 이루는" 반응인가?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로 인하여 큰 감명을 받았을 때,
특히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큰 감명을 받아
그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그를 사랑함으로 용솟음칠 때,
경건한 사랑과 헌신으로 사로잡힐 때, 우리 마음은 "우리 안에서 뜨거워진다."
우리 마음이 앙양되고 용솟음칠 때,
불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위로 날아오를" 때,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불이 당겨져 뜨거운 열심을 품고
우리 자신이나 이웃 안에 있는 죄를 멀리하게 되며,
어느 정도나마 "심판의 성령"과, "소멸의 성령"으로 죄에서 깨끗함을 입게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은 이처럼 불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예루살렘에 있던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33절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곧 그 시로 일어나."
그리스도를 만나 기쁨에 사로잡힌 그들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미 어두워졌으나 그들은 전속력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지금까지 생각하였던 것들은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엠마오에서 그날 밤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어,
그들의 떨리는 믿음을 굳게 해 주고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그 위로"로
슬픈 영혼들을 위로해 주지 않고는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들의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당신이 거듭나고, 위로받고, 교훈 받았다면 당신의 형제를 도우시오.
이 제자들은 이 일로 인해서 "충만"한 상태였기에 형제들에게 돌아가
주님이 부활하셨던 소식을 전할 뿐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같이 나누어야만 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들이 제자들에게 돌아갔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다른 증거를 가지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평소에 낯이 익었던 열 한 제자들은 밤늦게까지 "함께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위급한 시기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le,goutaj 원본에 보는 대로 이들은
"두" 제자가 아니라 열 한 제자들이다.
그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두 제자가 들어오자 그들은 기쁨과 환희에 넘쳐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34절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다른 제자들 보다 먼저 만나보았다는 사실은
고린도 전서 15장 5절에 기록되어 있다.
(고전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천사가 여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부활한 사실을 특히 베드로에게 알리라고 한 것을 보아
(막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우리 주 예수께서 바로 그날 "천사들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것이라는 가정은 상당한 신빙성을 지니고 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형제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베드로 자신이 여기서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두 제자에게 말해 주지 않고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회개한 자로서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기쁨에 겨워 "주께서 과연 o;ntwj - 즉 살아나시고"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부활은 이미 기정의 사실이었다. 아무도 의심하는 자가 없었다.
여인들에게 뿐 아니라 시몬에게도 나타났으니 말이다.
(2) 두 제자들은 그들이 본 것을 말하여 부활의 증거를 더 보충하였다.
(35절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을 말하더라."
길 가던 중 그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끼쳐
여기에선 "길에서 된 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공허한 소리가 아니라
"영이며 생명이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놀라운 일들이 전혀 예기치 못하던 곳,
그냥 지나쳐 버렸던 곳, "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그때에야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다는 사실도 말하였다.
그때 그가 떡을 떼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나누어주실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그를 알아보게 하셨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각자 경험하고 체험한 것들을 비교하면
서로 느낀 바와 아는 바를 교환하는 것은
진리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서 큰 유익이 됨을 깊이 명심하자.
*메튜헨리의 주석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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