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3
누가복음 18장 9-14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또 스스로 옳다 생각하고 사람을 멸시하는 어떤 사람에게 예수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18:9일역)
'생각하고'는 '믿고'로 역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옳다 생각하고'는
'자기 혼자 의인이라고 믿고'라는 말입니다.
'사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든 다른 사람'입니다.
'멸시하는'이란 강한 말로서,
'아주 경멸했다'고도 역해야 할지요!
즉 자기 혼자 의인이라 믿고,
모든 다른 사람을 멸시한 사람에 대하여,
예수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그 한 사람은 바리새인, 한 사람은 세리였다'(10일역)
'성전'이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산상에 세워져 있었으므로 '올라갔다'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8권 369역주)은 이른 바 종교가(宗敎家)입니다.
신앙의 높은 도덕의 청순으로써 자처하는 자입니다.
'세리'는 속인(俗人)입니다.
신앙 상, 도덕상, 아무 자격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바리새인'은 정의(定義) 고덕(高德)의 사람,
'세리'는 불의(不義) 하등(下等)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서서, 스스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빼앗거나, 불의, 간음하지 않고,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을 것을 감사합니다'(11일역)
'서서'는 '오연히 기립하여'의 뜻입니다.
13절에 있는
'멀리 서서'라고 있는 말과 다릅니다.
'스스로'는,
원어대로 '자기에게'로 역(譯)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듯 하면서 실은 자기에게 기도한 것입니다.
위선자의 기도는 모두 그러한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 대한 자상자찬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여…'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은 자기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9절에 있어서와 같이 '모든 다른 사람'으로 역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그 기도에 있어서 자기 한 사람의 정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다음과 같이 개역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당신께 감사합니다.
나는 모든 다른 사람 같지 않음을. 강탈 자, 불의한 사람, 간음을 행한 자가 아님을,
또 이 세리 같지 않음을'.
이 바리새인은,
자기 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모두는
강탈 자, 불의 한 사람, 간음을 행하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또 특히 그의 곁에 서있는 세리를 가리켜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세리 같지 않음을 감사 합니다 고.
실로 건방진 말입니다.
'나는 7일 동안에 두 번 금식하고, 또 모든 얻은 것의 십 분의 1을 드렸습니다'(12일역)
바리새인은 먼저 자기의 결백을 말했습니다.
다음에 자기의 고덕을 늘어놓았습니다.
타인 같이 악을 행하지 않고 뿐만 아니라 타인 보다 낫게 선을 했다고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 된 자는 연 1회, 즉 속죄일에 금식하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1주에 2회 금식했다는 것입니다.
또 같은 율법에 의하면,
사람은 무엇에나 십의 1을 드릴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 등, 사세(사소)한 소채까지의 10분의 1을 드리고
신앙 두터움을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실은 자기에 대하여) 자기 신앙과 도덕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은근히 심중에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실로 훌륭한 신자이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내게 대하여 만족하시리라.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내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그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3일역)
바리새인은 기도했습니다.
실은 자기에 대하여 자기의 결백과 고덕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기도하는 것마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말했을' 뿐입니다.
이 구절은 '그런데'로써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멀리'는,
자칭 의인 바리새인보다 멀리 떠나서의 뜻입니다.
비천한 세리는 높은 바리새인에게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서'는 저립(standing still-우두커니 서서)일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오연(傲然)한 기립은 아닙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는, 원문대로,
'하늘 향해 눈도 못 들고'로 역해야 할 것입니다.
'가슴을 치고'는, '가슴을 계속 치면서'입니다.
그의 비통을 살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유일(唯一) 죄인인 나를…'이라고.
이 세리는 자기야말로 세계 유일의 죄인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유일의 의인이라고 믿은 것과 정반대입니다.
그는 또 '나를 축복하시옵소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는 하나님의 연민(동정)을 구하는 외에,
하나님께 가까이 할 아무 자격도 없는 것이라 느꼈습니다.
전 구절을 다음과 같이 개역 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하늘을 향해 눈도 들지 못하고, 그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하나님이여, 유일한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은 저 사람보다 의롭다함을 얻고 집으로 돌아갔다.
대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추어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여지리라'(14일역)
처음에 먼저 나의 개역을 말씀드립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자는 저 사람보다도 의롭다함을 얻고 집으로 내려갔다.
대저 무릇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여지리라. 하지만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추어지리라'
이는 이 비유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훈입니다.
'이 자' 바리새인은 무례 천만하게도 세리를 가리켜 이 세리라고 했습니다.
이 자는…('이놈'이라고 역하면 더 적당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가리킨 이놈은,
저 '정의의 선비'보다도 의롭다 함을 얻고 산을 내려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종종 되풀이하여 말씀하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여지고…'(누가복음 14:1; 마태복음 23:12 참조)라는
교훈의 예증입니다.
이상 수절은 크리스천의 겸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교 등에서 말하는 겸덕이라든가 겸양과는 아주 그 취의를 달리합니다.
크리스천의 겸손은 예절이 아닙니다.
이것은, 겸허인 것으로서 마음의 일입니다.
자기의 진가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유일한 죄인,
죄인의 괴수(두목)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각인(자각인정)없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의해 내려주시는
모든 은혜에 접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낮추어짐으로서 가장 높여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쳐서 부서뜨린바 되어 새로이 자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끝까지 낮추어짐으로서 끝까지 높여져야 할 것입니다.
*내촌감삼의 (1908년 4월 '성서지연구')를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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