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을 방문하신 그리스도
(눅 24:36-42 그들이 이같이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의 한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라.
37) 그러나 그들이 무서워하고 놀라며 자기들이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
38)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염려하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니라.
40)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자기 손과 발을 보이시니라.
41) 그들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할 때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여기에 너희에게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과 벌집 한 조각을 그분께 드리매(한글 KJV)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날에 ‘다섯 번’ 자신을 나타내셨다.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 개인에게 나타나셨고
(요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제자들에게 얘기하러 가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
(마 28: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베드로에게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
이제 밤중에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는데 요한복음 20장 19절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기록되고 있다.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Ⅰ. 그가 그들에게 나타남으로 그들은 크게 "놀랐다".
그는 아주 "적절한 때에"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를 가지고 분석하고 있었다.
"이 말을 할 때에",
즉 지금까지 보고된 내용을 놓고 그것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되는지 그 여부를 따지며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문제 삼고 토론하려는" 순간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다".
서로 위로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에겐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증거하시고 위로하셨듯이)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증거하시리라"는 보증을 받게 된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위로"의 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볼 때 지금 그리스도가 그들을 방문하신 것은
사랑과 우정의 방문이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주께서 고난 받을 때 비록 그들은 무정하게 그를 버렸지만,
그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그는 우리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를 보았다는 자들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불신앙에 매여 있지 않도록 이제 "그 자신"이 오셨다.
전에 그는 부활 후에 "그들을 갈릴리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을 그들에게 보이고 싶으셔서
약속을 앞당겨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선 때로 자기 말씀보다 더 "선한 것"을 이루신다.
그러나 보다 더 "악한 것"은 결코 이루시지 않는다.
이제 그들에게 하신 첫마디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였다.
의례적인 인사가 아닌 위안의 말씀이었다.
유대인들 사이엔 평범하게 주고받은 인사말이었다.
그가 비록 지금은 성별된 자리에 들어가셨지만 이처럼 말씀하심으로
그래도 제자들과 가까이 하시려는 평소의 자상함을 나타내셨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만 높아지면 옛 친구조차 잊어버리고 그들을 깔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들과 가까이 하심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첫 마디를 던지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부인한 것"에 대해서
베드로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것"에 대해서
제자들과 담판 지으러 오신 것이 아님을 암시하셨다.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였으며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시려는 의미로 "평강으로 오셨다."
2. 그로 인하여 제자들은 심히 "놀랐다".
(37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그들이 영을 보는 것이 아닌가"하여 "놀라고 무서워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 인기척도 없이 그들 가운데 들어왔으며
그들이 미처 알아보기도 전에 그들 가운데 서 계셨기 때문이다.
(마 14: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제자들이 "유령이다"고 말했을 때 쓰인
단어는 fa,ntasma - 즉 허깨비, 혹은 요괴이지만
여기에 쓰인 단어는 pneu/ma - 즉 영혼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들은 실지 몸을 입지 않은 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영의 세계와 비슷하거나 비교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세계에 호기심이 많다 할지라도 물질과 감각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엔
그와 같은 영이 전혀 다른 본질로써 우리에게 나타나
함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떨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언가 전혀 이상한 일이며 이상한 일을 징조이기 때문이다.
Ⅱ. 그와 대화를 나눔으로 그들은 큰 "만족"을 얻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이유 없이 두려워하는 그들에 대한 책망.
"어찌하여 두려워하는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두려워" 할 때엔 언제나 "우리 마음에" 우리를 해치는
"의심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때로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 때문에
"두려워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슬픔이나 걱정은 자신의 환상이 만들어내는 의심으로부터 생겨났다.
때로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은 걱정의 소산인 경우도 있다.
밖으론 놀라고 속으론 두려워하게 된다.
우울하고 마음에 두렵게 하는 것들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며
자신에게도 동요를 일으키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이다."
"나는 이제 당신의 눈길에서 벗어났습니다. 주께선 나를 버리셨고 나를 잊으셨나이다."
(2)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골치 아픈 의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로부터 생겨난다.
그들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영으로 생각하였고", 그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가까운 형제"임을 잊고
영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에서 먼 것처럼
그를 우리와 멀리 있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치시고 시험하실 때,
그의 섭리로 우리를 시험하고 회개시키실 때,
우린 그가 우리를 해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게 된다.
(3)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의심은 언제든지 주 예수께서는 알게 된다.
일어나는 즉시 알게 되는데 이것은 그를 유감스럽게 만든다.
그러한 "의심"을 품은 제자들을 꾸짖으셔서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그런 의심을 품는 것을 꾸짖도록 가르치셨다.
"내 영혼아, 너는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어찌하여 "선도 아니면 진리도 아니고" "근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며",
다만 하나님 안에서 누릴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며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사탄에게만 유익을 주며
우리 앞에 놓인 위로를 얻지 못하게 하는 "의심이 일어나느냐?"
2. 그들에게 자신의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셨다.
그들에게 자신이 "영이 아님"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을 "없이하셨고", 부활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보여 줌으로써 그 신앙에 자신을 가지고 전 세계에 전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 증거는 두 가지였다.
(1)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몸, 특히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 눈에도 모습, 체격과 외형에 있어서 그들의 주님과 비슷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의 혼이 아닐까?
