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31일 금요일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실족케 함에 대하여

누가복음 17:1-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는다.

. "실족케 함""큰 죄"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이것을 피하고 조심스럽게 주의해야 한다.

 

(1-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사람의 왜곡됨과 비꼬인 성미를 생각할 때 우리는 실족케 하는 것이

필연적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실족케 하는 일에서까지도 그의 선한 사업을 수행하시며,

악에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현명하신 계획과 목적을 기대할 수는 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적절하게 대비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큰 화가 있으리라"(12).

 

그의 운명은 어두워질 것이다.

그의 운명은 중죄를 지어 바다에 던지워 질 운명에 처한 죄인의

비참함보다 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자 맷돌보다 더 무거운 죄책의 짐 아래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주는 다음과 같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1. 박해자에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작은 자들 중"의 하나에게라도 말이나 행동으로라도 해를 끼치며,

그것 때문에 해()받은 이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에 낙심하고,

그 의무를 다함에 용기를 잃는다.

즉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 표류할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한다.

 

2. 유혹자에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 의식을 타락시키고

그래서 "제자들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그들이야말로, "실족케 함을 가져오는" 자들이다.

 

3. 말로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달고 추잡한 생활을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고, 마음을 슬프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통해 실족이 온다.

그것은 그들의 죄책과 벌을 조금도 감하거나 경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 "남이 자기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의 "큰 의무"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러한 죄를 짓지나 않을까를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본문의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 가장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으로

앞의 구절에서 언급한 자들을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확실히 교역자들은 교인들을 낙심하게 할 언행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들은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고

혹 교인들을 낙심시키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늘 깊이 생각한 후에 말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둘째는

후에 나오는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에게 같이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경고로 볼 수 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곧 어떤 해를 입혔거나 재산의 손해를 입혔거든 격노하여 말을 함부로 내뱉거나 거칠게 복수를 선언하지 말라. 이런 때는 특히 혹 실언을 하지나 않을까 하여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좀 더 상세히 고찰해 보자.

1. 사람이 너에게 잘못했을 때에는

그를 경계할 만한 처지라면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분노는 억지로 참을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나타낼 것이다.

그에게 잘못된 점을 말해 주되

어떤 점에서 그가 잘못했으며 너에게 잘못한 일이 무엇임을 말해 줄 것이다.

아무도 네가 그를 오해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너는 할 수 있는 대로 이해하려고 힘 쓸 것이다),

네가 그를 오해했다거나 그가 고의로 한 짓이 아니고

단지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그를 오해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용서를 빌게 될지도 모른다.

* 참조 (22:30-31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한 회중의 지도자들 곧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긴지라

(22:31)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고).

 

2. 그가 잘못을 뉘우쳤을 때는 그를 용서할 것이며,

그와 완전히 화해하라는 말이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손상 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는 생각하지 말며,

그것으로 너무 책망하지 말지어다. 그가 뉘우치지 않더라도,

그에게 원한을 품지 말 것이며,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적어도 내가 회개하노라 고도 말하지 않으면,

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친숙하게 지내야만 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만일 그가 큰 죄를 범했으면 그가 속해 있는 그리스도교 사회에 대한

범죄자로서 엄숙하면서도 온순하게 훈계하고,

그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다시 우정으로 친교를 맺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용서라고 말했다.

 

(고후 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3.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면 그 때마다 몇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이다.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사람이 너무도 조심성이 없거나 너무도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더라도 하루에 일곱 번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와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더라도

그러한 죄를 다시 안 짓겠노라는 약속을 받고,

다시 "너는 용서하라." 잘못을 범하는 것이 인간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관용의 정신을 가져서

모든 사람을 가장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에 힘쓰며,

모든 사람을 안심하고 대하기에 힘쓰며,

사람들의 잘못을 가볍게 보며 사람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하는 본을 보이기에 힘쓰도록 할 것이다.

 

Diamonds by Rihanna (written by Sia) | Cover by One Voice Children's Choir

2021년 12월 30일 목요일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富者)와 빈자(貧者)

 

누가복음 1619-31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먼저 눈을 감고서,

마음에 이 구절의 광경을 그려보십시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서 자랑하는 부자와,

피부는 상처 나서 헌데로 시달리고,

개가 와서 핥는다는 빈자.

