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5일 화요일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의 회개

 

(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복음서에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개종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의 주님과 어떤 사람과의 담화는 기록되어 있는데

삭개오와의 담화가 그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고 있었다.

 

(1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이 여리고 성은 저주를 받아 세워진 곳이었다.

 

* 참조 (여리고성에 관한 논문)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성이 남아 있음을 귀하게 여기셨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저주에 관한 기사가 없다.

이 성은 세워지지 말았어야 할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성이 세워졌을 때에

이 성 안에 사는 것이 죄는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요단 저편에서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베다니로 나사로를 살리러 오시는 길이었다.

주님께서는 한 가지 선한 일을 하시려고 가실 때에

도중에서 여러 가지 하실 일을 생각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들의 영혼과 육체에 좋은 일을 하시었는데,

여기서는 영혼을 위하여 하신 좋은 일의 실례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음과 같다.

 

 

. 삭개오는 누구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는가.

 

그의 이름은 그가 한 유대인이었음을 나타낸다.

삭개란 이름은 유대인들의 흔한 이름이었다.

거의 이때쯤 삭개라는 이름을 가진 유명한 랍비도 있었다. 주목할 것은,

 

1. 그의 명칭과 직위이다.

그는 세리장 곧 총세무관 이었다.

다른 세리들은 그 밑에 있는 사무원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징세청 총관리인 이었다.

 

우리는 가끔 세리관들이 그리스도께로 온 기사를 읽는다.

이 사람은 권세가 있는 세리장으로서 세리들이 그에게 문안오곤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사물에 있어서 남은 자를 가지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괴수까지도 구원하러 오셨으므로 세리장도 구원하러 오셨다.

 

2. 세상에서의 그 환경은 매우 유력하였다.

그는 부자였다.

하급 세리들은 보통 불행한 사람들이었고 하층계급에 있었다.

그러나 세리장은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며칠 전에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어려운지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잃었던 한 부자의 영혼을 찾으신 예를 만드시고,

탐욕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탕자와 같이 되지 않게 하셨다.

 

 

. 어떻게 세리장이 그리스도의 도로 들어왔으며, 어떠한 기회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까.

 

1. 그는 예수를 보려는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예수가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게 큰 소문이 났을까.

 

(3절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명성이 드날리는 사람의 소문을 들으면,

용모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어떠한 것일까 하고 상상하는 것처럼,

그 인물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가 이러이러한 위대한 사람을 보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2. 삭개오는 키는 작고 사람은 많았기 때문에 예수를 보고 싶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 가리워져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키가 작은 사람들은 대개 마음이 크고 정신이 쾌활하다.

사울왕은 비록 머리와 어깨가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보다 컸지만

어느 누가 사울보다는 차라리 삭개오가 되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3. 삭개오는 자기의 호기심을 좌절시킬 수 없어서

세리장으로서의 근엄성을 생각지 않고, 소년처럼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갔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보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주님을 볼 수 있는 유리한 적당한 수단을 이용할 것이며,

고난과 반대를 물리치고 주님을 보기 위하여 수고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을 보기에 자기가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보기에 적당하도록 자기의 키를 높일 수 있는 모든 이점을 이용할 것이며,

자기에게는 그러한 필요조건을 구비하지 못했다든지

키가 작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 것이다.

비록 난쟁이 라도 실망하지 않고, 노력여하에 따라서

 

좋은 도움을 받아 높은 목표를 세우고, 높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삭개오를 더 가까이 아시기 위하여 내려오라고 부르심과

(5절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그 부르심의 효력.

(6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1.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자청해 가셨다.

 

삭개오가 자기 집에 가서 정성을 다하여 접대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니 주님께서는 어디를 가시든지 당신의 위로를 지니고 다니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의 환대를 가지고 가신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사람을 대하실 때에 마음을 열어놓으시고

당신을 환대할 마음이 생기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뽕나무를 쳐다보시고 삭개오를 보셨다.