"아니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내 손과 발을 보라. 내가 손과 발을 가지고 있음을 보지 않느냐?
진짜 몸이다. 손과 발을 이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지 않느냐?
살아있는 몸이다. 손과 발에 난 칼자국이 보이지 않느냐?
그러므로 이것은 내 몸, 십자가에 달렸을 때 너희가 본 것과 같은 몸,
빌려온 것이 아닌 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밝히셨다.
"영은 살이나 뼈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처럼 대단히 많은 부분들이 다양한 조직을 이루어
별개의 조직체들이 종합을 이루어 된 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이 "영"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우리가 영의 세계에 들어가서 알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이 영이 아닌가는 밝혀 주고 있다.
"영은 뼈나 산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바로 나다. 너희가 그렇게도 잘 알고 지내며 그렇게도 가깝게 얘기를 나누던 나다. 바로 나이니 너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똑바로 알고" 그가 "자신들의" 주님이신 것을 아는 자들은
그가 나타나실 때 갑자기 닥치더라도 하등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1] 그는 그들의 "시각"에 판단을 맡기셨다.
못 자국이 남아있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입은 몸에 그런 자국을 그냥 남겨 두신 것은
그들이 그것을 증거로 그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자국들이 "보여 지기를" 바라셨다.
그는 후에 도마에게도 그 자국들을 보이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으며
또한 그를 위한 우리의 고난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
그들을 위한 훈계를 마무리 지으시기 위하여 이처럼 그들에게 상처를
보여 주심으로 그는 또한 하나님의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셨다는 표시로
아버지에게도 보이신 셈이 되었다.
그는 하늘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 5:6)으로 나타난다.
(계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그의 "피는 말하는 피"이다.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그는 속죄의 희생 제물로 모든 일을 마치셨다. 그는 여기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역시 아버지께도 "내 손과 발을 보소서"라고 말씀하신다.
(슥 13:6-7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2] 그들에게 "만져 보게" 하신다.
"또 나를 만져 보라."
앞서 막달라 마리아에겐 만지지 못하도록 막았다.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그러나 그의 부활에 대해 전하며 그로 인하여 박해를 받게 될 제자들에겐
만지게 하여 그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하셨다.
그가 "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치기 위하여
"자기를 만지라"고 말씀하셨다.
실지로 영이나 유령 같은 존재가 없었더라면,
(실제로 제자들은 그러한 존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기록이나 다른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런 존재는 없다고 말해 주심으로
그들의 헛된 미망을 깨우쳐 주실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유령과 같은 존재가 있었으며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고 계신 것 같다.
아니라면 구태여 그가 영이 아니라고 변명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고대 기독교 시대엔 상당히 많은 이단자들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무신론자에 가깝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어떤 본질적인 육체를 지닌 것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태어나지도 않고 고통도 받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였다.
발렌틴교도(Valentinians), 마니교도(Manichees)들,
그리고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의 추종자들이
그러한 야만스런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 자들은 Dokh,tai 와 Fantusiastai. 라 불리운다.
이런 이단교리들이 "매장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이나 "유령"이 아니라
진짜 몸을 지녔고 부활하신 후에도 그 몸을 지니셨다는 사실을 알고 확신한다.
(2) 그는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
이는 그가 진짜 몸을 지니고 있으며 마치 친구처럼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신 그의 심정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베드로는 이 사실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다.
(행 10: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1] "그의 손과 발을 보고" 나서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저희가 너무 기뻐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겼다".
(41절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아직" 그를 믿지 못한 것,
e;ti avpistou,ntwn auvtw/n - 즉 아직 믿지 못한 자들처럼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조차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를 주저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부활의 진리를 확증시켜 주고 있다.
그의 시체를 훔쳐내어(대제사장들이 주장했듯) 빈 무덤을 보고
"그가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부활했음에도 계속해서 "그는 부활하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이 처음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한 것은 그들이 후에 부활을 믿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진리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게 되었을 때
그 부활이야말로 모든 가능한 일들의 완전한 근거가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그것이 그들의 약점이기는 했으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증거들을
멸시하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은 "너무 기쁨으로 오히려 믿지 못하였다."
요셉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야곱과 같은 형편이었다.
사실치고는 너무도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사랑과 욕심이 "과하여" 믿음과 소망이 약해질 때엔
약한 믿음을 배척하지 말고 북돋아 주어야 한다.
둘째,
그들은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그 사실이 "너무도 기쁘고" "너무도 엄청난" 것이어서
그 순간 성경 말씀도 하나님의 권능도 잊어버리고 사실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2] 그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심어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먹을 것을 요구하셨다".
엠마오에서도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았으나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는 기록은 없다.
부활한 후 몸의 상태가 예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그들과 함께 말하고 먹고 마시지는 못하였으나
이제 그가 실지로 "생명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
(나사로도 부활 후에 생명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예전의 생활 상태대로 돌아가 살다 다시 죽었다).
그들은 주님께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다.
(42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간소한 식사였다. 그러나 그것이 제자들의 식사였다면
그들의 주님도 그들과 같은 식사를 드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의 나라에선 그와 같은 식사를 대접받을 것이며
그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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