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2
(눅 24:19-26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무슨 일들이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나사렛 예수님에 관한 일들이니 그분은 하나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에 능력 있는 대언자였는데
20) 수제사장들과 우리의 치리자들이 그분을 넘겨주어 죽도록 정죄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
22) 또 우리 일행 중에 어떤 여자들도 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였으니 그들이 일찍 돌무덤에 갔다가
23) 그분의 몸은 보지 못하고 와서 말하기를 자기들도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말한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였으며
24) 또 우리와 함께 있던 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돌무덤에 가서 참으로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그분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니라.
25)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 어리석고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시고)
3. 그리스도께서는 대답 대신에 "그들의 지식"에 대하여 질문하셨다.
(19절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이렇게 물으심으로 더욱 자신을 낯선 자로 보이게 하셨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통의 보상인 장래에 받을 기쁨과 비교하여
자기가 받은 고난을 가볍게 여기셨다.
이제 그는 자기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는데
무슨 이유로 다시 자신의 고난을 돌이켜 보시려는 것일까?
"무슨 일이뇨?"
그에겐 무슨 일인지 알 이유가 있었다.
그에겐 쓰라린 일이었고 무거운 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무슨 일이뇨?"하고 묻고 계신다.
슬픔은 사라졌다. 우리의 구원이 오게 됨으로 기쁨이 임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약한 중에서도 기쁨을 얻으셨다.
우리도 그를 위하여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2)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을 자는 우선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 것이 무엇인지
그에게 시험받아야 한다.
그들은 그에게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는 그들에게 이 일들의 참 뜻을 말해 주며 그 신비에 이르게 할 것이다.
4. 여기에 대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기이한 사건과
현재 상황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들이 말한 내용을 고찰해 보자.
(19절 이하,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1)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품"을 요약해 주었다.
그들이 골몰하여 생각하고 있는 "일"은
"나사렛 예수"(평소에 그렇게 불리웠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예언자였고" 하늘로부터 온 교사였다.
그는 진실 되고 놀라운 하나의 교훈을 가르쳤는데
그 말씀은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늘을 향하여 인도하는 말씀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영광스런 기적, 자비의 기적을 통하여 그 말씀을
보증하심으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시에 능하신 분"이었다.
즉 그는 하늘의 크신 사랑이었으며 동시에 이 땅에는 크신 축복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은 자이며 그의 백성들이 존경하던 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크게 흡족하신 분이었으며 나라 안에서 큰 명예를 입었던 자였다.
"모든 백성 앞에서 위대한" 자들은 많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사랑 받지만 보통 "하나님 앞에선" 그렇지 못하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런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나 백성들 앞에서"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능하신 분이었다.
예루살렘에 있었으면서도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이방인밖에 없을 것이다.
(2) 그의 죽음과 고난에 대한 겸손한 설명을 하였다.
(20절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사랑받던 이였으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하나님과 백성에게 죄를 지으며 그를 로마 권력에 넘겨주어
사형 판결을 받게 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들이 이 사실을 더 과장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자들의 죄를
더 신랄하게 공격하지 않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지만,
아마도 그 이유는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 치더라도 전혀 낯선 자에게 이야기할 땐
그들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대해 욕을 하는 것을 삼가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3) 여기에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로써
그에 대하여 가졌던 기대가 실망으로 끝났다는 암시가 보인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21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우리는 그가 모세처럼 예언자이기를 기대했으며 또한 모세처럼
구원자가 되기를 바랐던 자들입니다".
"구속(救贖)을 바라던" 자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바라던 자들은 그를 기대하였고
그가 큰 일을 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기대가 미워지면 마음이 상하는 법"
특히 이와 같은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면 상심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이 실망하는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기대에 대한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며
주 예수의 죽으심이야말로 희망의 근거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말하길)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할 자가 그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그들의 구속의 값을 치르려고 그가 죽으신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을 그 죄에서 구하기 위하여 그가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이제 이 가장 힘든 과업을 마치셨으니
"이 자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 분이심을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 셈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4) 그의 부활에 대해 듣고 놀란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1]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오늘이 사흘째요.
