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8일 토요일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불의한 재판관

 

누가복음 18:1-8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비유는 문에 달려 있는 열쇠가 있는데,

그 추진력과 고안이 앞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1).

 

이 비유를 읽을 때에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하는 백성이며,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일정하게

또한 때에 따라 하나님과 통신을 갖게 되며,

정기적 또한 비상한 사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통신을 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광명이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등한하게 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항상 해야 될 일이므로,

언제나 기도해야 되며, 날마다 실행해야 될 의무이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하되 기도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영원한 상급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훈 하시려고 하신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영적인 은사를 간구할 때에 꾸준히 계속하여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힘,

우리의 육욕과 부패 곧 우리의 가장 악한 원수를 물리칠 힘을 주시라고

기도할 때에 꾸준히 계속하여 기도해야지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님의 얼굴을 헛되이 찾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핍박자와 압제자들에게서

구함을 받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 그리스도께서는 한 비유로써 끈덕짐을 힘을 알려 주신다.

 

이 끈덕짐은 다른 아무 방법으로도 당해낼 수 없는 완악한 마음이라도

흔들리게 하여 의롭고 옳은 일을 하게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정직한 사건이란 불의의 재판관 앞에서도 성공된 예를 보여 주셨다.

정당성과 동정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끈덕짐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다.

 

1. 어떤 성에 악한 성격을 가진 법관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았고, 인간을 존중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양심이나 세평에 대하여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자기에게 관한 사람들의 비난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나 인간에 대한 의무를 행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경건함과 명예와는 아주 떠난 사람으로서 관심조차 갖지 않았었다.

창조주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들과 같은 피조물을 전혀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스러울 것도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곳에서 선()이 있기를 기대할 수 없다.

어느 점에서나 이처럼 비종교적이고

비인간적인 성격이 우세하면서도 권력을 가진 악한 재판관이었다.

그는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종교와 정의의 원칙에 따라서 하지 않았으며

그의 권력을 선을 위하여 쓰기보다는 상처를 입을 위험한 일을 했다.

 

솔로몬은 해 아래서 재판하는 곳에 가장 독점적인 악의 하나가 있음을 보았다.

 

(3:16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2. 불쌍한 과부의 기막힌 사정은 재판관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권세와 공포의 장애물을 참아야 하는 모욕감을 무릅쓰고 그녀는 호소했다.

그녀는 분명히 정의의 편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당성을 달성하기 위하여 졸라댐에 있어서

법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날마다 재판관의 집으로 가서 직접 호소하며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다시 말하면 나의 원한을 판단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재판관 자신이 그녀에게 행한 어떤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이 아니고,

재판관의 권력 안에서 그녀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이었으니

그녀를 더 억누르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불쌍한 과부들은 가끔 원한되는 일이 많이 있다.

과부들에게 원한을 끼치는 자들은

잔인스럽게도 과부들의 약하고 무의탁한 상태를 악용하여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적은 것마저 갈취한다.

그래서 행정관들은 특히 과부들을 압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2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할 책임이 있고,

 

(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그들의 후원자가 되고 보호자가 되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이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심같이 행정관도 그러해야 된다.

 

(68: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3. 과부가 당한 어려움과 실망은 그 과부 자신에게 원인이 있었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않았다.

 

(4절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그 재판관이 평상시에는 과부에게 끼친 자의 잘못을 묵인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과부는 재판관에게 줄 뇌물도 없으며

과부를 위하여 대변해 줄 위세(威勢)있는 사람도 없으므로

과부의 불만을 시정하려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자기의 꾸물거리는 이유를 의식하면서도

자기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사람을 중하게 여기지도 않는

자신을 자인하지도 못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고치는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4. 이 불공평한 재판관을 계속적으로 성가시게 함으로써

 

(5절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과부가 얻은 것은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곧 계속적인 괴로움을 끼치니 내가 그녀의 호소를 들어주고 올바른 재판을 해 주리라.

그것은 그녀가 내게 소란을 피워서 나에게 불명예 스럽다기 보다도

그녀가 나에게 소란을 피워서 나를 괴롭히니 그녀가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나를 계속하여 졸라서 편안치 못하게 할 터이니 내가 그녀를 호소를 들어주는 것이

곧 나 자신이 더 이상 괴롭힘을 받지 않기 위하여 하려는 것이며,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원만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과부는 계속하여 졸라댐으로써 억울함을 풀게 되었다.