삭개오는 그리스도를 보려고 와서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의 눈에 뜨이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키는 작지만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삭개오에게 너무도 큰 광명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바에 비하면 너무도 고귀한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삭개오를 자애로운 은총으로 보호하고,

그의 기대한 바에 능가하는 일을 하셨으며, 처음에는 매우 약하게 용기를 돋우시고,

앞으로도 그를 도우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알림을 받을 것이며,

주님을 보기를 원하기만 하더라도 주님과 대화할 수 있는 허락을 받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적게 믿는 자들도 보다 더 주님의 신임을 받게 되며,

때로는 삭개오의 경우와 같이 단지 호기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양심이 일깨워져서 그들의 심령이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를 이름으로 부르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자를 이름으로 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삭개오는 나다나엘이 말한 것처럼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고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러나 그는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보시고,

그를 아셨던 것이다.

 

주님은 삭개오에게 "급히 내려 오라"고 명하셨다.

 

그리스도에게 부름 받을 사람들은 반드시 겸손하게 내려와야지

자기들의 의로움에 의하여 하늘로 올라가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급히 내려와야 한다. 지체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삭개오는 주저한다고 안 될 것은 아니었지만 급히 내려왔다.

삭개오 그는 훌륭한 손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할는지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자기 집에 들르셔서 자기와 함께

한 시간이나 2시간 머물겠다 하심을 알았으니 빨리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라“).

 

 

2. 삭개오는 자기 집에 그런 놀라운 광명이 임하였음을 몹시 기뻐했다.

 

(6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그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

삭개오가 그리스도를 자기 집으로 영접함은 주님을 자기의 심령 속에

영접하는 표시이며 증거였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급히 해야 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에는

즐겁게 맞아들여야 한다.

 

(24:7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우리는 모든 선함을 가져오시는 주님을 즐거이 영접할 것이며,

그는 영혼을 점유하고 계신 분이시며 영원히 흐르는 즐거움의 샘터를 열어 놓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주 "내게 문을 열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신부와 함께 마음의 문을 열면 용서를 받는다는 말도 있다.

 

(5:2-3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삭개오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이처럼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지금도 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 자신처럼 여기시던 그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 그리스도와 삭개오 사이에 이러한 다정한 대화를 보고 백성들은 반대가 심했다.

마음이 편협하고 남의 탈을 잡기 좋아하는 유대인들은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 고 하였다.

 

죄인의 집,

그러면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었는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인들을 찾아서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여리고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삭개오는 더 큰 죄인이라 하였다.

그러한 죄인과는 더불어 말할 사람도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책망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 이유는,

 

1. 삭개오는 세리였고, 세리의 대부분은 나쁜 사람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세리가 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모두 거리로 또는 세평(世評)에 따라서 정죄함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각 사람이 따라 개별적 심판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2. 비록 세리장은 죄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과 마찬가지로

그가 지금도 나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세리장의 과거의 생활이 나빴다고 하더라도

그의 현재의 마음은 선하다는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회개할 여유를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회개할 여유와 기회를 가지고 있다.

 

3. 세리장이 현재도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에게로 가시는 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주님은 죄인에게 상처를 받을 위험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인에게 선을 행하시려는 큰 희망을 가지고 가셨다.

 

의사가 병자를 내놓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러나 잘한 일을 나쁘게 해석하면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삭개오는 이 때까지는 죄인이었지만,

이후부터는 참회하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임을 증명해 준다.

 

(8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세리장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으로 삼는 바리새인처럼

자기가 행한 일로 인하여 의롭게 되기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자기가 행한 일들이 자기의 믿음과 회개가

진실됨을 증거하였고, 자기의 결심이 어떻다는 것을 여기서 선언한다.

 

그는 일어서서 이를 선언(宣言)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보고 수근거리는 사람들이 보고

또한 들을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믿는 동시에 회개하였음을 "입으로 시인했다".

 

삭개오는 일어섰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 맹세함에 있어서 성실하게 신중히 또한 엄숙하게 함을 표시한다.

