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7일 일요일

하나는 마돈 왕이요 하나는 하솔 왕이요 하나는 시므론 므론 왕이요

  

여호수아가 정복한 요단 서편의 31왕들, 4

 

성 경: [12:19-24] 하나는 마돈 왕이요 하나는 하솔 왕이요

20) 하나는 시므론 므론 왕이요 하나는 악삽 왕이요

21) 하나는 다아낙 왕이요 하나는 므깃도 왕이요

22) 하나는 게데스 왕이요 하나는 갈멜의 욕느암 왕이요

23) 하나는 돌의 높은 곳의 돌 왕이요 하나는 길갈의 고임 왕이요

24) 하나는 디르사 왕이라 도합 삼십일 왕이었더라.

 

 

[12:19-20] 하나는 마돈 왕이요 하나는 하솔 왕이요

20) 하나는 시므론 므론 왕이요 하나는 악삽 왕이요 -

 

마돈 - 디베랴 서북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카른 하틴(Qarn Hattin)으로 추측되는데, 이곳은 본절과 12:19 두 구절에만 언급되어 있다.

 

(12:19 하나는 마돈 왕이요 하나는 하솔 왕이요)

 

하솔 - ''() 또는 '요새'(要塞)란 뜻으로, 당시 가나안 북부의 가장 크고 강력한 왕도(王都)였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 위치는 갈릴리(긴네렛)바다 북쪽 약 15km 지점, 훌레(메롬) 호수 서쪽 약 7km 지점의 '텔엘 - 케다이'(Tell el - Qeday)로 추정된다(Y. Yadin).

 

그리고 그 크기는 약 200에이커(1에이커=4km)에 이르는데, 이는 라기스의 18에이커, 므깃도의 14에이커, 여리고의 8에이커에 비하면 그 크기와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 가히 짐작된다(L. Wood).

 

그러나 하솔은 메롬 전투 패배 후 여호수아에 의해 불태워졌다.

 

(11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불로 하솔을 살랐으며).

 

이후 가나안 땅 분배시에는 납달리 지파에게 주어졌고,

 

(19:36 아다마와 라마와 하솔과),

 

사사 시대에는 다시 복구되어 수도가 되었으나, 곧이어 사사 드보라와 바락에 의해 정복당하였다.

 

(4:2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17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겐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하솔 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음이라;

 

삼상 12:9 그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붙이셨더니 그들이 치매).

 

이후 솔로몬이 중수하여 요새화 하였으나,

 

(왕상 9:15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여호와의 전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결국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1세에 의해 함락당하고 그 성 거민들은 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

 

(왕하 15: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시므론 - 디베랴 남쪽 19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가나안 북부의 주요 성읍인데, 후에 스불론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19:10 셋째로 스불론 자손을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의 경계는 사릿에 미치고,

 

15 또 갓닷과 나할랄과 시므론과 이달라와 베들레헴이니 모두 십이 성읍이요 또 그 촌락이라).

 

악삽 - 악고 동남쪽 11.2km 지점에 있는 현재의 텔 키산(Tell Kisan)으로 추정되는데, 후에 아셀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19:25 그 지경 안은 헬갓과 할리와 베덴과 악삽과).

 

한편, 여기서 '시므론 므론'(Shimron-meron)'시므론'과 동일한 곳이다.

 

 

[12:21] 하나는 다아낙 왕이요 하나는 므깃도 왕이요 -

 

다아낙 - 이스르엘 계곡 남쪽에 있으며, 샤론에서 내륙을 이어주는 해안 길인 비아마리스(Via Maris)가 이곳에 있다.

 

삼림이 우거진 북쪽 에브라임 산지 계곡은 매복하기에는 최적지이다.

가나안 점령 후 다아낙(Taanach)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돌아갔으나,

 

(21:25 또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준 것은 다아낙과 그 들과 가드림몬과 그 들이니 두 성읍이라),

 

므낫세 자손은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는 데 실패하였고 나중에 가서야 그들을 종으로 삼았다.

