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7일 목요일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빈 무덤

 

성 경: [24:1-4]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예수의 부활(1-49), 및 승천(50-53)에 대한 기사로써 본서를 끝맺고 있는 결론 부분이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각 복음서의 끝을 장식하고 있는 최종 메시지이긴 하지만

누가의 기록은

 

(1) 예수의 부활이 허구(虛構)가 이닌 실제 사건임을 강조하며

(2) 그 사건이 지니는 예언적, 구속사적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이와 더불어 누가는 보혜사(保惠師)에 대한 예수의 약속,

및 승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태동 및 성장 과정의 배경이 된다.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안식 후 첫날 새벽 - 사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활의 날은

안식일 즉 토요일 다음날인 일요일이었다.

 

여기서 '안식 후 첫날'(on the fisrst day of the week, NIV)

셈족어의(Semitic) 영향을 받은 것으로(Josephus)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표현이었다.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고전 16: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하지만 이날은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이후로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던 유대인의 전통을 깨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즉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이것이 곧 오늘날 기독교회가 지키고 있는 주일의 기원이다.

 

한편 '첫날 새벽'은 토요일 저녁 여섯시 경부터 일요일 저녁 여섯 시경까지가

첫날이므로 일요일 새벽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는 언급이 없으나 막 16:1,2에서는 여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토요일 밤에 향품을 사 두었다가 해 돋는 대로 무덤으로 갔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16:1-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그렇다면 23:56에서 언급된 향품은 안식일 다음날의 첫 시간대인

토요일 밤에 준비한 것이며 무덤으로 간 시각은

일요일 새벽 동틀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23: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24: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 본서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았다는

이야기가 언급된 적이 없었지만,

27:66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고 인봉까지 한 후 병사들을 지키게 하였다고 언급되었으며

 

(27: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15:46에서도 무덤을 돌로 막았다는 언급이 있다.

 

(15: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그리고 마가에 따르면 여인들은 무덤을 향해 가면서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어떻게 옮길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는 그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는 누가 특유의 간결성과 사건 전개의 극적 효과를 상기시켜 준다.

 

즉 여인들이 무덤 가까이에서 무덤이 열린 것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을

직접 언급함으로서 그들이 받은 충격과 놀람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 부활 사건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이적적 사건이었음을 복선적으로 암시해 준다. (Grundmann).

 

한편 마태는 무덤의 돌문이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에 의해

지진과 함께 열려졌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28: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이는 부활의 사건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초자연적인

종말적 사건으로 묘사한 마태의 독특한 저작(著作) 의도를 반영해 준다.

 

 

[24: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암시를 주고 있으며,

첫 번째 암시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신비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주 예수의 시체'(토 소마 투 퀴리우 예수)23:52

'예수의 시체'라는 말과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 표현 같다.

 

(23:52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즉 어떤 사본들에는 ''(퀴리우)라는 단어가 삭제되고

그냥 '예수의'(투 예수)만 언급되고 있으나(Marshall),

다른 많은 사본들에는 '주 예수'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이같은 차이는 필사(筆寫)자들의 신학적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 앞에 ''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새로운 호칭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1: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침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만 받을 뿐이더라).

 

따라서 23:52'예수의 시체'는 부활 이전의 표현이고,

여기서 언급된 '주 예수의 시체'는 부활한 예수를 의식하여 나타낸

함축성 있는 표현으로 봄이 타당하다.

 

 

[24: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 -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대한

여인들의 반응을 누가의 독특한 표현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여인들이 근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이 근심한 것은 아마도 마 27:64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7: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 예수의 시체가 안 보이는 고로

여인들이 심히 당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들 곁에 나타난

두 사람의 정체에 대한 간접적 묘사인 이 구절은 천사를 암시한다.

 

16:5에서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고 언급되고,

 

(16: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28:2,3에서는

'눈 같이 흰 옷을 입은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언급된다.

 

(28:2-3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찬란한 옷'을 입었다는 말은 천사들과 하늘에 사는 존재를 표현하는 상징적 어법이다.

 

(10:30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이 같은 표현은 변화산 사건에서도 묘사되고,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승천(昇天) 사건 때에도 묘사된다.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그런데 '천사'를 누가는 '사람'으로,

마가는 '한 청년'으로 언급하였다.

이는 천사의 모습이

사람의 형상을 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 달리 천사의 수효가 두 명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변화산 사건과 예수의 승천에서 나타난 두 사람과

병행시키려는 누가의 독특한 의도로 보여진다.(Stuhlmueller).

 

그러나 요 20:12에서도 두 명의 천사가 언급된다는 점에서

누가만의 독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I. H. Marshall).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부활에 대한 중대한 증언을 두 사람으로 하는 것은 어떤 일에 보증을 설 때,

두 사람으로 하는 것이 한 사람보다 더 확실성 있는 보증이 된다는

유대인의 전통적 사상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