그는 백성들(이들은 그의 심판관이 될 수 없었음)을 향하여

그리스도 곧 주님께 말씀드렸으며,

법정에서 진술하는 것처럼 서서 하였다.

 

우리가 행하는 선은 주님께 해야 하며,

주님께 호소하고, 우리 자신을 주님께 입증하고,

모든 우리의 선한 목적과 결심을 성실하게 주님께 아뢰올 것이다.

 

삭개오는 그의 심령의 변화(이것이 회개이다)가 일어났음을

그의 생활 태도의 변화로 나타냈다.

그의 결심은 회개 후에 마땅히 할 의무였다.

그는 자기의 결심을 강조함에 있어서 어떤 경우에나 그리스도를 위함이었다.

우리도 이렇게 함으로써 회개의 진실성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

 

 

1. 삭개오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까지는 자기 자신을 위한 보물을 쌓아 가며 자기 자신을 해치고 있었다.

이제 그는 결심하기를 장차에는 모든 일을 할 때

그것으로 남을 위하여 선을 행하기로 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나이다.

그는 "내가 죽을 때에 유언으로 내 소유의 절반을 주겠나이다" 하지 않고

"지금 이것을 주겠나이다" 하고 말했다.

 

삭개오는 아마 그리스도께서 전일에 다른 부자 관원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을 때에

관원이 그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고

주님과 갈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을 것이다.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속으로 말했다.

"나는 주님의 말씀에 곧 순종하겠다. 이제까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들을 구제하되 이때까지 이행하지 못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소유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결심했다.

 

이것은 신앙심과 자비심의 사업을 위하여 떼어낼 재산으로서는 매우 큰 것이다.

유대인들은 흔히 말하기를 매년 사람의 수입의 5분의 1

신앙적인 용도로 바치는 것이 아주 정당한 일이라 하였으며 이를 율법으로 명하였다.

그러나 삭개오는 훨씬 더 나아가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는데,

그러려면 그는 모든 낭비하는 비용을 절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절약해야만 그의 여분의 재산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우리가 좀 더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 하면 우리는 보다 많은 자선을 베풀 수 있을 것이며,

적은 것으로 자족할 수 있으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삭개오는 그의 회개의 결실로써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게 된다는 사실을 알자.

 

2. 삭개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정직하고 정당하게 소유한 것이 아니고

얼마는 부정당하고 불법한 수단으로 취한 것임을 자인하고,

이러한 부당한 수단으로 얻은 것을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다시 말하면 세리로서의 직무에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 잘못한 일 곧 정해진 세금보다 더 받은 것이 있으면 그에게 사 배를 갚겠노라"고 약속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이 도적질하였을 때의 배상하도록 된 율법이다.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1) 삭개오는 자기가 잘못했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세리로서의 그의 직분은 정부의 비위를 맞추도록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시키는 악행을 할 기회를 주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일반적인 죄과를 자인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범한 죄악을 반성하고,

또한 세상에서의 사업과 직업 관계로 많이 괴롭힘을 받는 부정한 일에 대하여 반성한다.

 

(2) 삭개오는 잘못 고소함으로써 악을 범했다.

세리들은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 모든 것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과장해서 혹 어떤 사람에 대하여 악의를 품고 있으면

자기들의 원한을 풀을 기회로 삼으려 한다.

 

(3) 세리장은 생각해 본다든지 장부에 적힌 것을 찾아보아

만일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음을 알아내면 그 4배를 갚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는 "만일 내가 소송을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죠. 배상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어찌할 도리가 없는 경우에는 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리장은 자진해서 그렇게 했다. 그 자신의 행동이며 행위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반환함으로써만 그 진실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세리장은 자기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준다고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속죄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위한 강탈을 미워하시므로

 

우리는 첫째로 의롭게 행할 것이며, 그리고 나서 자비를 베풀 것이다.

우리의 것이 아닌 것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자선이 아니다.