그녀는 처음에 재판관 집의 문 앞에서 졸랐으며,

거리로 따라다니며 졸랐고, 공개된 법정에서 간청하였으며, 그리고 또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하고 계속 부르짖으니

재판관은 과부가 물러가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할 수 없이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재판관이 비록 악하기는 하지만 그의 양심상,

과부가 법정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으로 보내기에는 너무도 마음이 괴로웠다.

 

 

.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믿음과 열성을 가지고 기도하며,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도록 권장하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끝내는 믿음과 열성으로 기도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을 다짐하셨다.

 

(6절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

 

과부의 끈덕진 간청으로 인하여 재판관은 드디어

마지못해서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게 되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제자들이 원하고 기대하던 것.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이 무엇일까.

 

[1]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택하신 자,

하나님이 친히 택하신 자, 선택한 백성, 선택받은 백성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늘 주목해 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하실 모든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이며,

그들을 선택하신 목적에 따라서 이행하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반대를 당한다.

이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많은 대항자들이 있다.

사탄은 이들의 큰 적이다.

 

[3] 택함을 입은 자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자기들과 함께 하심이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확고한 관심을 가져 주시고

그 중심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는 일이다.

 

(2) 하나님의 보존하심과 보호하심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

 

마땅히 낮과 밤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은 항의나 충고를 원하시지도 않고,

변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움직일 수도 없다.

오직 자기들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그러면 자비를 베푸시겠노라고 언약하셨다.

 

우리는 특히 우리의 영적 원수에 대항하여 기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던" 것과 같이,

끈덕진 과부처럼 끈질기게 간구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정욕을 극복하여 주신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유혹을 방비하여 주신다.

우리는 핍박받으며 압제받는 교회를 위하여 걱정해야 되며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바로잡아 주시고 안전을 보장하여 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이렇게 간구함에 있어서 아주 열성적이어야 하며 열심으로 부르짖을 것이며,

기도를 하면 결국은 응답 받을 것을 믿는 자들처럼 밤과 낮으로 부르짖어야 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값진 것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

그리하면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은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62:6-7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3)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며 기대하는 중에는 아마 낙담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참으시고,

당장은 기도하는 자들 앞에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응답을 주시지 않을 경우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적에 대하여 인내성을 시험해보시며,

원수를 갚지 않으시고, 또 당신의 백성들의 인내심을 시험하시느라고

그들을 변호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애굽인들의 죄악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으며, 압박 받는 이스라엘의 슬픔이 부르짖음에 대하여 오래 견디셨다.

 

(4) 비록 더디기는 하겠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되며

불의한 재판관이 한 말에 의하여 이것이 어떻게 보장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이 과부가 끈질김으로써 소원을 성취하였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성취는 더욱 확실하다. 왜냐하면

 

[1] 이 과부는 재판관과는 모르는 사이이고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친히 택하신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잘 아시고, 사랑하시며 기꺼이 여기시며 언제나 그들을 위하여

친히 걱정하시는 자들이다.

 

[2] 과부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은 많으며,

그들은 모두 같은 목적으로 하나님께로 온 자들이며 그들의 요구하는 바도 일치한다.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연합된 찬송을 부르며 영광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하늘의 성도들처럼

지상의 성도들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를 가지고 은혜의 보좌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3] 과부는 재판관에게 와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야만 서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담대히 가까이 오라고 명하시는 아버지께로 와서 있으며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라고 가르쳐 주신다.

 

[4] 과부는 불공평한 재판장에게로 왔다.

우리는 의로우신 아버지께로 왔다.

 

(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이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불쌍한 피조물들의 행복을 원하시되

특히 과부와 고아와 같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위안을 주시기 원하신다.

 

[5] 과부는 순전히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재판관에게로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가 간구하고 있는 사건에 관여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여 일어나셔서 주의 원통을 푸시고,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할 수 있다.