 

미미가효(미효 side-dish)로 호사하며 즐기는 부자.

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부양되려는 빈자.

그 대조가 실로 현저합니다.

 

그리고 부자의 씨명(氏名)을 올리지 않고,

도리어 빈자 나사로의 이름을 서명(기명)

그리스도의 태도야말로,

먼저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사실입니다.

 

특히, 그 양자의 구음을 말씀하심에 이르러서,

말씀, 간결하고 의미심장, 문장의 묘를 다하고 있습니다.

 

즉 빈자는 죽어 그 영이 곧 아브라함의 몸으로 보내지고,

부자는 죽어 그 유해 앞에 장려한 장의의식이 드려졌다고.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다만 이 일련구(a couplet)에 이미 만곡(무한 copiousness)의 맛이

담겨져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활화는 일전 합니다.

다만 일매의 흑막(black curtain)의 전후입니다마는,

이 세상과 내세와는 잘도 모든 것의 위치가

전도(upsetting)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빈자가 위로되고, 부자가 고통하며,

그 사이에는 커다란 심연이 있어서,

건널 수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현세와 내세와의 구별은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고,

광경의 급전,

실로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합니다.

 

그리고 내세는 보통으로 생각되듯 무차별평등의 세계는 아닙니다.

다만 그 차별이 연유되는 표준이 다릅니다.

 

즉 사람의 눈으로 보는 계급은

()와 위계(位階)에 의해,

 

하나님의 눈에 나뉘는 계급은

순 도덕적 가치에 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큰 자, 부한 자, 권세 있는 자가

반드시 참으로 큰 자, 부한 자, 권세 있는 자가 아닌 것으로 됩니다.

 

참으로 이것을 정하는 것은 내세인 것으로,

부자도 음부의 고통에는 다만 한 방울(a drop)의 물조차 갈하고,

개에게 마저 업신여김을 당하던 나사로는

도리어 안태(安泰)의 품에 쉬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 주인이 아니고, 노복, 노복이 아닙니다.

정신 차려야 할 일들입니다.

 

다시 두 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25절 및 29절에 있는 아브라함의 말입니다.

 

첫째(1)로 말하기를,

 

'아들아, 너는 살았을 때에 네 행운을 받고, 또 나사로는 고통을 받은 것을 기억하라'(25일역).

 

일본 역에 있는 '그 고통'이라는 것은 오역입니다. 없이 하는 편이 낫습니다.

 

즉 이 의미는,

부인(富人)은 그가 스스로 행운이라고 믿는바

행운(행복-하나님 편에서 보신 행운이 아니라)을 마음껏 누리고,

나사로는 그 스스로는 원하지 않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고통의 생애를 보냈다는 의미입니다.

 

''라는 한자의 유무에 의해 크게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즉 성서의 설은,

부자 반드시 악하여 내세에 고통하고,

빈인 반드시 선하여 위로 받는다고는 단정하지 않습니다.

 

부와 빈은 그것 자신이 내세의 행불행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현세에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행복을 마음껏 다한 것과,

자기가 원치 않는 불우의 일생도 유순하게 보낸 자와,

내세에 있어서 차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르기를,

 

'그들에게 모세와 예언자 있으매 이에 들을 것이다. 만약 모세와 예언자에게 듣지 않으면, 가령 죽은 데서 살아나는 자 있대도, 그 권면을 받지 않을 것이다'(29, 31일역)라고.

 

이는 실로 우리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왕왕 사람은 말합니다.

기적으로써 증거 하면 믿겠다고.

그러나 성서에 의해 믿지 않는 자가

어떤 방법에 의한다고 믿기에 이를 것 일지요?

 

그리고 또,

먼저 성서에 의해 믿지 않을 정도의 사람에게는,

기적을 준대도 이것을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가령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부인의 집으로 보냈다고 하십시다.

5인의 형제들은 이것을 이러쿵저러쿵 해석해 버리고,

참으로 하나님의 보내신 부활의 사자로서 받을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부자의 형제들 뿐은 아닙니다.

세상 일상(日常)의 일로서,

또 우리들도 빠지기 쉬운 유상(그릇된 생각 delusion)입니다.

 

*내촌감삼의 해석을 참조.