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3일 일요일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성 경: [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 이 구절은 새로이 시작되는

삭개오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앞에서 소개된 소경 치유 기사와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즉 여리고에 '이르러' 생긴 사건에 이어서

여리고 안에서 새로운 사건이 전개됨을 보여준다.

 

(18: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누가는 '지나가다'(디에르코마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루살렘을 향한, 다시 말해서 고난을 향한 예수의 굳은 의지를

보다 확연히 드러내고자 한 듯하다.

 

한편 삭개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사건을 다루는

본기사의 시간적 배경은 수난주간 전() 목요일 쯤으로 짐작된다.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재카이오스) - 이 이름은 전통적 유대인의 이름으로서

본래의 뜻은 '청결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이다.

 

누가의 소개에 따르면 삭개오는 세리장(稅吏長)의 직책을 맡은 사람이었다.

세리장이란 곧 세관장을 의미하는데

여기고는 베레아 지방으로 부터 요단강을 건너가는

통상인들의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세관이 있었을 것이고

그 세관에서는 주로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유입되는

향유 등 여러 상품에 대해 통관세를 징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은 발삼나무의 산지였기 때문에

특산물에 대한 세금까지도 징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삭개오는 이 세관의 우두머리로서 세금 징수를 지휘했던 인물로 보인다.

 

당시 세리장은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하여 의도에 따라

자율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할 수 있었고,

자기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누가는 삭개오를 소개할 때에 '부자'라는 말을 첨가시킨다.

 

이는 당시 세리에게도 '허가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하물며 세리장이 받고 있는 원성은 더 높았을 것이고

또 그가 누리는 ''의 원천이 부당한 착취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삭개오에 대한 이와 같은 배경은

그의 직책이 관료라는 점과,

부자라는 점과 함께

18:18-30의 이야기 즉 부자의 구원에 대한 질문과 연결되고 있다(Danker).

 

(18:18-30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리고 당시 세리들이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삭개오의 구원에 관한 이 이야기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의 은혜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고 한 이유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아마 호기심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삭개오도 이미 예수께 관한 소문을 못들었을리 없고,

특히 여리고 성 가까이에서 일어났던 소경 치유 기적과

그를 따르는 군중에 대해서 듣고 보았을 것이다.

 

(18:35-43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따라서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 확인하고,

또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이 많아서 앞을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고,

 

둘째는

설상가상으로 키가 작아서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일행이 걸어갈 때 그 주위에 많은 군중들이

둘러싸고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삭개오의 호기심은 더욱 고조되어 예수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 여기서 나타난 장면 묘사에서

상징적인 두 가지 의미를 읽을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를 만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외적 요인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방해되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미 예수를 만나려고 모여든 무리가

예수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삭개오는 예수를 볼래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도

먼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왜곡된 특권 의식이나

이기심 때문에 새롭게 교회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도리어 문을 막고 있는 위치에 있음으로써

예수를 가로막아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암시로도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예수를 만날 수 없는 내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카가 작은 점이다.

키가 작다는 말은 볼 수 있는 위치에 못 미친다는 말인데,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영적 결핍에 있다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기적 교만, 세상적 욕심, 진리에 대한 경멸심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의 장애를

극복하는 일을 선결과제(先決課題)로 삼아야 할 것이다.

 

 

[19:4]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앞으로 달려가서 - '앞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프로스텐'

본래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였다.

여기서는 전치사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어디를 향해 앞으로 달려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맥상 뽕나무를 향한 것이었고

예수의 일행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앞질러가 기다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앞 구절에서 언급된 삭개오의 한계

즉 예수를 만날 수 없게 하는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을 극복하려는 삭개오의 의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에게 관계된 외.내적 한계를 극복하고

앞으로 향해 달려가는 용기가

참다운 신앙을 형성하게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뽕나무 - 이는 단순한 뽕나무(모론)가 아니라

무화과를 의미하는 '쉬케'와 합성된 '쉬코모레아'라는 뽕나무이다.

 

따라서 17:6에서 언급되는 뽕나무(쉬카미노스)와는 다른 나무이다.

 

(17: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뽕나무는 '애굽 무화과' 또는 '무화과 뽕나무'라고도 불리워지며,

열매는 무화과이고 잎은 뽕잎인 나무로서 요단강 지역에서 많이 자란다.

 

이 나무는 그 가지가 넓게 퍼지고 아래로 늘어져 있어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이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됨으로써

예수를 만나기 위해

자기의 한계성(限界性)을 극복해 내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쳐다 보시고 - 예수는 뽕나무에 앉아있는 삭개오를 쳐다보셨다.

 

삭개오야 - 뽕나무 위에 올라 앉아있는 삭개오에게 예수는 직접 이름을 부르셨다.

예수가 신적 전지성에 의해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을 수도 있고

혹은 삭개오의 이름이 이미 여리고 땅에 널리 알려졌으므로

무리들 중에서 삭개오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본문에서 누가의 관심은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보다는

예수가 삭개오를 지목하여 인격적으로 부른 사실 자체에 집중되어 있다 하겠다.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 예수의 인격적 초대는

단순한 부름에 그치지 않고 삭개오의 집에 함께 머무르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같은 이야기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예수와의 만남은

예수의 주권적인 초대(sovereign invitation)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의 한계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사실 호기심이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만남은 예수가 인격적으로 삭개오를 부르고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제안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 해야 하겠다'는 표현은

신적 필연성(必然性)을 강조함과,

아울러 예수의 주권적 의지를 뚜렷이 드러내준다.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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