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흠점(欠點)에 대하여 2
‘여러 형제여, 나는 바리새교인이요, 또 바리새교인의 아들이요. 죽은 자의 부활을 소망하는 문제로 나는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요’(사도행전 23:6)라고.
그가 그렇게 말한 때에 그의 심판인 사이에 커다란 쟁론이 일어났다.
그것은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고, 바리새인은 이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심판은 그치고, 바울은 로마 군대에 인도되어 무사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바울은 잘 암기웅변 했달 수가 있다. 반대자의 분쟁을 이용하여 자기의 안전을 꾀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 했다고 하면 아무 탓할 바는 없다. 하지만 복음의 선전자(전도인)의 행위로서는 비난할 바 없지 않는 것이다. 특히 그가 의회를 속인 점 없지 않다.
그가 ‘나는 바리새인이요’라고 했는데, 그것은 문자대로 사실은 아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지만 지금은 크리스천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이라고 한 것은 거짓이랄 수가 있다. 어쨌거나, 이 경우에 있어서 바울은 사도답지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지 않다.
엄격히 말하면, 바울은 여기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적을 속여 자기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도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그는 복음의 전달자라 하여 사람에게 속아야 할 것은 아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죄인으로서 정죄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의 내홍(내분)을 이용하여 재액을 면할 것은 나쁜 일로서 볼 수는 없다. 그는 이것 때문에 별로 심판인에게 해를 가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들이 상시 거듭하던 쟁론을 이용하여 한 때의 난을 피했던 것이다.
적기에 임기응변한 것이다. 그가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조용히 대처한 그의 조치(선처)에 경복치 않을 수 없다. 이로서 본대도, 바울은 결코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호인은 아니었다.
일이 지난 후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서로 말했으리라.
‘저 바울은 아주 다루기 어려운 놈이다. 우리의 분쟁을 이용하여 우리를 쳤다. 우리들은 저 한 사람에게 본때 있게 한 대 맞았다’고.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인의 병영에 보내진 후, 독방에서 혼자 쾌소(快笑)에 잠겼으리라.
원래, 전도는 의무인 동시에 또 커다란 쾌락이다.
무슨 일에 있어서든 쾌락이 동반치 않는 일은 영속치 못한다.
바울이 일생을 통해 전도에 종사하여 지치지 않았던 이유의 하나는,
확실히 그가 이에 커다란 쾌락을 느꼈기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쾌락 있는 곳에 웃음은 절로 금치 못한다.
바울은 천연을 사랑하고 미술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방면에 있어서 그에게 쾌락은 없었으나, 인사에 있어서는 그에게 충분한 요해(이해)가 있었고, 따라서 그 관찰에 커다란 취미를 가졌다.
그는 인간의 기소적(譏笑的) 방면을 보아 넘기지(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오인은 마틴루터의 일화집을 가지고 있듯 바울의 그것을 가지지 못한다.
만약 누가가 후세를 위해 바울의 일화집을 남겨 주었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으랴!
그러나 오인이 오늘 가지고 있는 기록 중에 조금이라도 그의 휴모어적 일면을 엿볼 수 있어 커다란 감사이다.
이상은 바울의 흠점이라 해도 작고 경한 흠점이다.
그렇지만 이 밖에 달리 커다란 중한 흠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적을 욕한 말이다.
‘악으로서 악을 갚지 말라……내 사랑하는 자여, 원수를 갚지 말라. 물러가서 주의 노하심을 기다리라’고 스스로 가르친 바울 자신이,
반대자에 대하여 퍽이나 격한 말을 했다. 만약 일본의 그리스도계에 있어서 나의 반대자에 대하여, 바울이 한 것 같은 말을 내가 했더라면, 사람들은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았으리라.
미국선교사 같은 이는 반드시 나를 책잡든지 ‘비 그리스도교적’이라는 말로서 했으리라. 하지만 사실은 덮어둘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 가장 저명한 것을 여기서 싣는다.
빌립보 3장 2절에 있어서, 그는 빌립보에 있는 신자에게 주의를 촉구하여 말했다.
‘너희는 개를 삼가라. 악을 행하는 자를 삼가라. 할례를 행하는 자를 삼가라’고.
이것은 대단한 욕이다. 할례를 행하는 자란, 모세의 율법의 실행을 필요로 인정하는 그리스도 신자로서, 바울의 교의상의 반대자이다.
그런 사람을 불러 악을 행하는 자라하고, 다시 ‘개’라 한다.
이것은 무례한 일이며, 조포, 야비한 일이다. 어떻게 본대도 그리스도적 신자가 한 말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이것으로서 만족치 않고, 다시 더 세찬 말을 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 5장 12절이다.
(갈라디아서 5장 12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그 의미는 명백하여, 그리스어로서 성서를 읽는 자는 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하지만 너무나도 추악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이것을 덮어두려 하고, 이것을 외어로 역하는데 있어서는 전연 원의를 보이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옛 일본역에 의하면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가, 스스로 너희에게서 떠나기를 원한다’고 있어서, 그 안에 아무런 꺼릴 것 없다 해도, 그것이 충실한 번역작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개정역에 있어서는 조금 원문의 뜻을 보이려 애써, 다음과 같이 역했다.
