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2
성 경: [눅 19:6-10]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예수의 인격적 초청에 대한
삭개오의 응답은 전격적인 것이었다.
즉 '급히 내려와'라는 단어와 '즐거워하며'라는 단어,
그리고 '영접하거늘'이라는 단어는 예수의 제안을
더할나위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이다.
이는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의 인격적 부르심과 삭개오의 전격적인 영접은
구원의 눈부신 접촉점이 되고 있다.
이같이 누구에게든 향하고 있는 예수의 초청을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영접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된다.
삭개오가 이같이 기쁜 마음으로 승낙한 것은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명성에 대한 권위를 인정함을 뜻한다.
또 삭개오는 평소에 자신이 세리장이라는 직책과
정당하지 못한 세금 징수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샀을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소외된 아픈 심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행위에 대한 자책감으로 고민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름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어둠 속에 비추어지는 빛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그 명성 높으신 예수가 초청했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고
7절에 언급된 바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배척하는 지옥같은 상황으로부터
구원해주는 생생한 용서의 선언으로 이해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5절에서 언급한 '오늘'은
구원의 즉각성(卽刻性)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급히 내려와'라는 말과 맛물려
구원이 주저할 수 없는 결단성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또 9절에서 다시 '오늘'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구원의 즉각성을 재삼 강조한다.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당하였으므로 예수의 행위는 당연히 문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죄인의 집에 머물며 함께 식사한다는 사실은
죄인의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5:29-30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한편 이들의 수군거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두 가지 악한 본성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묻은 티를 흉보는 비판 심리이다.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특히 당시 유대인들은 왜곡된 선민의식에 근거한 교만과
자기 의를 과시하는 형식주의로 인해 타인을 비판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둘째는
타인의 잘됨을 시기하는 심리이다.
본문의 '뭇 사람'은 죄인에 불과한 세리장이
예수의 관심과 호의를 받게 되자 시기심이 발동하였던 것 같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 서서 주께 여짜오되 – 앞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삭개오가 말하고 있는 장소는 삭개오의 집 안이었을 것이다.
아마 식탁이나 탁자 주위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말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일어서서 말하는 행위는 말하는 사람의 진지함과
말하는 내용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엄숙성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 주여 보시옵소서 - 이미 삭개오는 예수께 대한 호칭을
신앙적인 의미의 '주'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또 삭개오는 '보시옵소서'(이두)라는 말로서
자신의 의지의 단호함과 실천 가능성에 있어서
자신 만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같은 말은
6절에서 언급된 바 있는 그의 기쁨과 결부되어 나오는 즐거운 선언임을 느낄 수 있다.
즉 강요에 의한 타율적 선언이 아니라 기쁨에 의한 자율적(自律的) 결단인 것이다.
▶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 삭개오는 당시
랍비들에 의해 제시된 구제비 곧 소유 혹은 수입의 20%보다
훨씬 많은 파격적 액수를 제시한다.
이러한 헌신적인 태도는,
영생을 사모하여 예수께로 나아왔으면서도
'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근심하여 집으로 돌아갔던 부자 청년의 모습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18:18-23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 여기서
'만일'로 시작되는 가정문은
삭개오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취한 사실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정문을 이끌고 있는 '에이'라는 단어를
' ∽ 하는 무엇이든지'라는 의미의 관계 접속사(everythint that...)로 해석하여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무엇이나'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에이'는 '멘'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어
'확실히' 또는 '틀림 없이'라는 뜻으로
서약문에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삭개오의 진술은 자신이 부당하게 취한 모든 것은
본래의 주인에게 확실하게 그리고 무엇이나 돌려준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삭개오는 부당하게 빼앗긴 사람에게
본래의 것의 4배를 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데
율법에 의하면 부정으로 취한 것을 돌려 줄때에는
1/5을 덧붙여 상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레 6:5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민 5:7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또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은 4배로 갚아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출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삼하 12:6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따라서 삭개오의 이같은 선언은
당시 율법이 정하는 도적질에 상당하는 배상을 하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삭개오 자신이 그같은 정도의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하는 셈이다.
이같은 삭개오의 파격적(破格的)인 행위는
자기중심적 삶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이 방향을 바꾸는 전격적인 회개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회개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회개는 죄에 대한 참회나 죄에 대한 단순한 고백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실천적 행동을 동반해야 한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 삭개오의 선언에 대한 예수의 응답 역시
즉각적인 것이었다.
즉 구원이 오늘 이 집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죄인에게 구원을 선언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실로 파격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같은 선언은
삭개오의 헌신적 ‘자아 부인(否認)’의 선언에 따른 직접적 결과임에 분명하다.
구원은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자아 부인의 실천적 결단을 통해 경험되는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이 말은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배타적인 대접을 받아온 삭개오를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게 한 형제로 살아가야 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특히 삭개오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삭개오야말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당시 종교적 복권은 곧 정치. 사회적 복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전인적 인간 구원을 의미한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 후 그 선언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미 앞 구절의 주석에서 밝힌 바 있듯이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소외되고 비뚤어진 인간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고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말은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과 파멸에로 향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선언은 사실 예수의 전체적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 삶이 불가능한 귀신 들린 자,
(마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문둥병자
(17: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벙어리, 귀머거리
(막 9: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소경 등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막 8: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平和)를 위한 사랑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사람다워 질 수 있도록 하는 예수의 구원 행위는
오늘의 기독교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선언이 이미 (5:31-32) 에서 언급되었는데
결국 삭개오는 이와 같은 선언의 실천적 모델(model)이 된 셈이다.
(5:3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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