 

(사사 1:27-28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그리고 왕국 시대에는 다아낙이 레위인들의 여러 성읍 중 하나로 묘사되었고(대상 6), 솔로몬 치세 때에는 행정 구역상 주요한 이곳은 므깃도 동남쪽 약 6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델 타아낙'(Tell Taanak)으로 추정된다.

 

므깃도 - 샤론 평야와 이스르엘 골짜기 사이에 있는 비아 마리스(Via Maris)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해 있는 요충지이다.

따라서 이 곳은 애굽과 다메섹을 이어주는 주요 대상로(隊商路)였다.

가나안 정복 후 므깃도(Megiddo)는 므낫세 지파에게 할당되었지만, 므낫세 자손들은 므깃도나 이스르엘 평야 주변의 다른 요새 성읍들을 정복하지 못했다.

 

(17:11 잇사갈과 아셀에도 므낫세의 소유가 있으니 곧 벧스안과 그 향리와 이블르암과 그 향리와 돌의 거민과 그 향리요 또 엔돌 거민과 그 향리와 다아낙 거민과 그 향리와 므깃도 거민과 그 향리들 세 높은 곳이라;

 

1: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그러나 후일 솔로몬 치세 시에 므깃도와 하솔 및 게셀은 모두 정복되어 솔로몬 왕의 군사 요새로 사용되었으며,

 

(왕상 9:15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여호와의 전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나중에 므깃도는 솔로몬의 다섯 번째 행정 지구에 편입되었다.

 

(왕상 4:12 다아낙과 므깃도와 이스르엘 아래 사르단 가에 있는 벧소안 온 땅은 아힐룻의 아들 바아나가 맡았으니 벧소안에서부터 아벨므홀라에 이르고 욕느암 바깥까지 미쳤으며).

 

후일 이곳은 유대 왕 아하 시야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한 곳으로,

 

(왕하 9:27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동산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쫓아가며 이르되 저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저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그리고 요시야 왕이 애굽의 바로 느고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곳으로 유명하다.

 

(왕하 23:29-30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본 후에 죽인지라

30) 신복들이 그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 묘실에 장사하니 국민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저에게 기름을 붓고 그 부친을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

 

특히 최후의 '아마겟돈'('므깃도의 언덕'이란 뜻) 전쟁이 일어날 곳으로 예언된 장소이기도 한다.

 

(16: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한편 로빈슨(Robinson)은 이곳을 오늘날의 '레윤'(Lejjun)으로 추정한다.

 

 

[12:22] 하나는 게데스 왕이요 하나는 갈멜의 욕느암 왕이요 -

 

게데스 - '납달리 산지의 게데스'라고도 불리우는데,

 

(19:35-38 그 견고한 성읍들은 싯딤과 세르와 함맛과 락갓과 긴네렛과

36) 아다마와 라마와 하솔과

37) 게데스와 에드레이와 엔 하솔과

38) 이론과 믹다렐과 호렘과 벧 아낫과 벧 세메스니 모두 십구 성읍이요 또 그 촌락이라;

 

20:7 무리가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구별하였고)

 

요단강 서편에 위치한 세 도피성 중에 하나이다.

 

(19:37 게데스와 에드레이와 엔 하솔과;

 

20:7 무리가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구별하였고;

 

21:32 납달리 지파 중에서는 살인자의 도피성 갈릴리 게데스와 그 들을 주었고 또 함못 돌과 그 들과 가르단과 그 들을 주었으니 세 성읍이라)

 

또한 사사 바락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4:6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후일 이곳은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정복당했다.

 

(왕하 15: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현재는 훌레(Huleh)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가데스'(Tell Kades)로 알려져 있다.