‘원하옵기는,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가, 스스로를 불구로 되게 하기를’이라고.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다. 바울은 그런 약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할례를 너희께 강요하여, 너희의 신앙을 어지럽히는 자가, 더 나아가 양(양물)을 그 근부터 끊어 버리기를’이라고.
즉 할례란 양물(남자생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인데, 그것이 구령에 필요하다면, 더 나아가 양의 근(시근)부터 끊기를 권한다는 것이다. 할례를 조소한 말로 이것보다도 격렬한 것은 없다.
바울은 이 과격한 말을 발함에 있어서 신명기 23장 1절을 심중에 가졌으리라.
(신명기 23장 1절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리스도교의 전도사인 자가, 그러한 과격한, 그것도 야비한 말을 발하여 적을 욕(비나)해 좋을까?
이것은 어떻게 본대도 바울의 흠점으로서, 이 일에 대하여 그를 변호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흠점은 미점을 보여주는 일조인 것으로서, 이 흠점에 의해 바울의 심중 깊은 데를 엿볼 수가 있다.
즉 그가 열렬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잘 사랑함과 동시에 잘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박사 죤슨은 잘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의 클럽(회)의 일원됨을 허락하지 않았다는데, 실로 잘 증오할 수 없는 자는 잘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실한 사람은 중도반도일 수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사랑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격려되어 사랑의 구역을 넓히고 또 깊이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과 동시에 또 그 사람을 유린하는 자에 대하여 견딜 수 없는 노를 품기에 이른 것도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말할 것도 없이 바울에게 예언자 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는 태워버리는 불같은 예언자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천성은 쉽게 없어지는 것 아니다.
마치 일본 무사가 그리스도 신자로 되어 종생 무사기질을 간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예언자는 퍽 단호한 말을 썼다. 바울은 구약의 예언서에서, 그가 갈라디아서에서 쓴 것 같은 말의 모범을 보았다.
예레미야 2장 24절 같은 것, 그 하나이다.
(예레미야 2장 24절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완만한 일본역으로도 얼마쯤 그 원의를 엿볼 수가 있다.
에스겔서 16장 26절 같은 것,
(에스겔서 16장 26 하체가 큰 네 이웃 나라 애굽 사람과도 음행하되 심히 음란히 하여 내 진노를 샀도다)
도저히 원어 그대로를 역출하여 이것을 오늘의 신사 숙녀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그러나 열성으로 불타는 예언자들은 그의 의분을 표시하는데 있어서 말의 선택에 유의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예의도 무례도 도외시하고, 백성의 불의불신을 책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얼마나 격렬한 말을 썼지만도 그래도 부족을 느꼈던 것이다.
예의의 사람 반드시 선인이 아니다.
많은 악인이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의 바울의 ‘무례’ 같은 것, 종종 그의 중심의 열성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타 세어보면 바울의 흠점은 아직 다른 것도 있다. 고린도후서 같은 것, 결코 온후독실한 군자의 심정의 노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 있으므로 우리들은 바울의 사람됨(인격)을 잘 해득할 수가 있다. 고린도후서는 그것 때문에 특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바울은 흠점 낳은 사람이었다고 단언하여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흠점 있기 때문에 그에게 보인 하나님의 은혜가 일층 분명히 우리에게 보이고,
우리들은 이에 격려되어, 우리의 흠점에 눈을 쏟지 않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우러러 보고,
우리들의 구원의 완성을 도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의 흠점 때문에 실족하는 자는 아직 그리스도의 완전과 그 능력을 모르는 자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주이시고, 바울은 구원된 자이다.
구원된 자가 완전할 리는 없다. 스스로 칭하여 ‘죄인의 괴수’라고 한 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하여 급히 완전해질 리는 없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그의 생애의 나중에 임박하여, 완전에 달하기에는 아직 먼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 있어서 그는 말했다.
‘내가 이들 바라는 것을 이미 얻었다고 함이 아니다. 또 이미 완전해졌다고 하는 것 아니다. 이를 취하려고, 나는 다만 이것을 추구한다’고.
완전을 추구하는 점에 있어서 바울도 우리도 다를 바는 없다.
주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스승은 한 사람, 곧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모두 형제이다’(마태복음 23:8)라고.
바울은 우리들의 스승이 아니라, 우리들의 형제이다.
훌륭한 형제임에 틀림없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자녀이다.
구원된 죄인으로서, 죄를 모르는 성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리운 바가 있다.
나는 나의 최선최대의 장형으로서 다소의 방루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웃고 또 노했다.
그에게 예언자의 조야한데가 있었다. 동시에 또 부인 같은 섬미한데가 있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접근하여, 그는 아주 친근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내촌감삼의 글에서)
*이상으로 ‘사도행전 연구’ 전과정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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