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일 토요일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는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시니라

 십자가 처형 2

 

(누가복음 23:44-49) 그 때는 여섯 시쯤이며 어둠이 아홉 시까지 온 땅을 덮었더라.

45) 또 해가 어두워지고 성전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니라.

46)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는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시니라.

47) 이제 백부장이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이분은 확실히 의로운 사람이었도다, 하더라.

48) 그것을 구경하러 함께 모인 모든 사람들도 일어난 그 일들을 보고는 가슴을 치며 돌아갔고

49) 그분을 아는 모든 자들과 갈릴리에서부터 그분을 따라온 여자들도 멀리 서서 이 일들을 보더라(KJV 한글)

 

 

이 부분에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실 때에 "기이한 현상들"이 함께 일어남으로

그의 죽음에 "특별한 의미를 표현하게" 된다.

 

여기에선 두 가지밖에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우린 앞서 이에 대해 살펴보았다.

 

1.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함."

 

때는 "제 육시쯤" 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시간 계산대로라면 한낮 정오 무렵인 셈이다.

그런데 "제 구시까지 온 땅이 어두움에 덮혀 있었다"고 했다.

해가 빛을 잃게 되었고 동시에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게 되어

이 칠흑 같은 어둠을 더하게 하였다.

 

이 어두움은 애굽의 경우와 같이

"사흘간" 계속된 것이 아니라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2. "성서의 휘장이 찢어짐."

 

앞의 징조는 "하늘"에 나타난 것이고 이번 것은 "성전"에서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이처럼 치욕을 당하는데

그들로서 수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이처럼 그 슬픔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막이 찢어진 것은 형식적인 율법을 폐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와 같은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갈라놓았던 장벽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를 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골칫거리였다.

 

이제 그 막이 찢어졌으므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로 당당하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부르짖으신 말씀으로

그의 죽으심이 "설명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고 말씀하실 때엔 큰 소리로 "외치셨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도 이와 같이 큰 소리로 외치셨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또한 무리들도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외치셨다.

 

1. 그는 그의 조상 다윗으로부터 이 말씀을 빌려왔다.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입으로 옮길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윗의 말을 구사하심으로써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증언하셨던 분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성취시키려 오셨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으로 성서의 말씀을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이처럼 그는 우리도 하나님께 호소할 때 성서의 말로 할 것을 보여 주셨다.

 

2.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 말 속에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자신이 버림을 당했다고 실망하였을 때엔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으나,

이제 두려웠던 영혼의 고뇌가 가시는 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과 영혼을 버리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를 통하여 자녀의 직분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중보자이심을 보이시기 위한

특별한 의미로 이 말을 구사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하나님께 드려",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고 있는 것이다".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는 자신이 제사장이며 동시에 속제물이었다.

우리의 영혼은 죄의 값으로 상실되었으니

그의 영혼으로 그 잃은 것을 회복시켜야만 하였다.

죄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은 당사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그 보상을 드려야만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만족할 만한 내용의 보상을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는 "제물로 드리고" 명실공히 제사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모든 것을 내맡기셨다.

 

"ti,qhmi - 즉 나는 손을 뗍니다. 당신의 손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아버지여, 내가 위하여 죽는 죄인들의 생명과 영혼을 대신하여

나의 생명과 영혼을 받으소서."

 

animus offerentis - 즉 바치는 자의 선한 뜻이야말로

제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저하시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실 뜻을 밝히셨다.

 

(10:9-10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주여, 당신의 뜻대로 행하리이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거룩함을 입겠나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그의 영혼과 육체가

재결합하는 부활이 아버지에게 달려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아버지의 손에 맡겨져, 즉 낙원에 "받아들여졌다가" 사흘 만에 "되돌아오게" 되기를 부탁하였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진짜 몸"을 가지셨던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마음도 역시 가지고 계셨으며,

그것은 육체와 구별된 상태로 있으므로

다른 형제들과 같은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육체가 부패하기 전에,

그 육체와 "떨어진 상태로" "하데스"에 버려지지 않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안심하고 아버지의 손에 자기의 영혼을 맡기셨다.

 

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한 본을 보여 주셨는데,

이는 다윗의 말씀을 죽어 가는 성도들에게 일러 주셨으며

그 말씀을 그렇게 구사함으로 거룩한 말씀으로 삼으신 것이다.

 

죽음에 임박해서 우리가 가장 걱정할 것은 당연히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것이다.

우리로서는 영혼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어

그의 성령과 은혜로 거룩하게 되고 지배를 받으며

죽음의 순간 하나님의 손안으로 들어가

완전한 성결과 행복을 이루게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우리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보여 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생이 끝난 뒤 다른 생이 있음을 확신하며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라는

말을 함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생기게 됨.

 

1. 군사들을 지휘하던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

 

(47절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그는 로마인이며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을 생각할 입장이 아니었으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전에 이와 같이 놀랍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곳에서 그 된 일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찬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자에 대해 증언하였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그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도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백부장을 통하여 영광 돌리게 하신 것은

그가 흠 없는 인물임을 들어내는 자연스런 증거라 하겠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선 그의 증언이 더 계속되고 있다.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 있어선 이 한 마디로 똑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가 "의인"이었다면 그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 이었다"고 한 그 말이

아주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엔 자신에 대한 증언이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언이 옳지 않은 것이라면 그는 "의인"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그 무관심했던 구경꾼들도 관심을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사실은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이 없다.

 

(48절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그런 일이 있을 때엔 의례 모여드는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한동안 심각해져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1) 이 일은 당분간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들은 죄 없는 예수를 죽인 것이 참으로 악한 짓이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내리든 그들 민족 위에

내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마 이들이 바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못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던

그 무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암흑과 지진으로 놀랄 대로 놀란데다가

비범한 그의 운명 장면을 목격한 후로 열린 입이 닫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후회하며 양심이 떨리게 되었다.

 

그들은 세금 징수원처럼 자신이 치욕스런 일을 당한 것같이

"자기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어떤 주석가는 이들이 양심에 찔림을 받은 후에

그에게 지워질 선한 사업을 하기 위한 축복의 첫 걸음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 그러나 이와 같은 감동은 곧 사라졌다고 보아야 될 것 같다.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의 표시를 더 이상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하는 기색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사건을 금방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못 박히신 것을 알게 되는 자들은 많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질 못한다.

 

그들은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돌아간다.

그들은 성례전의 거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그를 찬양하지만 결국 그들은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조차 까맣게 잊은 채,"

 

그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돌아가고 말았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를 아는 자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나 보려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49절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예수의 아는 자들," 그를 직접 알거나 누구에게 들어서 아는 자들은

"다 멀리 서 있었다."

그에게 가까이 가면 그의 추종자라고 체포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19:13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 참조 (시편 88: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그리고 "갈릴리로부터" 함께 "그를 따라온 여자들도 이 일을 보았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으며

이 일들이 부활의 확실한 전조가 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서 있었다.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는 시므온의 말처럼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 되었다".

 

(2:34-35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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