 

정직하게 들어오지 않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재산은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모든 빚을 갚지 않고,

또는 악행을 하여 얻은 것을 보상하지 않았을 때도

그것을 우리의 재산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회개를 시인하시고 가납하심과 동시에

주님께서는 또한 그의 집에 손님으로 가셔서 구원과 축복을 선언하셨다.

 

(9-1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 삭개오는 이제는 한 행복한 사람이 되었음을 선언 받았다.

 

이제 삭개오는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 왔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으로 초대하게 되었으며

정직하고 자비스러우며 선한 사람이 되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회개한 삭개오는 사실상 구원을 받아, 죄로부터 구원받았고

죄의 범행에서 구원받았고,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았다.

구원의 모든 유익함이 다 그의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집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곳에는 주님과 함께 구원이 따라온다.

 

그리스도는 현재도 또한 미래에도 삭개오처럼,

주님을 시인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장본인이 되신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른 것이다".

 

(1) 삭개오가 한 회개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이제까지보다 더 복 받은 사람이 될 것이며 그의 집에도 복이 올 것이었다.

삭개오는 그의 집으로 은혜와 구원의 수단을 가져오게 되었으니

이제는 과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가족들에게 여호와의 법도를 지키도록 가르칠 것이다.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에게 화가 있지만"(2:9)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자기의 집에서 애정을 베푸는 것이며,

복을 가져오고 구원을 가져오며 그 의가 영원히 있을 것이다.

 

(112: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2) 삭개오가 자진해서 그리스도께로 왔을 때에

그의 가족도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의 자녀들이 주님의 교회의 회원이 되게 되었고,

따라서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으니,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래서 아브라함과의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이 깊어지고

아브라함에게 내릴 복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리들과 이방인들에게도 내려져서 그들과 그들의 자손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삭개오가 믿었을 때에 간수장의 집에 구원이 임했던 것처럼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간수장이 구원을 받게 되었을 때에 사도 바울은 간수장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에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다(16:31).

 

삭개오는 나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한 세리로서 그는 이교도로 간주되었었다.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삭개오와 더불어 말하기를 부끄러워하고

그리스도께서도 그와 말하지 않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삭개오는 자기가 한 참된 참회자임을 보여 주었다.

그는 법정에서 정직한 사람으로서 마치 세리와는 전연 딴판인 것처럼

아브라함의 선한 자손이어서 탓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2. 그리스도께서 특히 삭개오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하신 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큰 계획과 목적과 일치되는 것이었다.

 

(10절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와 같은 의론으로 주님께서는 전에도 세리들과 말씀하심이 정당함을 밝히셨다.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때에 주님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1) 인간 자손의 통탄할 상황.

이들은 잃어버린 자들이다.

이 말은 인류의 전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전세계의 인류는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세상이 된다.

그 잃어버림은 한 도시가 반란자에 의하여 반란을 당한 것과 같고,

한 나그네가 광야에서 길을 잃어버림 같으며

병자가 그의 병이 불치의 병일 때와 같고 또는 죄수가 판결을 선고받음과 같다.

 

(2) 하나님의 자손을 위한 은혜로운 계획.

인자의 오심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다.

주님은 하늘에서 땅으로(긴 여행) 오셨다.

 

잃어버린 자를(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자) 찾아서 도로 데려가려고 오셨고,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멸망당하고 있고, 파괴되어 잘라버린 상태에 있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고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에게 판결이 선고되었을 때에

그 사건을 떠맡으셨으며,

잃어버린 자들을 하나님과 모든 선한 곳으로 데려오는 일을 책임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이 타락된 세상으로 오셨다.

 

주님의 경륜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을 때에" 그 타락한 자를 구원하는 일이었다.

 

이 경륜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주님은 그 구원 사업에

유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다 찾아서 이용하셨다.

 

주님은 찾을 가치가 없는 자들을 찾으셨다.

주님은 삭개오의 경우와 같이 주님을 찾지 않은 자와 또한

주님을 요청하지 않는 자들을 찾으신다.

 

 

*메튜헨리의 주석을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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