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맹인을 고쳐주심
성 경: [눅 18:35-43]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눅 18: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 여리고(Jericho)는 요단강 서쪽 약 8km,
예루살렘 북동쪽 약 24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읍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으로서
여호수아의 지휘아래 이스라엘 백성이
칼 한번 쓰지 않고 함락시킨 성읍이다. * 참조 : (수 6장).
그런데 예수 당시에 이 성읍은 신.구 여리고로 나뉘어져
구(舊) 여리고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헤롯 대왕에 의해 신(新) 여리고가 건설되었다.
헤롯대왕의 정책에 따라 신여리고가 나날이 발전함으로
구여리고는 계속 퇴락해가
예수 당시에 구여리고는 거의 황폐화되었다.
신여리고의 발전은 당시 팔레스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할 만큼 소문이 나 있었다.
어쨌든 여리고는 갈리리와의 연결로였으며 예루살렘의 관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은
곧 그의 죽음이 점점 임박해 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해 평행 구절인 마 20:29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막 10:46은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반되는 기록이 아니라 정확히 일치하는 기록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신.구 여리고 중
어느 한쪽에 먼저 들르셨다가 나오셔서 다른 한쪽으로 가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는 두 여리고 중
한 여리고에서 떠나시는 것을 기록했고,
누가는 예수께서 두 여리고 중 한 여리고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기록하였다.
▶ 한 맹인 - 마가에 의하면 이 사람은 '바디매오'이다.
그가 예수께 대해 보인 태도(다윗의 자손으로 부른 것)에 의하면
그는 분명히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으며
이미 그 마음에 예수의 메시야적인 능력에 대해 신뢰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 구걸하다가 - 당시 거지들은 종종 도시근처의 도로변을 따라서 구걸을 했다.
왜냐하면 도시의 도로변은 거지들이
사람들을 가장 많이 접촉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하는 의무를 소홀히 하였다.
(레 25:35-38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36)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37)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38)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따라서 거지들이 그들의 비참한 삶의 테두리 속에서 벗어나고픈 소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이 소경 거지는 메시야에게서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부끄러움 없이 예수의 관심을 끄는 소리를 질러댔고,
예수는 소경 거지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보게 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가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예수께 믿음으로 부르짖는다면,
그는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눅 18: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 예수께서는 수난 당하실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이 소경이 구걸을 하던 장소를 지나고 계셨다.
이미 예수의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분이 지나는 것을 보고 여기 저기에서 몰려들었다.
그때 거지 소경은 사람이 몰려 웅성대는 것을 보고
궁금히 여기며 그 장소로 다가갔다.
그는 일단 사람이 많이 몰려 있으므로 구걸하기에 좋은 여건이
조성되어 많은 구걸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눅 18: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 이 말은 구원의 기회가
마냥 인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를 만날 수 있을 때에 열의를 다해 그분 앞에 나아가야 된다는
긴박한 뜻을 먼저 암시하는 표현이다.
만일 소경 거지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며 묵묵히 동냥이나 하며 앉아 있었다면
그는 그토록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후 6:2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눅 18: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다윗의 자손 예수 - 마태는 이 칭호를 메시야의 의미로 즐겨 사용하곤 했다.
(마 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12: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칭호는 본서에서는 이곳에만 등장하는 데
기독교 이전의 문헌 가운데서는 솔로몬의 시편 17:21(위경)에서만
메시야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 뿐만 아니라
메시야로서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런데 예수께서 이 칭호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이제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군중들에게
드러내며 밝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 불쌍히 여기소서 - 이 말은 시 4:1;6:2;25:16;31:9;51:1;86:16등에서
멸시와 고통을 당한자,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께 고하는 외침의 한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시 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6: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25: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31:9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86:16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또한 이는 13절에서의
세리의 기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 더욱 크게 소리 질러 - '소리지르다'의 뜻인 헬라어 '크라조'는
본래 까마귀의 우는 소리에서 만들어진 의성어에서 유래한 말로,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동물들의 외침 소리와 같이 '악쓰는 소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모처럼 예수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된 그 소경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하는 구절이다.
[눅 18: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 아이러니칼(ironical)하게도 예수께서는
며칠 후에 빌라도를 통해서 본 구절에서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을 듣는다.
(요 18: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압제자 빌라도 앞에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서신 장면은
본장면과 잘 대비된다.
본문에서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의 모습을 갖고
무리들에게 열렬한 지지와 영접을 받으며 왕도(王都)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19:36-40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아울러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행차하시는 가운데서
불쌍한 소경 거지를 보신 예수는 진실로 위엄있는 왕의 권위로
거지에게 거룩한 능력의 은총을 베푸셨다.
반면 빌라도 앞에서 예수는 철저한 종의 형상으로,
또는 제단에 드려질 희생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따라서 공생애의 마지막,
이제 죽음의 장소를 향해 가시는 도중에서
다윗의 자손이며 왕이신 예수께서
거지 소경을 만난 사건은 실로 큰 의미가 있다.
[눅 18: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그 소경이 원하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질문은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경의 믿음을 유도하기 위해서 또는 고백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병자든 죄인이든 항상 이러한 식의 질문을 하신 연후에
그 질문의 대답대로 이루어 주시곤 했다.
이는 병자, 죄인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깊은 배려이기도 했으며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거지 소경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얼마간의 적선 행위가 아니라
눈을 치유 받는 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영혼의 눈을 뜨는 일이었던 것이다.
[눅 18: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네가 온전하게 되었다'고 하는 의미인(Robertson)
이 말씀은 그 소경이 육체적인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 곧 메시야를 만나 죄의 구속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구원의 역사가 바로 소경 자신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의 기적 행위를 있게 하는 보조 역할로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막 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눅 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 예수를 따르니 - 고침을 받은 그 소경이
단순히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뒤를 따른 것 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고 봄이 무난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주를 따르기로 했으며,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된 것 같다.
▶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 평행 본문 중에서 오직 누가만이 소경이었던 본인과
그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치유 기적 다음에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는 이러한 송영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17:1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하나님께는 찬양을 돌리고 그리스도 예수에게는
큰 신뢰를 나타내 보이게 된 그들의 태도는
예루살렘 성전 안의 종교 당국자들, 교권주의자들의 태도와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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