오늘이 바로 그가 다시 살아나셔서 영광과 화려함 속에 서셔서
사흘 전에 치욕을 당하신 그대로 이번엔 영광중에 자신을 내보이시기로 한 날입니다.
그런데 우린 아직 그런 징조를 보지 못했지요.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그를 박해했던 자들을 깨우치고 혼란에 빠트리며
제자들에겐 위로를 가져다 줄 그런 징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게 조용합니다."
[2] 그가 부활했다는 얘기가 그들 사이에 퍼져 있음을 말하고는 있으나
그들은 그 얘기를 아주 피상적으로 할 뿐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암시를 나타내고 있다.
(22-23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으니(단지 놀랄 일뿐이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그가 살아 나셨다’라고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라고 전할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 얘기를 그들이 환상을 본 것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난다면 제자들에게 나타날 것이지 여인들에게 나타났겠습니까?
또 여인들은 쉽게 흥분해 버리기 때문이다."
[3] 그들은 몇몇 제자들이 무덤을 찾아 가 보았을 때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24절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살아나지 않았다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약 다시 살아났다면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그가 살아났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고 따라서 이제 와서 그를 기다릴 이유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그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과
그의 무덤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5) 우리 주 예수는 얼굴로는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시지는 않으셨지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을 알리셨다.
[1] 그는 분별력 없고 구약의 예언을 믿지 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아",
(25절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들에게 "어리석은 자야"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금하신 것은 올바른 책망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비난을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우리가 마음에 품어선 안 될 "악(惡)한 자들"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약(弱)한 자들"이란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신 것이다.
그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 불러 마땅하였다.
그는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엉뚱한 짓을 하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자기의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얻을 위로까지 포기하는
그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비난받은 "어리석음"이란
첫째, "믿기를 더디 하는 것"이다.
무신론자, 불신자와 자유주의자들은 신앙인을 어리석은 자로 낙인찍으며,
가장 성스런 신앙을 경거망동한 맹신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더디 믿으며" 공정하게 그 신앙을
평가하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멀리하는 자야말로 "어리석은 자"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둘째, "예언자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것.
그리스도는 그들이 여인이나 천사의 말을 더디 믿는 것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선지자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것"에 대해 책망하신다.
그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명심하였더라면
그날 아침(그가 죽은 후 사흘째 되는 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확신하듯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들의 연속"을 보았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섭리"의 증거를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성경의 말씀과 "대화를 나눈다면",
그리고 성서의 말씀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있다면
우리를 때때로 곤경에 빠지게 만드는 복잡한 문제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2]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도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으며 그의 영광을 믿지 못하게 하였던
그의 수난이 오히려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다른 길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26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약속된 메시야는 고난을 받아야 그 후 통치하시며,
십자가를 통하여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되고
이제 그 선포가 밝히 드러나지 않았느냐?"
그들은 이사야 53장이나 다니엘 9장을 읽어보지도 못했는가?
그곳에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뒤를 따른 영광"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 십자가의 비밀을 벗기는 두 가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첫째, 메시야는 이 모든 일로 고난 받으셔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그의 수난은 그가 메시야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증거가 된다.
이는 마치 성도들의 고통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수난은 그들의 기대를 모두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망의 진정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가 "수난자"가 아니었다면 "구속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행하신 것은 계획에 의한 것이었으나
이를 수행함에는 고난과 죽음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둘째, 그가 이 모든 일을 끝냈을 때 "자기의 영광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는 부활로써 그 영광에 들어가셨다. 이것이 위로 향한 그의 첫 발걸음이었다.
"자기의" 영광이라고 기록된 것을 주의하라.
그것은 "마땅히 그에게 주어질"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이 있기 전에 그가 지니고 있었던 영광이었다.
그는 그 영광에 "들어가야만" 하였다.
고난을 통해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처럼
그 영광을 통해서 비로소 성서의 말씀이 완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수난을 받고 다음으로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치욕"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우리도 먼저 "가시" 면류관을,
그리고 다음으로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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