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므나의 비유 2
성 경: [눅 19:20-27]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눅 19:20]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 열 명의 종 중에서
세 명의 종을 언급하면서 마지막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열 명의 종을 다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 비유가 세 가지 형태의 종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진 것이기 때문이다.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종들은 이 세 가지 종류의 표본 중,
어느 하나에 속한 사람일 것이다.
세 사람의 종이 공통되게 고백하고 있는 말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한 므나'가 주의 것이라는 청지기적 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은 돈을 수건에 싸두고 보관만 했지 장사는 하지 않았다.
한편 달란트 비유에서는 돈을 땅에 묻어두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수건에 싸서 돈을 보관한 것으로 묘사된다.
땅에 묻어서 돈을 보관하는 방법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Jeremias)
수건에 돈을 싸서 보관하는 방법도 랍비 문서에서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돈을 보관하는 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I.H.Marshall).
[눅 19: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
변명은 그의 나태함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주인에 대한 오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주인에 대해 스스로 느낀 인상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
그의 곡해(曲解)사실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그는 주인을 엄한 사람으로 단정했다.
'엄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우스테로스'는 엄격하고 날카롭다는 뜻이다.
이 세 번째 사람은 주인을 이렇듯 까다롭고 무서운 사람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주인의 일을 방관하는 입장에 서려 했고
따라서 자발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마음을 애초부터 갖지 않았다.
그는 훌륭한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경우에 당할 주인의 호된 책망이 두려워
아예 일할 엄두도 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의 두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이 주인은 무작정 화를 내는 자가 아니라 공의를 소중히 여기며, 종이 기울인 노력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풍성한 상급을 주시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2) 그는 주인을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두지 않은 것을 취한다는 것은 노력없는 대가를 요구하고
투자 이상의 것을 얻으려는 착취자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는 고리대금업자를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다.
* 참조 (마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그리고 심지 않고 거두려 하는 사람이란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악질적(惡質的)인 지주 계급을 묘사한다.
이는 이 종이 주인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즉 그는 주인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익만 챙기려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장사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또 자신이 땀 흘려 일해서 남겨 봤자 주인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서
장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종은 얄팍한 이해타산에 눈이 어두워 더 큰 것을 놓치고 만 셈이다.
결국 그는 주인이 준 한 므나를 주인의 것으로 알면서도
청지기직의 참된 의미를 전혀 몰랐던 사람이며,
주인의 번영이 곧 자기의 성공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이었다.
[눅 19: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 17절의 '착한 종'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종'이라는 말로 저주 섞인 응답을 하고 있다.
여기서 '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네로스'의 원뜻은
'병든'으로서 죄에 오염되어 영적 중태(重態)에 처한 인생의 참경을 암시한다.
한편 이 역시 달란트 비유에서와 비슷한 반응인데
누가는 독특하게 종이 주인에 대해 진술했던 그 말로 판단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종이 이렇듯 심판에 처하게 된 근본 원인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주인의 성품을 곡해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 혹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느냐'고 하는 문제는
인생의 결말을 좌우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마 16:15-16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눅 19: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 종의 잘못된 변명에 대해
상식선에서 반박하고 있는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는,
은행에라도 맡겨두어 주인이 돌아왔을 때 원리금(元利金)을 찾을 수 있게 했었어야 했다는 뜻이다.
둘째로는,
무노동으로 이윤을 얻으려 했다면 은행에 맡겨두고 이자를 취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실속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되물으면서
돈을 종에게 맡긴 것은 단순한 자기 이윤 추구의 목적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마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다시 말해서 돈을 맡긴 것은 주인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눅 19: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 곁에 섰는 자들 -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미 열명의 종들이 와 있었을 것은 틀림없지만,
(15절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같은 종에게 돈을 빼앗으라고 명령할 리는 없었을 것이라고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아마도 열명의 종들 이외에 주인의 심복 또는 하인에게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주인은 이미 왕위를 받은 상당한 권력자였고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심복들이 그림자처럼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 이 말에 함축된 의미는 매우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할 경우
이미 열 므나를 갖고 있고 열 도시의 통치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한 므나를 준다는 것은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의 초점은 한 므나를 빼앗긴 자에게로 모아지는데,
장사하여 남기지 않는 자,
즉 받은 바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지 않고 고의로 사장(私藏)시켜 버리는 자는
있는 것마저도 모두 빼앗겨 살 가치 조차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려는 것이다.
그 구체적 대답이 26,27에서 언급되고 있다.
(26-27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한편, 이같은 원리는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기술을 배워 계속 활용하고 닦아가면
그 기술을 더 많은 곳에 사용할 수 있으나
그 기술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사용치 않으면
이미 획득한 기술마저도 녹슬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눅 19:25]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의 지시를 받은 자가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구절 역시 달란트 비유에서는 없는 말인데 문맥상 어색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이미 열 므나를 받은 자는 열 도시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는데
굳이 열 므나를 소유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 말이 표현하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는 분명하다.
즉 '저희'는 상급의 개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액수에만 집착하고 있는 바, 이는 당시의 율법주의적 태도를 암시한다.
[눅 19:26]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 이는 격언구에 가까운 말이며
달란트 비유 외에 8:18;마 13:12;막 4:25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막 4: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우리는 이를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경제적 현상을 정당화하는 말로서 이해하면 안된다.
이 비유가 경제적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이고 이 비유가 상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말적 심판에 도래하는 나라에 관한 것이다.
이미 16,17절에서 보았듯이 본 이야기의 초점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데 있고 심판의 대상은 전체 삶의 과정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강력히 주지시킨다.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이것은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 일회성의 삶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의 일에 매진해야 한다.
또한 본문은 천국에서 축복을 누릴 자의 삶은
이 땅에서도 표시가 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사는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생명의 향기에서,
(고후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성령으로 충만한 자의 구체적 삶 속에서 맺어지는 신령한 결실이다.
(엡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약 3:17-18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눅 19: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 내가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 달란트 비유에서 마태는
그 종을 내어 쫓아 슬피 울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여기서는 그같은 내용이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 대한 저주로 옮겨가고 있다.
새로운 저주의 대상은 14절에서 언급된 내용
즉 주인이 왕위를 받기위해 먼 나라로 떠났을 때에
그의 왕 즉위를 반대하여 밀사를 보냈던 사건과 관련된다.
이 주인은 그들을 가리켜 '원수들'이라고 지목하며
매우 단호하고 분노에 찬 감정을 표시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왕위 즉위에 대한 반대자는
반역자 또는 역적(逆賊)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사실 곧이어 언급되는 사형선고는 그에 응당하는 형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거부하고
죄악된 옛 생활을 계속 고집하는 자 또한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 있는 셈이다.
사실 새롭게 거듭나기 전의 모든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내 앞에서 죽이라 - 이같은 단호한 선언에는
단순하게 개인의 왕위에 반대한 사실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방해하는 세력의
종말을 보여주고자 하는 뜻이 숨어 있다.
사실 이같은 이야기는 아켈라오가 왕위를 받고 돌아온 후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학살했던 사건과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 함축된 의미는 그 초점이 복수에 맞춰져 있다기 보다는
주인의 뜻을 바로 깨달아 어찌하든 작은 일에나마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한편 이같은 비유가 A.D. 70년에 디도(Titus) 장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건에 대한 암시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지나친 추측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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