 

[6] 과부는 그녀를 위하여 말하며 그녀의 간원하는 바를 보충하며

그녀 자신보다 그녀를 위하여 진력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니

그는 하늘에서 유력하고 주요한 권능을 가지신 분이시다.

 

[7] 과부는 성공하리라는 언약도 없고 간구 하는데 격려하는 무엇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긍휼이 내어 밀어져 있어서 간구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에게 간구 하는 바를 주시겠다는 언약을 받고 있다.

 

[8] 과부는 어느 정한 시간에만 재판관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낮과 밤으로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으며

끈덕짐으로 소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는 희망이 더 많다.

 

[9] 과부의 끈덕짐은 재판관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어서

재판관이 과부에 대하여 반항심이나 일으키지 않을까 겁이 났었다.

 

그러나 우리의 끈덕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곧은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므로

우리는 능력 있는 기도를 열심히 하기만 하면 응답 받을 가망성이 많고

또한 많이 응답을 받게 된다.

 

 

2.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넌지시 말씀하시기를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다가 싫증을 내기 시작할 것이라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자들의 원수를 갚아 주겠다고 언약하셨지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이다.

 

인자는 당신의 택한 자들의 원수를 갚아 주시고,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변호해 주시려고 오신다.

주님께서는 각 세대에 있어서 당신의 상처받은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변호하시려는 섭리에 따라서 오실 것이며

큰 날에는 드디어 시온의 쟁론을 판결하시려고 오실 것이다.

 

자 그러면 주님께서 오실 때에 지상에서 믿음을 가진 자를 볼 수 있을까?

 

이 물음은 강력한 부정을 암시한다.

아니다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앞을 내다보고 계신다.

 

(1) 이 말씀은 믿음이 필요한 것은 지상에서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지옥에 있는 죄인들은 자기들이 믿을 것이 없다고 느낄 것이며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자기들이 믿었던 것을 즐기고 있게 되기 때문이다.

 

(2)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위대한 것임을 암시한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녀를 내려다보시며 순결함이 있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믿음이 있느냐?고 물으신다.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기 위하여 주님께 간청하는 자들의 믿음에 관하여 물으셨다.

 

(3) 이 말씀은 비록 아주 적은 믿음이라도 있기만 하면 주님께서 이를 발견하시고,

이를 찾아내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주님의 눈은 가장 약하고 가장 희미하게 믿는 자도 보고 계신다.

 

(4)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의 사건을 변호하러 오실 때에는

사람이 기대하는데 비해서는 믿음을 조금밖에는 못 보게 될 것을 예언하셨다.

다시 말하면

 

[1] 대체로 실제적으로 또한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몇 사람 안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형식적으로 선한 체하는 사람은 많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

곧 진실 되고 정직한 사람은 몇이 안 될 것이다.

충성된 사람은 몇이 안 된다.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다.

 

(12:1-2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역시 불평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보다 나아지지 못하고 끝날이 다가올 때에도 나아지지 못한다.

세상은 악하다. 앞으로도 악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르러서는

보다 더 악하게 되고, 최후의 날에 이르러서는 가장 위험하게 될 것이다.

 

[2] 주님께서는 특히 주님께서 재림하심을 믿는 자를 몇 사람 보시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의 택한 자의 원한을 풀어 주시려고 오실 때에는

당신을 도와드리며 지지해 드릴 믿는 자가 있는지 찾아보실 때에

하나도 없음을 보시고 이상히 여기실 것이다.

 

(59: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63:5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오실 때나 끝날이 되어 당연히 오실 때나 같을 것을 암시한다.

주님께서 당연히 오실 날이 혹시 오랫동안 지연되면,

 

첫째로 악한 백성들이 이에 반항하여

 

"주님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하게 될 것이다.

 

(벧후 3: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들은 주님의 강림에 도전하며

 

(5:10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5: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주님이 더디 오시면 더디 오실수록 그들은 더욱 악해질 것이다.

 

(24: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둘째로는 주님의 백성들까지도 실망하기 시작하고,

자기들의 예상한 시기가 지났다 하여

주님은 재림하시지 않는다고 결론짓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는 모든 사물이

최후적인 극단에 이르고 시온이 "주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49: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40: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위로가 됨은 정한 때가 이르면

인간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언약에 하등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매튜헨리의 주석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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