 

욕느암 - 갈멜 산 근처, 스불론 지파의 서남쪽 국경에 있던 한 성읍으로,

 

(19:11 서편으로 올라가서 마랄라에 이르러 답베셋에 미치고 욕느암 앞 시내에 미치며)

 

레위 지파의 므라리 자손에게 다시 분배되었다.

 

(21:34 그 남은 레위 사람 므라리 자손의 가족들에게 준 것은 스불론 지파 중에서 욕느암과 그 들과 가르다와 그 들과).

 

욕느암(Jokneam)은 오늘날의 '텔 쿠이문'(Tell Quimun)과 동일시 되는데, 이곳은 므깃도 북서쪽 약 11km에 위치한 작은 언덕이다.

 

 

[12:23] 하나는 돌의 높은 곳의 돌 왕이요 하나는 길갈의 고임 왕이요 -

 

- 가이샤랴에서 북쪽으로 약 12.8km지점, 갈멜 산 남쪽 약 17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팔레스틴 해안의 요새화된 성읍이다.

 

이곳은 해안을 따라 자주빛 물감의 원료가 되는 조개가 많았기 때문에, 아주 고대로부터 베니게 인들이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

 

가나안 정복 후 아셀 지파에게 분배되었다가 다시 므낫세 지파에게 주어졌다.

 

(17:11 잇사갈과 아셀에도 므낫세의 소유가 있으니 곧 벧스안과 그 향리와 이블르암과 그 향리와 돌의 거민과 그 향리요 또 엔돌 거민과 그 향리와 다아낙 거민과 그 향리와 므깃도 거민과 그 향리들 세 높은 곳이라).

 

오늘날의 '탄투라'(Tantura)로 추정된다(Wilson, The Holy Land).

 

길갈의 고임 왕 - '길갈'(Gilgal)은 성경에서 5개와 각기 다른 곳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의 길갈은 팔레스틴 북방에 있는 갈릴리 지방의 길갈을 가리킨다.

 

이 길갈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명단에 나타나는 왕들이 주로 북쪽 지역의 왕들인 점으로 미루어, 이 길갈 역시 사마리아 북쪽 지중해와 갈릴리 사이에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곳은 오늘날 북부 요단 평야에 있는 '일율리예'(Jiljulieh)로 보기도 한다(Van de Velde, Conder, Robinson).

 

그리고 '고임'은 히브리어로 '민족들', '족속들'을 뜻하는 말로, '길갈의 고임 왕'이란 길갈 족속들의 왕을 가리킨다.

 

 

[12:24] 하나는 디르사 왕이라 도합 삼십일 왕이었더라.

 

디르사 - 동쪽 아담의 시내쪽에서 요단 계곡으로 들어가는 와디 파라(Wadi Farah)의 내리막 길에 위치해 있다.

 

이 주위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6:4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므낫세반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17:2-3 므낫세의 남은 자손을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는데 그들은 곧 아비에셀의 자손과 헬렉의 자손과 아스리엘의 자손과 세겜의 자손과 헤벨의 자손과 스미다의 자손이니 그들의 가족대로 요셉의 아들 므낫세의 남 자손이며

3) 헤벨의 아들 길르앗의 손자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요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디르사'(Tirzah)는 오므리가 사마리아 성을 건축할 때까지 여로보암 1세로부터 바아사와 엘라와 시므리 때까지 약 40년간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다.

 

(왕상 14:17 여로보암의 처가 일어나 디르사로 돌아가서 집 문지방에 이를 때에 아이가 죽은지라;

 

16:8-9 유다 왕 아사 제이십륙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디르사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을 위에 있으니라

(왕상 16:9) 엘라가 디르사에 있어 궁내 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에 그 신복 곧 병거 절반을 통솔한 장관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이곳의 오늘날의 위치는 세겜에서 북으로 약 2시간 거리 떨어져 있는 '탈루자'(Talluza)로 추정된다(Robinson, Knobel, Vande Vel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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