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하심
성 경: [눅 23:44-48]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56)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눅 23: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 제 육세쯤 되어 - 예수의 운명에 대한 묘사에 앞서 그 시각을 언급하면서 누가는 정확한 시각을 지시하지 않고 어림잡은 시각임을 나타내기 위해 '쯤'이라는 비교 부사 '호세이'를 사용하고 있다.
* 비교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9: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2: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반면에 마태는
'제 육시로부터’
(마 27: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마가는 '제 육시가 되매'라고 비교적 정확하게 언급한다.
(막 15: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막 15:25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각이 제 삼시였는데 그렇다면 예수는 못에 박힌 채 세 시간을 달려 있었던 셈이 된다.
(막 15: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현대의 시간 구분에 따르면 오전 아홉시부터 정오까지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신 시각은 제 구시이다.
▶ 해가 빛을 잃고 - 세 복음서 모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공통되게 기록하며 누가만이 이 구절을 첨가하고 있다.
이 표현이 천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가장 밝은 때라고 할 수 있는 제 육시 경부터 제 구시 까지 어두움이 임했던 사실로 볼 때 단순히 구름이 가려 어두워진 것은 아니라 하겠다.
한편 이 어두움에 관해 혹자는 가견적(可見的)으로 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으로 보는가 하면(Luther, Calvin, Zahn),
또는 어떤 사람은 이것이 천체의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으심을 슬퍼하는 하나의 문학적 표현을 나타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Morris).
이중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을 것 같다.
[눅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 세 시간에 결쳐 어두움이 깔린 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여기서 언급된 '휘장'(카나페타스마)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친 휘장인 것으로 보인다.
(출 26:31-33 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32) 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33) 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성소에는 제사장이 매일 또는 안식일과 제사 때마다 들어갔으며
(출 27:21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30:7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레 4:7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24:3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8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다.
(레 16:1-2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히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유는 성소에는 제사장들의 제사 도구와 예물이 있으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 지성소의 거룩함을 보존하고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레 16: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한편 누가는 휘장이 찢어짐을 '찢어졌다'(에스키스데)라는 수동태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발생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누가는 휘장의 '한가운데'(메손)가 찢어졌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마태와 마가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언급하는데 이러한 세 복음의 표현은 휘장이 완전히 찢어졌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사실은 예수의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새롭고 산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
(히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을 예수의 육체와 동일시하였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이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적(中保的)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이제 예수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이는 위선과 형식주의로 부패해진 유대교의 가증스러움에 대한 심판 경고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성 경: [눅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운명 직전에 부르짖으신 예수의 마지막 외침이다.
누가의 표현은 마태나 마가와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1) 누가는 예수의 운명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뒤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한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가 죽은 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막 15:37-38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2)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두 번 크게 소리 지른 것으로 밝히면서
첫 번째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밝혔지만,
운명 직전에는 크게 소리만 질럿다고 언급한다.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막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 마태와 마가는 또다시 어떤 사람들이 예수의 외침을 듣고 신포도주를 예수에게 준 사실과 희롱하는 장면을 언급하지만 누가의 경우 전혀 그러한 언급이 없다.
(마 27:47-49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막 15:35-36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이 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차이는 성소 휘장이 찢어지는 상징적 사건을 예수의 죽음 전에 기록함으로써 예수께서 구속 역사를 온전히 완수(完遂)하신 후 운명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같은 추측은 요 19:30에서 언급된 바처럼 '다 이루었다'라고 말한 후 운명하신 사실과도 잘 어울린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두 번째 차이는, 마태와 마가의 표현에 나오는 고뇌에 찬 부르짖음을 생략하고 담대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시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순종하는 예수의 모습과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죽음에 대한 자세를 부각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세 번째 차이 역시 희롱당하는 수치스런 예수의 모습을 가급적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 숨지시니라(여세프뉴센) -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표현할 때만 사용된 이 단어는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숨을 쉬다'라는 뜻인데
*참조 : (막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마태는 독특하게 '영혼이 떠났다'(아페켄 토프뉴마)라고 언급한다.
[눅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 백 명의 군대를 지휘하는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예수의 의로움을 증언하는 내용으로서 앞서 41절에서 사형수가 고백했던 예수의 의로움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사형 집행 책임자로 보이는 백부장의 이같은 고백은 이제까지 당했던 예수의 수치스러움과 고난이 정당(正當)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백부장이 예수를 의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 된 일'(토 게노메논)이란 세 시간에 걸쳐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덮인 사건과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말한다.
(44-46절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한편 마태는 휘장이 찢어진 사건 외에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이 열려 부활하는 성도와 예수의 성도들이 부활하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마 27:51-53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이같은 일을 보고 백부장외 예수를 지키던 사람까지 함께 고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은총과 신적능력의 나타남에 대한 누가의 독특한 반응이다.
(2;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5: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3: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7: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또 평행본문 마 27:54; 막 15:39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반면
(마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막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누가는 '의인'(디카이오스)이라고 말하는 데 이방인을 주로 염두에 둔 누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보다는 '의인'이라는 법정 용어가 이방인에게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눅 23: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 백부장의 증언을 소개한데 이어 누가는 사형 집행을 구경하러 모인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구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리아'는 신약 성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며 일반적으로 극장의 쇼(show)를 구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무리들 중 대부분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몰려들었지만,
너무도 참혹한 예수의 모습과 형 집행 과정에서 되어진 여러 사건들을 목격하고는 저마다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돌아갔던 것이다.
과연 이들이 예수께 대항하며 소리쳤던 전날의 과오(過誤)를 뉘우치며 진정한 회개를 나타내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양심이 심하게 아팠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 장면을 베드로의 오순절설교 당시의 상황과 연결시켜볼 수 있다.
(행 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고 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행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회개의 길로 돌아섰던 것이다.
(행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눅 23: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 - 누가는 십자가 처형에 관한 이야기를 예수의 측근자와 고향 사람들을 목격자로 언급함으로써 마무리 짓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아는 자들'은 예수와 가까이 지냈던 자들 특히 예수의 제자들까지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에 관해서는 마태와 마가는 몇몇 여인들의 신분을 밝히며 구체적으로 언급하나
(마 27:55-56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막 15:40-41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누가는 여기서 어떤 여인들인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 이미 8:2,3에서 여자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밝히지 않은 듯하다.
(8:2-3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은 관망의 의미로 해석되거나 두려워하는 비겁함으로 비칠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가 무서워하며 멀직이 따라갔다는 말처럼, 그들도 예수의 일당이라고 붙잡힐까 하는 두려움으로 예수의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았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추측은 다소 사실과 거리가 멀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떠나갔지만 이들만큼은 떠날 수 없어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흠모했던 분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삭이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예수의 처형대(處刑臺)로 좇아가고 싶었으나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를 지키고 있어 또 주위의 일정한 공간을 경비하고 있었으므로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