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9일 일요일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성 경: [18:9-11]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 직접적으로는 예수 당시

도처에서 볼 수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즉 당시 대다수 바리새인들은 위선과 교만으로 무장한 채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받았던

약자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 이 구절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독선적 아집에 사로잡힌 일반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사람들 중에는 양심이니 진리니 하는 것들을 아예 무시하고

육신의 정욕이 명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나름대로 선악간 행위의 기준을 세워놓고

구도자적 삶을 지향하는 소위 종교성이 많은 이들도 있는 것이다.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폐단이 바로 종교적 독선(獨善)이다.

본 구절은 이들의 오류를 두 가지로 지적한다.

 

 

(1) 자기 의()를 내세움.

 

이들이 내세우는 자기의(自己義)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럽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스스로 의를 자랑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 덧입음으로써만

진정한 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객관적 열의에서라기보다는 종교적 인간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2) 다른 사람을 멸시함.

 

자기 스스로 의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만하는 자는

그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공공연하게 든 무의식적으로든 경멸하기 쉽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은

겸손하며 타인의 저급한 상황을 멸시하기 보다는 긍휼히 여긴다.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곧 오전 9, 12,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2: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10: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성전은 동, , 남쪽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이곳의 유대인의 뜰에서 기도를 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서

편리한 시간을 택해 성전에 올라가기도 했다.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 -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뚜렷이 대조되는 신분은 극적(dramatic) 효과를 더해준다.

 

, 바리새인이 당시 유대교의 종교인들을 대표하는 반면,

세리는 당시 천시되던 소위 '죄인'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적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판단이

인간적 판단과 얼마나 판이한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서서 따로 기도하여 - 이 간단한 말 속에는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교만이

뚜렷이 암시되고 있다.

 

첫째 그가 '서서' 기도했다는 것은

성전에서 서 있는 자세로 기도하는 하나의 '습관'을 암시한다.

그가 드린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영혼의 기도가 아니라,

세끼 밥을 먹듯이 습관에 매인 형식적 기도였으리라는 추측이 간다.

 

둘째 '따로'라는 말은

바리새주의의 발단은 이교적인 헬레니즘 문화의 침해에 반대하여

경건성을 유지하여 구별된 삶을 형성해 보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구별 그 자체가 잘못된 사상은 아니다.

 

그러나 본래의 그 선한 정신이

스스로만 의롭게 여기는 배타적 독선주의로 탈바꿈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 23장과 막 7장에서 뿐만 아니라 유대 문학에서 두루 발견된다.

누가의 경우도 여러 곳에서 바리새인들의 터무니없는 적대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5: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6: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11:37-54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그는 외형적 율법적 죄를 범하지 않는데 대해

감사하는 자랑의 기도를 드렸으며

더욱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율법 준수의 자랑까지도 덧붙였다.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14: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오늘날에도 이 같은 바리새적 교인이나 지도자들은

권력과 사회적 지위, 교회의 권위, 재력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의로운 체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신들의 양심,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그들의 불의(不義)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11: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9: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그는 토색(討索),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으며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즉 자신에게는 불의가 전혀 없으며 깨끗함 뿐임을 자랑했다.

 

유대 법에 의하면 금식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별한 은총을 원하는 자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금식을 행했으며,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때 얼굴을 희게 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구김살이 진 옷을 입고 큰 거리에 나와 자신들의 경건을 자랑하였다.

 

* 참조 (6:16-18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처럼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는 자들은

오히려 의롭지 못한 자들이며 예수와 무관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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